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화
붉은 눈이 미아의 얼굴을 흘낏거렸다. 그러나 그뿐. 그는 황제이기 때문에 남의 감정을 맞춰 주는 행동은 해 본 적이 없었다.
자연히 음악 소리, 귀족들의 대화 소리를 제외하곤 정적이 찾아왔다.
“폐, 흐, 폐, 흐큽.”
지로티 그제야 상황을 중재하듯 나섰다.
“입 다물어, 노인네.”
“크흐흣. 폐하……. 그러지 말고 토끼 양이랑 춤이라도 한 곡 추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내가 왜.”
“그야, 크흡, 토끼 양과 춤을 추다 보면 반응이 남다른 영식을 찾아내실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
“그……, 반, 흐흣, 반역자를 찾아내셔야 하니까 말입니다.”
“…….”
“큼, 큼! 그게 아니더라도 무도회입니다. 요 아이는 무도회가 처음이라 하니, 좋은 추억을 만들어 주실 수도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의심 잔뜩 하면서 무슨 좋은 추억…….”
미아가 입을 삐죽였다. 아딜로트는 가만히 팔걸이를 손가락으로 두드렸다. 그러다 자리에서 일어났다.
“춤출 줄 아나?”
* * *
아딜로트가 손을 내밀었을 때, 미아는 여전히 서운하다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생기 오른 하얀 뺨 위로 긴 속눈썹이 그림자를 드리우자 그녀는 평소보다 더 처연해 보였다.
“…….”
미아는 아딜로트가 내민 손을 잡지 않고 노려보기만 했다.
평소 같았으면 억울하다는 듯이 울먹이거나 투정 부리듯이 입술을 삐죽 내밀었을 텐데.
그게 아니라 정말로 상처받은 것처럼 풀 죽은 모습이었다.
“못 추나?”
조급함이 느리게 아딜로트에게 찾아왔다.
“그건 아니지만…….”
“그럼.”
미아가 입술을 잠시 오물거렸다.
“동물이랑은 춤추는 거 아닌데…….”
“너 동물 아니잖아.”
“공식 신분은 동물이거든요…….”
아무래도 자신이 여전히 의심하고 있다는 말에 제법 상처받은 모양이었다.
사실 아딜로트가 정말로 미아를 의심하는 건 아니었다.
페르디안을 제외한다면 그 주변의 누구도 미아를 의심하지 않았으니까. 무엇보다 그녀가 정말로 첩자거나 반역자였다면 진작 요아힘이 눈치챘을 것이다.
게다가 아딜로트 자신도 사람 보는 눈은 좋았다. 후천적으로 길러진 능력이었다. 크리소르 황태후가 항상 주변에 첩자를 심어 놓았으니까.
그런 그의 눈에, 미아는 첩자 같지도 반역자 같지도 않았다.
‘……생각해 봐. 혹시라도 네가 반역자면, 그 약혼자도 반역에 가담했을 수도 있지 않나?’
그럼에도 그렇게 말해 버린 이유를 그는 아직 알지 못했다. 그는 그냥 예의 약혼자가 조금 궁금했을 뿐이다.
반역이 중죄긴 하지만, 그렇게 낼름 변심을 해?
분명 미로미스 상회의 돈을 보고 접근한 것이 분명했다. 그것도 모르고 빛나는 눈으로 사랑한다느니 말하던 미아가 떠올라, 얼굴도 모르는 그 남자가 조금 더 괘씸해졌다.
그래서 그냥 얼굴이나 알아둘까 했을 뿐이다. 그게 아주 우습고 이상하고 저답지 않은 일이라, 곧이곧대로 말할 수가 없었을 뿐이고.
“추기 싫다면…….”
“아니에요.”
생각 끝에 손을 거두려는 아딜로트의 손을 미아가 잡았다. 한숨과 함께였다.
“황제의 춤을 거절하면 체면이 뭐가 돼요…….”
그러니까, 그를 위해 마지못해 춘다는 뜻이었다. 그렇게나 춤이며 무도회란 단어에 눈을 빛내던 게 거짓말 같았다.
왜? 파트너가 그 약혼자가 아니라서?
거기까지 생각한 아딜로트가 미아의 손을 움켜쥐었다.
