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화
미아는 드레스를 자기 몸에 대고 빙글빙글 돌며 까르르 웃었다.
“설마 아니지? 너 너무 재밌다! 아니면 나 웃겨 주려고 폐하가 고용한 사람이야?”
미아의 말에도 양장사는 얼굴을 붉힌 채 한마디도 하지 못했다. 그 모습을 보며, 미아는 돌던 것을 그만두고 웃음을 뚝 멈췄다.
“저기, 남한테 뭐라고 하기 전에 네 수준부터 올려. 무식해서 같이 대화를 못 하겠어.”
하찮은 것을 보는 듯한 눈이었다. 미아는 화룡점정으로 한숨까지 쉬었다.
“폐하는 다 알아들으시던데……. 자기 백성이 이렇게 멍청한 걸 폐하가 알면 얼마나 가슴 아프실까?”
더는 참지 못했는지 주근깨가 비명을 꽥 질렀다.
“지금 똑똑하다고 자랑하는 거예요? 그래 봐야 반역자의 딸 주제에! 폐하도 당신에게 진심은 아닐……!”
그때였다.
“그런 건 아니고.”
특유의 나른하고도 심드렁한 목소리가 허공을 갈랐다. 모두의 고개가 소리가 난 곳으로 돌아갔다. 어느새 문지방 옆에 팔짱을 끼고 서 있는 아딜로트의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다들 아주 한가한가 보지.”
“허억……!”
양장사들이 자신의 입을 틀어막았다. 그 틈에서 오로지 미아만이 환하게 웃었다.
“아딜!”
아딜로트는 대답하지 않고 양장사들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의 시선이 바닥의 녹색 드레스와 넘어진 파티션에 닿았다.
“나가. 처분은 나중에 내리지. 봐줄 거라고는 생각하지 말고.”
아딜로트에게서 차가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양장사들은 고개를 푹 숙인 채, 벌벌 떨며 방을 나섰다. 순식간에 침실에는 미아와 아딜로트 단둘이 남게 되었다.
“아깝다! 다 이겼는데!”
미아가 만족스러운 얼굴로 드레스를 침대 위에 펼쳐놓은 뒤, 손가락을 튕겼다. 아딜로트가 피식 웃었다.
“너 그렇게 안 보이는데 엄청 기가 세네.”
“제 머리가 좀 꽃밭이라 그래요!”
“좋은 뜻 아니지 않나?”
“내가 좋게 쓴다는데 누가 뭐라고 하나~?”
그렇게 말한 미아는 어깨를 으쓱했다.
“어디서부터 들었어요?”
“수준 어쩌고 하는 데부터?”
“꽤 처음이네요! 어떻게 그렇게 가만히 엿듣지?”
“다 들리게 떠드는데 그럼 안 들어?”
“그건 그래요!”
미아가 까르르 웃었다. 그런 그녀를 아딜로트는 짐짓 부드러운 시선으로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이런 곳은 상관없지만, 다른 데선 좀 참아. 특히 무도회 같은 곳.”
“저도 눈이 있고 귀가 있지, 아무 데서나 이러진 않아요! 왜냐면 살아남는 게 제 최종 목표니까!”
미아가 척 하고 엄지로 자신을 가리켰다.
“그러니까 죽이지 말아 주세요!”
“……맨날 그 얘기네.”
“맨날 살고 싶으니까요!”
아딜로트가 물끄러미 미아를 응시했다. 미아는 침대에 앉아, 자신이 고른 흰 드레스의 소매를 팔락팔락 흔들며 고개를 갸웃했다.
아딜로트는 묘한 감정에 휩싸였다.
이렇게 보면 아주 순진한 토끼 같다.
하지만 사람들 앞에서 당당히 말하던 모습은 달랐다. 오만하고 도도했으며, 모든 걸 다 하찮게 보는 것 같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유독, 자신에게만은 물렀다.
중요한 정보를 턱턱 내어주지 않나, 가당치도 않은 애교를 부리지를 않나. 그때마다 어쩐지 속에 불타는 무언가가 콱 들어앉은 기분이었다.
몹시 불편했다.
“왜 네가 내 일에 그렇게 열을 내는지 모르겠네. 나랑 아무 사이도 아니면서.”
