25화
미아는 어렵지 않게 무도회장을 빠져나와, 황궁 레벤토르의 정문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밖으로 나가서 세레니티를 찾아야 해!’
몇 개의 궁을 지나치자 곧 일직선상에 궁의 입구가 보였다. 무도회 때문에 많은 기사가 경비를 서고 있었다. 열심히 달리던 미아는 곧 창살로 된 입구 너머에서 누군가의 실루엣을 보았다.
“허…….”
미아가 저도 모르게 걸음을 멈췄다. 멀리서 봐도 알 수 있었다.
‘세레니티 듀레인. 이 세계의 중심. 이 소설의…… 여자주인공.’
보자마자 깨달을 수 있었다.
그녀는 특별하다.
물결치는 금발에, 태양을 닮은 금빛 눈.
사슴처럼 우아하게 뻗은 목과 진주처럼 뽀얀 피부.
오래된 드레스를 입고 있어도 그녀의 미모는 바래지 않았다. 어차피 얼마나 화려하게 입었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어디 있든, 뭘 입었든 세레니티는 뻐꾸기 사이의 백조처럼 눈에 띌 테니까.
세레니티의 존재 자체가 마치 자신이 여자주인공이라고 외치는 듯했다. 경비병에게 초대장을 검사받고 있는지 가만히 선 모습이 마치 영화의 한 장면처럼 보였다.
‘……예쁘다.’
순간 미아는 자신이 아딜로트였어도 반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 정도 미모라면 그녀에게 무관심했던 사람도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을 테니까.
거기다가 성격까지 착하고, 똑똑하기까지 하니 말 다 한 셈이다.
‘어쩐지 힘 빠지네.’
미아의 걸음이 느려졌다. 언제 죽을지 모르는 자신과 달리, 세레니티에게는 고난 끝의 성공이 예정되어 있었다.
멍하니 생각을 이어 가던 미아가 파드득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노력해서 살아남으면 되는 거잖아! 아딜의 오해도 풀고, 황태후도 해결하고!”
이참에 아예 구두를 벗었다. 달리기가 좀 더 수월해졌다. 세레니티를 만나려면 꽤 큰 정원을 지나쳐야만 했기에 최대한 서둘러야만 했다.
“세레니티―!”
미아가 목소리를 높이며 달리기 시작했다.
“……!”
그때였다. 정원에서 불쑥 분홍색 머리카락의 중년이 튀어나온 것이.
“미아!”
“……!”
달려가던 미아가 일순 비틀거렸다. 그녀의 얼굴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셀레……, 아버지?”
“미아! 내 딸, 미아……!”
갑자기 그녀의 앞으로 튀어나온 사람은 다름 아닌 셀레스티얼 백작이었다.
미아가 만들어 준 돈을 전부 반역 자금으로 잃고, 반역에 실패한 뒤 혼자 도주한 남자.
가주로서의 책임감도, 아비로서의 책임감도 없는 남자.
미아가 양손에 구두를 쥔 채 주춤거렸다.
‘다행히 무기는…… 없네. 그래, 딸 만나러 오는데 무기까지 들면 진짜 쓰레기지.’
그야 자기 딸에게 해를 가하진 않겠지만 또 모르는 일이었다. 셀레스티얼 백작은 절박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미아, 내가 얼마나 널 찾아 헤맸는지 아니……? 빨리 이리로 오거라, 이야기를 좀 하자꾸나!”
수풀 속에서 튀어나온 셀레스티얼 백작은 연신 주변의 눈치를 보았다.
‘경비병이 올까?’
그리고 그건 미아가 바라는 것이자, 백작이 바라지 않는 것이기도 했다. 미아가 입술을 깨물고서 백작과 궁 입구를 번갈아 보았다.
‘렌이 저기에 있는데……!’
미아의 마음이 조급해졌다.
“여기서 뭐 하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나중에 하죠! 제가 지금은 좀 바빠서!”
“미아! 쉿! 조용히 하고 이리로 오래도!? 시간이 없다!”
셀레스티얼 백작은 미아의 말을 듣지 않았다. 그가 불쑥 다가와 미아의 팔을 쥐었다.
