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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군의 애완동물이 되었다-17화 (17/193)

17화

미아가 찔끔하고 아딜로트의 뒤로 숨었다. 그녀가 슬쩍 아딜로트의 옷자락을 잡자, 아딜로트가 움찔했다.

“폐하……. 드, 들어가서 얘기하면 안 돼요?”

“……오래도 안 오더니.”

“네……?”

미아는 듣고서도 일부러 모른 척 했다.

‘너 같으면 너 가둔 사람을 보러 가고 싶겠니.’

그녀가 속을 숨기고 아무것도 모르는 척 고개를 갸웃했다. 아딜로트는 입술을 달싹거리다가 몸을 돌렸다.

“들어와. 시끄러우니까 울지 말고.”

미아는 페르디안의 노골적인 경멸의 시선을 뒤로하고 집무실 안으로 들어갔다.

문이 닫히기 전, 페르디안에게 방긋 웃어 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페르디안의 잘생긴 얼굴은 딱딱하게 굳은 채 문 너머로 사라졌다.

집무실에는 저녁이라 그런지 슐츠 공작은 보이지 않았다.

“앉아.”

방에 들어선 아딜로트가 소파를 턱짓했다. 그가 늘 앉는 자리의 옆자리였다.

건너편도 아니고, 바로 옆자리.

괜히 묘한 기분이 들었다.

‘원래 자기 옆자리 잘 안 주는데.’

게다가 묘하게 탁자 위가 어수선했다. 펜이 급하게 내려놓은 것처럼 굴러다니고 있었다. 미아가 그것을 바라보자, 아딜로트는 살짝 헛기침하더니 펜을 들어 거치대에 올렸다.

“무슨 일인데?”

그는 어디선가 꺼낸 손수건을 미아에게 대충 건네주곤 자리에 앉아 팔짱을 끼었다. 관심 없다는 듯 가볍게 던진 물음이었지만 눈빛은 예리했다.

“폐하……, 들으셨어요?”

“뭘.”

연기의 시간이다. 미아는 손수건으로 눈물과 물을 콕콕 찍어 닦고서, 코맹맹이 소리를 내며 훌쩍였다.

“제 약혼자가…… 바람이 났대요! 폐하 말이 맞았어요!”

아딜로트가 멈칫했다. 그는 약간 놀란 얼굴을 했다가, 매우 부자연스러운 동작으로 입을 가렸다.

“……폐하, 입은 왜 가리세요? 혹시 제가 차인 게 웃기세요? 재밌으세요?”

“무슨 소리야?”

“아무리 봐도 입꼬리 올라간 것 같았는데? 잠깐 손 좀 치워 보실래요?”

“무엄하게.”

“사람이 차였다는데!”

아무리 채근해도 아딜로트는 손을 떼지 않았다.

‘역시 웃었잖아!’

원망의 눈을 보내는 미아를 두고, 그는 한참 뒤에야 물었다.

“그걸 어떻게 알았는데?”

“소문을 들었어요!”

“궁인들이 너에게 바깥소문을 함부로 전달했다고?”

“아뇨! 제가 폐하의 집무실 근처에서 밖으로 나갈 구실을 찾으며 배회하다가 남의 말을 엿들었어요!”

자랑이다…….

그런 시선에 미아가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이게 다 이유가 있어서인데!’

아딜로트는 다시 서류 한 장과 펜을 들어 올렸다. 재밌었으니 됐다 이거지. 미아가 가자미눈을 했다.

“그래서?”

“……그냥 그렇다고요.”

“말 제대로 해. 지금 누구 죽여 달라고 송사 넣는 거야?”

“흐억. 절대 아뇨!?”

“황궁에서 이야기가 나올 정도면 좀 있는 집 아들인 것 같은데……. 누구지?”

아딜로트의 머리가 돌아가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당연하지만 그런 사람 없다. 미아가 아딜로트의 생각을 막기 위해 재빨리 다시 울기 시작했다.

“으, 으앙! 그보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을까요? 저는 진심이었는데!”

아딜로트는 멈칫하더니, 작게 한숨을 쉬며 펜을 들었다.

“반역이 그럼 쉽나. 백작가의 재력을 보고 약혼한 게 뻔하지.”

“그건 그렇죠…….”

“참 눈이 낮네.”