아딜로트가 눈을 내리깐 채 중얼거렸다. 그는 팔짱을 끼고 벽에 등을 기댄 채, 한동안 말이 없었다. 어쩐지 그의 분위기가 평소와는 달라, 미아는 그저 눈치만 보았다.
토끼는 아니라 하였으나 그의 눈치를 보는 작은 짐승 같은 모습에 아딜로트는 묘하게도 냉소를 지었다.
“넌 살고 싶은 거지?”
“……에. 일단은 그렇죠?”
“그럼 만약 내가 널 완전히 살려 주겠다고 하면?”
“네?”
“살아남는 것에 집착하지 않아도 되면…….”
아딜로트가 입술을 몇 번 달싹였다.
“……떠날 거야?”
아딜로트의 질문에 미아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만약 갑자기 마법 같은 힘으로 모든 게 행복하게 끝난다면.
크리소르 황태후가 수작을 부리지 않고, 세레니티와 아딜로트가 무사히 사랑에 빠진다면.
그럼 자신은 더는 아등바등 살아남으려 애쓰지 않아도 된다.
완벽한 해피엔딩이었다.
미아가 활짝 웃었다.
“당연하죠! 가뿐하게 떠나드릴게요!”
“…….”
아딜로트가 깊게 한숨을 쉬었다. 어쩐지 많은 생각이 느껴지는 그의 모습에 미아는 자리에서 일어나 쪼르르 그에게 다가갔다.
“폐하……. 어디 아프세요? 엠브라를 부를까요?”
“…….”
“아프면 안 되는데.”
아딜로트가 천천히 눈을 깜빡였다. 분홍색 큰 눈이 시야에 들어왔다. 그를 정말로 걱정하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그러니까 대체 왜.
그가 미간을 좁히며 몸을 돌렸다.
“잠깐 쓸데없는 생각을 했을 뿐이야.”
“쓸데없는 생각이요?”
아딜로트가 대답 없이 미아의 이마에 손가락을 가져다 댔다.
“토끼 같은 게.”
‘악! 안돼! 또 딱밤 때리려고!’
미아가 아픔을 예상하고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러나 고통은 없었다.
아딜로트는 한참을 움직이지 않고 멈춰 있었다. 마치 겁먹은 미아를 보고 망설이기라도 하는 것처럼.
“……?”
미아가 실눈을 떴을 때, 그는 몸을 휙 돌렸다.
“사람은 새로 불러 주지.”
그러고는 태연하게 방을 나갔다. 남겨진 미아가 눈을 깜빡였다.
‘영문을 모르겠네…….’
* * *
무도회 날이 되었다. 미아는 이전에 그녀가 골랐던 연한 금빛의 드레스를 입기로 했다.
나비 날개처럼 뒤로 길게 이어진 여러 겹의 천이 걸음을 옮길 때마다 팔랑거리는 것이 마음에 들었다. 단장은 황제의 최측근 시녀인 제인이 도와주었다.
“오랜만에 숙녀분의 단장을 도우니 좋네요. 오늘 정말 어여쁘세요.”
아직 어색한 사이인 제인이 드물게도 그런 말을 하여, 그땐 미아라도 뺨이 발갛게 물들었다.
그러다 문득 미아가 물었다.
“저기, 혹시 저번에 왔던 양장사들은 어떻게 되었는지 아세요?”
미아의 말에 제인은 난처한 미소를 지었다. 말하기를 망설이는 듯했으나, 미아가 간절한 눈빛을 보내자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녀들은 폐하의 공간에서 폐하를 헐뜯었습니다. 그게 얼마나 중대한 일인지 알고 계시지요?”
“네? 네…….”
“하여 자격을 잃고 국외로 추방당했답니다.”
“아.”
“……이해가 안 가실 수도 있겠지만, 폐하의 입장에선 나름 자비를…….”
“아딜 진짜 착하네!”
“…….”
일순 제인은 약간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가, 빠르게 표정을 수습했다. 그녀가 물었다.
“착하…… 시다고요.”
“착하죠! 저였으면 저 욕한 사람들 다 목 뎅겅이야!”
정말로 그럴 생각은 없지만, 어쨌든 본때를 보여 줄 생각이었다.