“폐하?”
“…….”
아딜로트는 미아의 물음을 무시하고 무도회장 중앙으로 나섰다. 때마침 곡 하나가 끝난 참이었다. 귀족들은 드물게 걸음한 황제에게 길을 비켰다.
곧 곡이 시작되었다. 어렵지 않은 왈츠였다. 처음엔 뻣뻣하던 미아도 어느새 쉽게 춤에 적응했다. 그래도 그녀는 내내 풀이 죽은 얼굴이었고,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아딜로트는 사람들 사이에 있던 지로티 공작이 입을 가리키며 뭔가를 말하는 시늉을 하는 것을 보고 겨우 한마디를 꺼냈다.
“……약혼자랑 다시 만날 생각이야?”
“폐하는 지금 그런 거밖에 할 말이 없으세요?”
드물게도 미아가 톡 쏘듯이 말했다. 그러나 금세 다시 시무룩해졌다.
“저 지금 엄청 서운하다고요…….”
너무나 솔직하게 들어오는 감정에 아딜로트는 잠시 숨을 멈췄다.
“의심해서?”
“네. 저 정말…… 신뢰 주려고 노력하는 중인데. 물론, 믿기 어려운 건 알지만…….”
“…….”
“하아. 아니에요. 배부른 투정이었어요. 죄송해요!”
자기 혼자 말하고 자기 혼자 납득한 미아가 다시 방긋 웃었다. 여전히 환하지만 전보다는 힘없는 웃음이었다.
“그보다 춤추니까 주변을 둘러보기 좋네요! 이참에 귀족들 좀 살펴봐야겠어요!”
그녀는 금세 화제를 바꾸고 눈을 빛냈다. 더는 아까의 화제에 대한 일말의 관심도 없어 보였다. 서운하니 어떻게 좀 해 보라고 말할 생각도 없는 듯했다.
미아는 항상 그랬다. 무방비하게 웃어도 무형의 선을 지키고 있는 게 느껴졌다. ‘애완동물’의 위치를 스스로 고집하고 있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아딜로트는 어쩐지 그게 내키지 않았다.
“차라리 그 남자를 죽여 달라고 하지그래.”
그가 심드렁히 내뱉은 말에 미아는 바로 얼굴을 구겼다.
“범죄자도 아닌데 죽이면 안 되죠!”
“죽이겠다는 게 아니라, 죽여 달라고 하지 않는 게 이상하단 뜻이었어.”
“그, 그야 마음은 좀 떠났다지만 그게 죽을 정도의 잘못은 아니잖아요…….”
미아가 까닭 모르게 딴청을 부리며 말했다.
춤을 추는 아딜로트의 마음이 갈수록 불편해졌다. 역시 아직 마음이 남아 있는 걸까?
“기껏 애완동물 신분을 고집할 거면 애완동물처럼 억지도 부려야지.”
“인권 챙기라던 사람 어디 가고…….”
미아가 꿍얼거렸다.
“게다가 그런 부탁을 한다고 해도 폐하가 들어줄 리 없잖아요? 전 가망성 없는 일에 안 매달려요.”
“……들어줄 수도 있잖아.”
“네?”
미아의 눈이 동그래졌다. 아딜로트는 시선을 피했다. 그녀가 뭐라고 대답할지 궁금해졌다.
“들어줄지도 모르잖아. 내가.”
“아―.”
미아가 감탄사를 내뱉었다.
그러고는.
“아하하! 말도 안 돼.”
까르르 웃었다.
“……말이 안 돼?”
아딜로트가 당혹을 숨기지 못한 채 되물었다.
“당연히 안 되죠! 아딜은 그럴 사람이 아닌걸! 아! 물론 특별한 사람에겐 다르겠지만…….”
미아는 그렇게 말하더니 뺨을 붉힌 채 ‘여주’나 ‘집착’ 같은 단어를 중얼거렸다.
“그런데 오늘 페, 키토 후작 각하는 안 오신 거예요?”
그러고는 너무나도 손쉽게 그 화제를 치워 버렸다.
가당치도 않다는 듯이. 절대 그가 그런 짓을 할 리 없다고 확신하는 사람처럼.