“그치만 제 눈에 제일 이상적인 신랑감은 폐하인데……. 그래도 눈 낮은 거예요?”

지이이이익.

서류 위에서 아딜로트의 펜이 크게 엇나갔다.

“…….”

“폐하? 기분 나쁘셨어요?”

“……실수야.”

그는 잉크가 번진 서류를 애매한 얼굴로 내려다보았다. 속이 몹시 복잡해 보였다. 이윽고 그가 긴 숨을 내뱉었다.

그러고는 천천히 미아에게 손을 뻗었다.

“……이런 일도 저런 일도 있는 거지.”

단단한 손이 서투르게 미아의 머리를 토닥였다. 어색한 동작이지만, 확실한 위로였다.

‘이건 진짜 쬐끔 감동할 것 같은데!’

나름 유대감을 쌓으려고 노력한 보답이 있었다.

“헤헤.”

미아가 웃자 아딜로트는 곁눈질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폐하?”

미아는 고개를 갸웃하면서도 계속 웃었고, 아딜로트는 턱을 괸 채 그 모습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그러면서도 손은 복슬복슬한 작은 동물을 쓰다듬듯이 계속 미아의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렸다.

미아는 그것을 가만 내버려 두었다.

‘나 이거 알아. 애니멀 테라피야.’

결과적으로 아딜로트의 표정이 점점 느슨해졌다. 손에 가려 잘 보이진 않았지만, 얼핏 미소가 보인 것 같기도 했다.

“……강아지보단 토끼 닮은 거 같아.”

“토끼요?”

“응. 분홍색이고…….”

“토끼는 분홍색이 아니에요, 폐하…….”

“…….”

“우리 폐하 색맹?”

“됐다. 말을 말아야지.”

아딜로트가 짜증스럽게 손을 내리곤 다시 서류를 집어 들었다.

“그래서 뭐 해 달라고?”

“앗! 들어주시나요?”

“들어줄 수 있는 거면. 나간다는 거 빼고.”

미아의 눈이 반짝였다. 아딜로트의 기분이 좋아 보이니, 이 기회를 놓칠 수는 없었다.

“그럼 폐하, 저…… 무도회에 가고 싶어요!”

“무도회?”

“네!”

미아가 함박웃음을 지었다.

“옛말에 사랑은 사랑으로 잊는 거랬어요!”

그 순간 와장창 소리가 난 듯한 착각이 들었다. 아딜로트의 얼굴은 무표정이 되었다. 기껏 훈훈하게 달궈 놨던 분위기가 순식간에 차가워졌다.

‘또, 또야? 대체 내가 무슨 말을 잘못한 건데!?’

미아가 몸을 떨면서도 어떻게든 말을 이었다.

“그, 저기, 별다른 나쁜 의도 이런 건 없고요! 그냥 실연의 상처를 회복하기 위해 무도회 가고 싶다……?”

“…….”

“반짝반짝, 너무 이쁘겠지……? 미, 미아는 한 번도 무도회 가 본 적이 없는데…….”

“너 왜 갑자기 왜 자기를 3인칭으로 지칭해?”

“……폐하, 그런 건 지적하면 안 되는 부분이에요…….”

애써 마음을 가다듬은 미아는 다시 두 손을 맞잡고 간절한 눈빛으로 아딜을 바라보았다.

“아딜……, 안 돼요? 무도회?”

“…….”

“진짜진짜?”

아딜로트의 얼굴이 굳었다.

“너 다른 데서도 이래?”

“아뇨? 당연히 아딜한테만 이러죠.”

“…….”

너무 빠른 대답에 아딜로트가 침묵했다.

‘거절인가?’

미아는 입술을 삐죽 내밀고 툴툴거렸다.

“……저의 애교가 통하지 않다니, 폐하는 혈관에 수은이 흐르고 심장이 강철로 된 게 틀림없어요.”

아무래도 비밀 통로를 써야겠다는 생각을 하던 중이었다. 곰곰이 뭔가를 생각하던 아딜로트가 입을 열었다.

“아니다. 사람 하나 정도는 무도회에…… 데려갈 수도 있겠지.”

“정말요!?”

미아가 저도 모르게 아딜로트의 목을 끌어안았다.