하지만 제인은 그게 미아 나름대로 아딜로트를 옹호하려고 허세 부리는 거라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그녀의 밤색 눈이 부드러워진 것을 보면 말이다.
“미아 님께선 폐하가 두렵지 않으세요?”
“제가 욕한 것도 아닌데요, 뭐.”
“…….”
“아딜은 나쁜 사람한테만 엄격하잖아요. 우리 아딜이 얼마나 착한데.”
미아가 배시시 웃었다.
거울 너머에서 그녀를 지켜보던 제인 역시 몇 초 뒤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그렇네요. 미아 님의 말씀이 맞아요.”
이후 제인의 손길은 좀 더 세심하고 부드러워졌다.
이전의 시중도 몹시 전문적이었지만, 이젠 거기에 인간적인 배려까지 깃든 느낌이었다.
“자, 끝났답니다.”
제인의 도움으로 모든 치장을 마치고 거울을 보자, 그곳에는 분홍 머리카락을 길게 늘어뜨린 여자 한 명이 자신을 보고 있었다.
진주 장식에 연한 금빛의 드레스가 제법 잘 어울렸다.
‘오! 예쁘잖아!’
하지만 외모에 대한 감상은 그게 끝이었다. 미아는 자신의 분홍색 눈을 마주한 채 생각에 잠겼다.
무도회.
가 본 적은 없지만, 단순히 춤만 추는 곳은 아닐 게 분명했다.
‘나한테도 꽤나 관심이 모이겠지.’
그럴 수밖에 없었다. 현재 미아의 입지는 현재 아주 아슬아슬했으니까.
죽지 않고 살아 있는 반역자의 딸.
역대 황제 중에서도 멸문한 가문의 여자를 데려온 사람은 있지만, 대부분은 그저 과시의 용도였다.
자신에게 반기를 든 사람을 노리개처럼 휘두르며, 황권이 건재함을 알리는 퍼포먼스인 것이다.
그래서 미아는 아딜로트의 제안이 더 당황스러웠다.
‘왜 나를 굳이 파트너로 삼는 거지? 이득이 전혀 없는데…….’
왠지 요아힘이 있었다면 절대 허락하지 않았으리란 생각이 들었다.
‘요아힘이 있었다면 차라리 나를 정말 구경거리로 만들었겠지.’
그거라면 이해할 수 있었다. 반역자의 딸을 거칠게 다루면서, 공포 정치를 강화할 수 있으니까.
‘그게 아니라면…….’
곰곰이 생각하며 방을 나온 미아는 제자리에서 우뚝 멈춰 설 수밖에 없었다. 복도 끝에서 광채가 걸어오고 있었다.
“헉…….”
심장이 멎을 뻔했다.
사유? 남주가 너무 잘생김.
아딜로트는 평소엔 약간 부스스하게 하고 다니던 은발을 반쯤 넘기고 있었다. 매끈한 이마가 드러나니 미모가 더 두드러지는 느낌이었다.
허리선이 날씬하게 들어간 군청색의 제복에는 금빛의 훈장이 열을 맞춰 달려 있었다. 어깨띠는 피처럼 붉은색. 황가 슈뢰더의 상징색이다.
원래부터 약간은 야한 얼굴이, 한껏 단장까지 하자 아찔할 정도로 치명적이었다.
‘낯설어서 그런가, 왜 좀 부끄럽지…….’
한편, 동작을 멈춘 건 미아뿐만이 아니었다. 아딜로트 역시 미아를 본 뒤, 놀란 눈으로 걸음을 멈춘 상태였다.
“…….”
그는 다른 곳을 보았다가, 미아를 보았다가, 다시 다른 곳을 보기를 반복했다.
‘이, 이상한가? 촌스러운가!?’
미아가 드레스 자락을 만지작거렸다. 잠시 어색한 기류가 흘렀다.
‘에이, 어차피 난 애완동물인데 좀 이상하면 어때!’
미아가 먼저 활짝 웃으며 아딜로트에게 다가갔다.
“폐하! 너무 잘생겨서 빛이 걸어오는 줄 알았어요!”
“…….”
“폐하?”
미아가 멈칫했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평소와 달리 반박이 바로 돌아오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