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화
페르디안은 잠자코 그 모습을 내려다보다가 한숨을 쉬었다.
“……알았다.”
“고마워요! 페르!”
미아가 활짝 웃었다.
“……페르?”
페르디안이 눈썹을 치켜 올렸다.
‘헉, 실수. 섭남이라 이름으로 부르던 게 그만.’
재빠르게 게걸음으로 빠져나온 미아는 부자연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손을 흔들었다.
“그, 저는 아딜로트가 기다리고 있어서 이만! 아하하하! 아하하!”
“너…….”
뒤에서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페르디안의 음성이 들렸지만, 모르는 척 잽싸게 도망쳤다.
‘다음에 만났을 때 죽이면 어떡하지? 아딜 옆에 꼭 붙어 있어야겠다!’
미아가 그런 생각을 하며 중앙궁 집무실의 문을 열었다. 그리고 숨을 들이켰다.
이유? 남주가 너무 잘생겨서.
아딜로트는 오늘도 여전히 수려한 미모를 뽐내며 책상 앞에서 서류를 보고 있었다. 은빛 머리카락 위에 얹힌 햇빛이 마치 왕관처럼 빛났다.
거기다 온갖 화려한 장식이 달린 남색의 정복까지 걸치니, 그야말로 화보에서 빠져나온 듯했다.
“아딜……, 뭘 먹고 그렇게 잘생겼어요?”
“내가 뭘 먹었으면 네가 어쩌게.”
아 입은 정말 꿰매 주고 싶네…….
그래도 보기에 흐뭇하니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미아가 얌전히 아딜로트 옆에 가서 앉았다.
“뭐, 나중에 제 아들한테도 먹여 볼까 했죠……. 아딜 얼굴 반만이라도 닮게.”
“하.”
서류를 덮은 아딜로트가 헛웃음 쳤다.
“이것도 애완동물의 역할인가?”
“그럼요! 열심히 재롱을 떨어야 살려 주실 테니까!”
“생각해 보고.”
“치.”
생각해 본다고는 말했지만 아딜로트에게서는 더는 그녀를 향한 경계가 느껴지지 않았다. 미아는 이제 아딜로트가 그녀를 어느 정도 봐주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내가 열심히 애완동물 흉내를 낸 보람이 있다니까.’
흐뭇한 얼굴로 미소 지은 그녀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래서 오늘은 무슨 일로 부르신 거예요?”
“해야 할 게 하나 있어서.”
“해야 할 거요?”
“응.”
대답과 동시에 아딜로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따라와.”
* * *
처음에는 놀러가는 느낌으로 주변을 둘러보며 걷던 미아는 점차 심각해졌다. 어쩐지 남이 보면 안 될 것 같은 비밀스러운 통로를 벌써 네 번은 더 지난 것이다.
감옥과는 달랐다. 그보다는 뭔가를 숨기기 위한 절차에 가까웠다.
어떤 문 앞에서 태엽을 감는다든가.
마법구에 손을 올린다든가.
아딜로트는 그 모든 과정에서 미아를 전혀 의식하지 않았다. 보다 못한 미아가 되레 외칠 정도였다.
“지금 저한테 그런 중요한 거 보여 주고 나중에 죽일 생각이시죠! 다 알아요!”
눈을 꼭 감고 고개를 돌리는 미아를 보며 아딜로트는 콧방귀도 뀌지 않았다.
마침내, 지금까지와는 다른 거대한 문이 나타났다. 아딜로트가 허리춤에 항상 차고 다니는 단검을 꺼내, 가볍게 문틈에 박아넣었다.
스으으.
거대한 문이 소리도 없이 열리기 시작했다. 이윽고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미아의 입이 떡 벌어졌다.
“폐하……. 설마 여기…….”
아딜로트가 가볍게 대답했다.
“국보 같은 거 모아놓은 곳이야.”
‘거기에 왜 나를 데려와!?’