“와! 아딜 너무 좋아! 아딜 최고! 아딜 세상에서 제일 잘생겼다! 물구나무서서 봐도 내 이상형이다! 지상에 강림한 천사다! 인류의 보배다!”

“떨어져…….”

“안 떨어질 건데요! 너무 예쁘고 고마워서 착 붙어 있을 건데요! 어쩜 아딜은 이렇게 성격도 얼굴도 몸매도 다 예쁠까!?”

“니가 내 몸매를…….”

아딜로트가 말하다 말하다 말고 멈칫했다.

“그러고 보니 너 저번에 내 허리둘레…….”

“사소한 건 넘어가야 스트레스 안 받고 오래오래 산답니당!”

미아가 잽싸게 말을 자르고서 아딜로트를 얼싸안았다. 다행히 아딜로트는 미아를 밀어내지 않았다. 빛나는 은발 사이의 귀가 약간 붉은 듯도 했다.

미아는 헤헤 웃으며 마지막으로 아딜을 꼭 껴안았다가 떨어졌다.

“저 정말 얌전히 무도회 구경만 할게요! 사실 바깥에서 보기만 해도 돼요!”

그러자 아딜로트가 시큰둥하게 청천벽력 같은 소리를 내뱉었다.

“무슨 소리야? 넌 나랑 갈 거야.”

* * *

그날 밤, 황제의 집무실에는 묘한 손님이 찾아왔다. 키가 작고 손에는 술병을 든 데다가, 온몸에서 술 냄새와 약초 냄새가 나는 노인이었다. 페르디안 키토 후작이 그에게 깍듯이 인사하며 문을 열어 주었다.

“지로티 공. 오셨습니까.”

루치아노 지로티 공작.

제국의 북부를 다스리는 대영주이자, 황제의 주치의.

명문 지로티 공작가의 가주답게 정계에서 어마어마한 입지를 지닌 인물이기도 했다.

“노인네 왔어?”

그런 지로티 공작을 노인네라 칭하면서도 아딜로트는 무덤덤한 얼굴이었다. 지로티 공작이 낄낄 웃으며 허리를 굽혔다.

“폐하, 이제 완전히 어른이 되셨습니다?”

“마음에도 없는 소리는 하지 말고.”

“마음에도 없긴요. 품에 매달려서 밤이 무섭다고 엉엉 울던 모습이 엊그제 같은데.”

“재미없어, 노인네.”

아딜로트의 서늘한 시선이 지로티 공작을 향하자, 그가 턱을 매만지며 헛기침했다.

“흠, 흠! 여전히 유머를 모르십니다.”

그렇게 말하면서도 그는 킬킬 웃어 대는 걸 멈추지 않았다.

“재상은 자리를 비운 모양입니다?”

“생 드나르가 심상치 않아서 해결하러 갔지.”

“흐음……. 황태후의 낌새는 어떻습니까?”

“뭔가 준비하고 있는 것 같기는 한데 정확하게는 알 수가 없네.”

“그렇습니까……. 아무래도 긴 이야기가 필요할 것 같습니다그려.”

동의한다는 듯 아딜로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겠지. 하지만 셀레스티얼 백작의 반역이 수포가 되었으니 당분간은 움직이지 않을 듯하군.”

“참. 그러고 보니…….”

지로티 공작이 문득 생각났다는 듯이 턱수염을 쓸던 것을 멈췄다.

“그 아이는 뭡니까?”

아딜로트가 멈칫했다.

“그 아이?”

“황제궁에 숨어 사는 분홍색 토끼 말입니다.”

“아.”

남의 눈에도 토끼로 보이는구나.

아딜로트가 묘하게 안심했다.

그사이 지로티 공작이 자신을 물끄러미 보고 있다는 걸 깨달은 아딜로트가 뒤늦게 답했다.

“셀레스티얼의 딸이지. 황태후의 첩자일지도 모르니 두고 보는 중이야.”

“흠, 흠! 그 아이가요?“

지로티 공작이 고개를 갸웃하곤 미아를 떠올렸다. 맹랑하고 발칙한 아가씨였다. 눈치도 빨랐으며, 습득한 정보를 처리하는 능력도 뛰어났다. 미로미스 상회를 만들었다고 했으니 당연히 머리도 좋으리라.

‘그런 자가 정말 반역을 저질러 놓고 그렇게 허술하게 잡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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