“아! 아파요!”
“어서! 누가 듣겠어!”
“잠깐, 안 돼! 렌!”
미아의 만류는 소용없었다. 중년 남자의 힘을 미아가 버틸 수 있을 리 없었다.
“세레니티! 제발 누가 여기 좀……!”
나무에 가려진 탓에 미아의 애절한 외침은 세레니티에게 닿지 않았다.
“……!”
곧 멀리서 보이던 세레니티의 실루엣이 사라졌다. 여자주인공의 광채도, 시선을 잡아끄는 존재감도 사라졌다.
초대장 검사가 끝난 모양이었다. 가짜 초대장을 들고 무도회에 참석하려 했던 세레니티는, 이제 원작대로 수치심과 슬픔을 끌어안고 듀레인 남작가로 돌아가리라.
“안 돼…….”
기어이 삯마차가 궁을 벗어나는 소리가 들렸다. 미아의 온몸에서 힘이 빠졌다.
‘……지금밖에 기회가 없었는데! 절호의 기회였는데!’
셀레스티얼 백작은 여전히 옆에서 뭔가를 주절대기 바빴다.
“미아, 내 말 잘 듣거라. 아비가…….”
미아는 입술을 깨물었다가, 세차게 고개를 돌렸다.
“그만해요!”
여전히 백작에게 팔을 붙잡힌 채로 미아가 외쳤다. 그녀는 사납게 백작을 노려보았다.
“대체 뭐 하자는 거예요? 반역 같은 거나 저지르고! 제가 하지 말라고 했잖아요!”
“미아, 그보다 잘했다! 황제의 총애를 받고 있다면서!”
“총애 같은 거 아니라니까, 정말!”
도저히 말이 안 통해!
고개를 저은 미아가 주위를 둘러보았다.
‘사람이다!’
다행히 나무 사이로 누군가의 검은 실루엣이 움찔거리는 게 보였다.
“저기요! 제발 사람을 불러와 줘요! 페르를! 아니, 아무나 기사를!”
“…….”
하지만 그 실루엣은 머뭇거리는가 싶더니, 이내 사라져 버렸다.
‘……이럴 수가.’
뒤늦게 그것을 눈치챈 셀레스티얼 백작의 눈이 사나워졌다.
“미아! 정신 차리렴! 우린 해낼 수 있어!”
“아, 반역 같은 거 해내고 싶은 생각이 없다니까요, 전!”
“아비 말 듣거라! 우리가 성공하면 많은 재물이 보장되어 있단다……! 자, 이걸 받거라.”
그렇게 말한 셀레스티얼 백작이 곧 품속에서 작은 주머니 하나를 꺼냈다. 그리고 억지로 미아의 손에 쥐여 주었다. 그가 서슬 퍼런 목소리로 속삭였다.
“맹독이다. 이걸 꼭 황제에게 먹여.”
“……!”
“네가 황제와 침실을 공유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어때, 쉽지……?”
질린다는 얼굴을 한 미아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싫어요! 그만 좀 하세요! 반역에다가, 독살 시도에다가! 왜 그런 걸 하는 거예요, 대체!”
“황태후가 우리에게 큰 부와 명예를 약속했단 말이다!”
“거기 누구지?”
그때, 뒤편에서 누군가의 중저음이 들렸다. 흠칫 놀란 셀레스티얼 백작이 천천히 뒷걸음질 쳤다. 그는 마지막으로 미아를 향해 이글거리는 눈빛을 보냈다.
“꼭 해내야 한다!”
백작은 그 말을 남기고 수풀 속으로 사라졌다. 미아의 손에 정체 모를 주머니를 남긴 채.
“미아 셀레스티얼.”
그 직후, 운명의 장난처럼 페르디안이 나타났다.
“방금 같이 있던 자는……, 설마?”
“페르!”
그를 본 미아의 얼굴이 밝아졌다.
“페르! 도와주러……!”
“누구와 있었지? 바른 대로 고해라.”
하지만 페르디안의 얼굴은 차가웠다.
말을 이으려던 미아가 멈칫했다.
‘아까 그 사람이 페르를 불러온 게 아닌가?’