미아가 시야를 채우는 금빛 광채에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 쳤다. 금고는 어마어마하게 넓었다. 궁 하나를 통째로 집어넣을 수도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크기는 중요한 게 아니었다. 그 안을 산더미 같은 금은보화가 꽉꽉 채우고 있었으니까. 심지어 자리가 모자라 보였다.
‘이거 다 합하면 얼마? 어? 나라 살 수 있나? 왠지 가능할 것 같은데……?’
미아가 손가락을 접으며 셈하는 동안 아딜로트가 앞서 걸음을 옮겼다.
“가, 같이 가요!”
미아가 울상을 지으며 아딜로트의 옷자락을 잡았다.
‘여기 미로 있잖아! 길 잃으면 끝이잖아!’
뒤늦게 생각난 건데, 소설 속에서 아딜로트는 세레니티를 데리고 이곳에 들른 적이 있었다.
‘이거 다 줄 테니까 자기를 떠나지 말라고…….’
독자로서 읽을 때야 남주는 이런 맛이 있어야지 하며 신났지만.
문제는 자신이 세레니티가 아니라는 점이다.
“서, 설마 저를 여기에 묻으시게요? 장식용 해골!?”
“상상력이 참…….”
아딜로트는 어이없다는 듯 대답하곤 이어서 걸음을 옮겼다. 무작위로 쌓인 금화의 산을 지나치자, 좀 더 정돈된 공간이 나왔다.
투명한 상자 안에 온갖 화려한 장신구가 하나씩 전시되어 있었다. 척 봐도 입구 쪽의 금화보다 값지고 비싸 보였다.
일단 컸다.
‘보석은 첫째도 크기, 둘째도 크기, 셋째도 크기지.’
더해서 커팅과 투명도도 예술에 가까웠다. 혼절할 것 같은 미아와 달리, 아딜로트는 익숙하다는 듯이 문간에 삐딱하게 기대어 섰다.
“골라 봐.”
“네? 네!? 이, 이거를요?”
미아의 눈이 팽팽 돌았다. 왜 이런 걸 골라 보라는 건지 이유를 알 수 없었다.
같이 무덤에 묻으려고?
그러기엔 너무 아까운데.
당황한 미아가 바락 외쳤다.
“저, 저희 반지는 너무 이른 것 같은데!”
“헛소리 그만하고.”
아딜로트가 단칼에 미아의 말을 잘랐다.
“빨리 골라. 곧 가 봐야 하니까.”
“그, 그렇죠. 바쁘니까…….”
미아가 아연하여 주변을 둘러보았다. 하나같이 예쁘고, 하나같이 화려했다. 미아는 그것들을 몸에 걸친 자신을 상상했다.
‘미아 셀레스티얼이 예쁜 편이긴 한데…… 걸치면 보석밖에 안 보일 것 같은데?’
미아의 질린 얼굴을 보며 보다 못한 아딜로트가 나섰다.
“역시 반지가 낫나?”
“그보다 저기, 후회 안 하시겠어요? 이거 비싸지 않아요……? 모르긴 몰라도 이거 하나로 성 하나쯤은 뚝딱 살 거 같은데……?”
“다 내 거니까 상관없어. 돈 있어 봤자 쓸 데도 없고.”
나왔다, 남주 전용 대사…….
미아가 진심에서 우러나온 경외심을 담아 아딜로트를 우러러보았다.
“폐하, 진짜 돈 많다……. 이 시대 최고의 남편감…….”
“넌 대체 칭찬을 왜 그렇게 이상하게 해?”
“아무튼 무르기 없기예요!”
미아가 경쾌하게 말하며 주변을 살폈다. 아딜로트 성격에 다시 내놓으라고 하거나, 부서지면 고쳐 놓으라고 할 리도 없었다.
‘그래도 너무 화려한 건 피해야지. 무슨 칼침을 맞고 죽으려고.’
화려한 걸 전부 제하니 의외로 남은 건 몇 개 없었다.
“폐하, 이거 예쁘지 않나요?”
미아는 그중 하나 앞에서 눈을 빛내자, 아딜로트가 슬렁슬렁 다가왔다.