그러니까 그게 아딜로트에게는 이렇게 들렸다.
‘넌 절대 나랑 특별한 관계가 되진 않을 거야.’
아딜로트의 얼굴이 표정이 사라졌다.
“후작은 왜.”
“반란 진압을 축하하는 무도회인데 안 계시길래요! 키토 후작 각하도 많이 힘쓰셨을 텐데.”
“키토 후작은 무도회장 경비야.”
“오늘 같은 날에도요?”
“여자들이 귀찮다더군.”
“아……. 잘생겼으니까.”
미아가 그렇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러고는 배시시 웃는 게, 페르디안을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아딜로트는 조금 더 언짢아졌다. 그리고 자신이 언짢아하고 있다는 사실에 더더욱 언짢아졌다. 자연히 얼굴에는 심드렁함이 떠올랐다.
미아는 그제야 분위기가 달라진 것을 눈치챘는지, 슬쩍 자신의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폐하? 제가 발이라도 밟았나요?”
“아니.”
“그럼 제 발을 밟으실래요?”
“그러니까, 하…….”
“농담이에요! 폐하는 기사니까!”
그렇게 말한 미아가 애교 있게 눈웃음치며 아딜로트를 올려다보았다.
“그럼 우리 폐하가 왜 갑자기 우울해지셨을까?”
“…….”
우리 폐하라니.
어이없게도 아딜로트는 그 말에 조금 기분이 풀려 버렸다. 그가 신경 쓰지 말라고 입을 열려던 순간이었다.
“아, 혹시 춤추기 싫으셔서 그래요? 그치만 미래를 위해 대비해놓는다고 생각하면 좋잖아요!”
“미래?”
무시할 수 없는 단어가 스쳐 지나갔다. 미아는 보조개가 폭 패이는 함박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곧 황후 폐하가 생기실 테니까! 금발에, 사랑스럽고, 폐하를 보살펴 줄 수 있는 그런 분이요!”
그 순간 아딜로트는 춤추는 것을 멈췄다.
* * *
황제가 불시에 춤을 멈추자 귀족들도 덩달아 자리에 섰다. 음악 역시 한 박자 늦게 끊겼다. 그 사이에서 아딜로트는 춤추던 자세 그대로 미아를 응시했다.
“폐하?”
아딜로트의 표정은 몹시 싸늘했다. 평소와 같은 무심한 기색은 없고, 무서울 정도로 고요하고 예리했다.
“……깩.”
주눅 든 미아가 어깨를 움츠렸다. 무슨 이유에선지 난데없이 춤을 멈춘 아딜로트는 고개를 휙 돌리며 손을 놓았다.
“맘대로 돌아다녀.”
“네……? 하지만 춤이…….”
“계속 나랑 떨어지고 싶어 한 거, 모를 줄 알았어?”
“헙.”
미아가 입을 가렸다.
‘너무 티가 났나?’
정직한 반응에 아딜로트가 실소를 흘렸다.
“애완동물께서 놀고 싶으시다니 주인은 사라져 드려야지.”
그는 그렇게 말한 뒤 정말로 물러났다. 그리고 멀리서 안절부절못하고 있는 지로티 공작에게로 향했다.
‘잡아야 하나?’
미아가 잠시 고민했다. 하지만 이내 그럴 필요 없다는 결론이 났다.
‘황제가 그러겠다는데 내가 방해하면 안 되지. 게다가 어차피 내가 뭘 해도 의심할 테고…….’
그걸 생각하자 가슴이 따끔거렸다. 아닌 척 해도, 노력을 알아주지 않는 건 조금 서운한 일이었다.
하지만 미아는 빠르게 그 감정을 털어냈다.
‘난 살기만 하면 돼. 남주의 해피엔딩이 곧 내 해피엔딩이니까!’
미아는 모두의 시선이 아딜로트에게 향한 틈을 타, 군중 속으로 몸을 숨겼다. 이제 무도회의 목적인 세레니티를 찾아갈 시간이었다. 그녀가 재빨리 드레스를 모아 쥐었다.
‘원래대로라면 귀족들은 황제보다 일찍 도착해야 하지만, 세레니티는 삯마차를 잡아타느라 늦었다고 했어. 지금 가면 될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