그렇다는 건, 아군이 아니다.
미아가 겁에 질린 채 뒷걸음질 쳤다.
“그게, 백작이……. 그러니까, 나는 모르는 일인데……!”
페르디안이 미아의 손에 들린 주머니를 보고 잿빛 눈을 사납게 빛냈다.
“역시 첩자였군.”
“아니야!”
미아는 어쩔 줄 몰라 주머니를 내밀며 페르디안에게 다가갔다.
“이거 절대 내가 받으려던 게 아니라……!”
“자리에서 멈춰라. 반항할 생각이라면…….”
“아니라니까! 나 정말……!”
미아가 울먹이며 한 걸음 더 나선 순간이었다. 페르디안 경고 없이 검을 휘둘렀다.
“꺄악!”
미아가 반사적으로 팔을 들어 자신의 머리를 가렸다. 그 순간 하필이면 페르디안의 검이 미아가 들고 있는 주머니를 갈랐다.
푸확!
주머니 안에서 노란 가루가 터져 나왔다. 그것은 바람을 타고, 미아에게로 끼얹어졌다.
“아악!”
노란 가루를 들이마신 미아가 고통에 비명을 질렀다. 순식간에 머리가 띵해지고 구역감이 치밀었다. 온몸의 신경이 미쳐 날뛰는 듯했고, 배 안쪽이 녹아내릴 듯 뜨거워졌다.
‘아닌데! 나 아니란 말야…….’
미아는 억울한 마음으로 컥컥거리며 비틀거렸다.
눈물로 흐려진 시야 너머.
페르디안이 검을 든 채 당황한 표정을 짓고 있는 것이 보였다. 뒤늦게 누군가가 한 무리의 기사를 이끌고 달려왔다.
“아이고! 결국 일이……! 그놈한테 아가씨가 먼저 당해 버렸구만!”
“그놈?”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만 같은 미아의 귓가에 의아하게 되묻는 페르디안의 음성이 들렸다.
“……어!”
“……슨.”
그러나 이젠 그마저 뚝뚝 끊겼다. 물에 빠진 것처럼 모든 소리가 답답하게 들렸다.
‘정말 아니라고……. 왜 아무도 나는 믿어 주지 않아……. 페르도, 아딜도…….’
쿨럭.
한 번 더 기침했을 때, 기어코 미아의 입에서 새빨간 피가 흘러나왔다.
곧 미아의 의식이 끊겼다.
* * *
미아는 2주를 앓았다. 정신이 혼미하고 몸 내부가 뜨거웠다. 내장이 녹아내리는 느낌이었다. 숨 쉬는 것도 어려웠고, 가끔 이성이 돌아오면 토하기 바빴다.
가까스로 제정신을 차렸을 때, 그녀는 빛이 잘 드는 큰 방에 누워 있었다.
“흠, 흠. 일어났나?”
미아를 가장 먼저 맞이한 건 지로티 공작이었다. 여전히 술병을 들고 있긴 했지만, 몸에서 술 냄새는 나지 않았다. 수염과 머리카락도 자유분방한 것에 비해 깔끔했다.
미아가 말라붙은 입술을 뗐다.
“여긴…….”
“폐하께서 따로 마련해 주신 침실이네. 환자니까 말이야.”
미아가 잘 움직이지 않는 고개를 돌려 방을 살폈다. 창밖의 정경을 보니 황제궁이긴 한 모양이었다. 페르디안이 자신을 첩자라고 고발했다면, 감옥에서 일어났을 것이다. 그러니 의심은 받지 않았다고 봐야겠지만…….
‘……기쁘지 않아.’
눈을 깜빡이는 것조차 힘겨워하는 미아를 보며 지로티 공작이 혀를 찼다.
“그나저나 정말 지독한 독이군. 내가 있어서 산 줄 알게. 아니었다면 꽤나 끔찍하고 고통스럽게 죽었을 게야.”
“감사, 해요, 공작 각하…….”
“그냥 할아버지나, 뭐 그런 걸로 부르게나.”
미아의 입가에 힘없는 미소가 떠올랐다. 그 모습을 본 지로티 공작이 다정하게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