미아가 고른 것은 백금으로 된 반지였다. 가운데에는 정사각형의 루비가 박혀 있고, 그 양옆으로는 작은 다이아몬드가 앙증맞게 장식되어 있었다.
아딜로트가 심드렁히 팔짱을 꼈다.
“의외네.”
“뭐가요?”
“다이아몬드를 고를 줄 알았는데.”
“다이아몬드 반지는 너무 의미심장하지 않아요?”
“흔하고 만만하잖아. 단단하고.”
“…….”
신나서 말하던 미아가 눈을 흘겼다.
그래 너 황제다. 너 잘났다.
아딜로트는 어깨를 으쓱하더니, 유리로 된 뚜껑을 열었다.
국보쯤은 될 것 같은 반지를 너무나도 대충, 막 꺼낸 아딜로트가 자연스럽게 손을 내밀었다.
“손을…….”
미아 역시도 너무나 자연스레 손등을 내밀었다.
그리고 두 사람은 동시에 멈칫했다.
“…….”
“…….”
반지를 끼워 주기 위해 손을 요청하는 남자.
거기에 응하는 여자.
‘아무리 그래도 구도가 좀……?’
미아의 뺨이 살짝 홧홧해졌다. 아딜로트도 같은 생각을 했는지 다소의 당황이 느껴지는 헛기침을 내뱉었다.
“네가 끼워.”
“넵.”
미아가 잽싸게 반지를 받아 손가락에 끼웠다.
반지는 검지에는 맞지 않았다. 중지에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약지에 끼우자, 마치 사이즈를 맞추기라도 한 것처럼 꼭 맞았다.
그 광경을 보고 아딜로트와 미아가 또다시 침묵했다.
“…….”
“……그, 예쁘네요?”
미아가 어색한 분위기를 타파하기 위해 애써 웃었다. 아딜로트는 고개를 돌리고 괜히 헛기침했다.
“다시 줘 봐. 보강해야 하니까.”
“보강이요? 지금도 충분히 예쁜 것 같은데?”
그리 말하면서도 미아는 순순히 반지를 빼내 아딜로트에게 건네주었다. 아딜로트는 그제야 평소 같은 나른하고 시큰둥한 낯으로 돌아왔다.
“마법도 걸어야 하고, 기술자를 불러야지.”
“와! 보호 마법이요?”
“추적 마법.”
“……추적이요?”
미아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무도회를 틈타서 도망칠 수도 있으니까.”
아딜로트가 간단하게 답했다. 머릿속에는 바람이 났다던 약혼자와 미아가 운명처럼 다시 마주치는 장면이 떠올랐다.
……굉장히 기분이 별로였다.
아무래도 누군가 황제의 소유물을 건드린다는 게 건방지게 느껴지는 모양이었다.
“그렇게 둘 순 없지.”
아딜로트가 중얼거렸다.
한편, 미아는 그의 말을 듣고 충격에 몸을 떨었다.
‘아직도 나를 의심하다니! 대체 언제 믿어 줄 건데!?’
그야말로 동상이몽의 현장이었다.
* * *
그날부터 미아에게도 할 일이 생겼다. 아딜로트가 계속 시중들 사람을 보내왔기 때문이다.
하루는 에스테틱,
하루는 머리카락 관리,
하루는 전신 마사지.
다행히 낯설지는 않았다. 백작가에서도 받던 것들이었다.
그날도 누군가 침실 문을 두드렸다.
똑똑.
“아! 들어와!”
미아가 대답한 뒤 혼자 머쓱해했다. 애완동물이라는 이유로 아딜로트의 침실을 같이 쓰고는 있지만, 이래선 마치 자기 방 같지 않은가.
문이 열리고 곧 여러 명의 여자가 방으로 들어왔다.
“미아 님. 미아 님의 무도회 드레스를 맞춰드릴 양장사입니다. 잘 부탁드려요.”
“시일이 촉박해 맞춤으로 짓지는 못하지만, 최대한 잘 어울리는 드레스를 맞춰드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