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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군의 애완동물이 되었다-16화 (16/193)

16화

“에잉. 아가씨 보기보다 깐깐하구만?”

노인이 혀를 쯧쯧 차며 벽 아래를 슬쩍 발로 찼다. 그러자 벽이 알아서 닫혀 원래의 모습으로 되돌아갔다. 감쪽같았다.

“신경 쓰지 말게나. 통로의 주인에게 자유로운 이용을 허락받았으니까, 어떻게 쓰든 신경 쓰지 않을 거라네.”

“하지만…….”

“어쨌건 난 보답을 했으니 이걸 쓰든 말든 그건 아가씨 자유일세!”

말이 끝나기 무섭게 노인이 창문을 열었다. 바람이 살랑 불어와 미아의 머리카락을 흐트러뜨렸다.

“공, 여긴 2층인데…….”

“그래도 걱정은 해 주는구만?”

“아뇨, 혹시라도 시체를 치우게 되면 하인들이 불쌍하니까…….”

“뭐? 크하하하하!”

노인이 창문틀에 걸터앉은 채로 온 궁이 떠나가라 웃었다.

요란한 폭소. 덥수룩한 수염에 머리카락. 껄렁껄렁한 태도에 코를 찌르는 술 냄새.

누구라도 당장 내쫓을 만한 모습이었지만, 미아는 가만히 노인이 웃음을 그치길 기다렸다. 노인의 웃음은 서서히 잦아들었다.

“그나저나 아가씨, 아니, 자네 정말 잔망스럽군.”

마침내 그가 수염을 만지작거리며 씩 웃었다.

“잔망이요? 제가요?”

“그래.”

노인이 기분 좋은 듯이 껄껄 웃었다.

“내가 자네를 시험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으면서, 티를 하나도 안 내지 않았나?”

미아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녀는 잠시 그대로 있다가, 볼에 공기를 채우며 눈을 굴렸다.

“으응? 무슨 말씀이신지…….”

“내가 나이가 있지, 그런 건 안 통하네. 아직 젊은 우리 폐하께나 먹히면 모를까.”

“으으음~?”

미아가 잘 모르겠다는 듯이 딴청을 부렸지만, 노인은 여전히 미아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에이, 안 통하네.’

미아가 어깨를 으쓱하며 샐쭉 웃었다.

“그래도 재밌으셨죠?”

미아는 사실 노인이 범상치 않은 인물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더럽고 간소하긴 해도 노인이 입고 있는 옷은 고급품이었다.

마시던 술도 그랬다. 병은 그저 그런 유리병이었지만, 술 냄새는 향기롭고 그윽했다. 절대 평민들이 마시는 싸구려 술이 아니었다.

‘셀레스티얼 백작가의 가업이 주류 사업인데, 그걸 모르면 안 되지.’

암살자는 아닌 게 확실하니 못 해도 귀족.

황제궁에 출입이 가능할 정도이니, 뭐가 됐든 황제의 최측근이다.

미아는 그를 만나자마자 그걸 간파했다. 기실 양쪽 모두가 서로를 재고 있던 셈이다.

“덕분에 아주 재밌긴 했네! 아주 맹랑해. 페르디안 그 깍쟁이 같은 꼬마는, 눈치채자마자 정체부터 물었는데 말일세.”

더는 숨길 필요가 없어진 미아가 방긋 웃었다.

“그치만 남이 저를 백치나 바보, 멍청이, 강아지, 토끼로 본다면 굳이 그 평가를 수정할 필요가 있을까요? 그걸 이용해 허를 찌르는 게 더 나을 텐데요.”

“뭐? 허…….”

노인이 감탄인지 뭔지 모를 웃음소리를 흘리며 턱수염을 쓸어내렸다. 그때마다 손바닥에 떡진 술이 묻어 나왔기에, 미아는 웃는 얼굴로 한 걸음 더 물러났다.

“공, 귀하신 분인 건 알겠는데…… 다음엔 좀 씻고 와 주세요……. 솔직히 좀 냄새나요…….”

“예끼! 어른을 상대로!”

미아가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하지만 제 감이 공은 이런 걸 더 좋아하신다고 말하고 있는걸요!”

그 말에 노인은 멍한 얼굴을 했다가, 무릎을 치며 웃었다.

“크하하! 좋구만! 그래! 이 정도 발칙함은 있어야 이 험난한 세상을 살아가지!”

한참을 껄껄 웃던 노인은 흐뭇한 표정으로 미아를 바라보았다.

“흠, 흠! 그 녀석이 의외로 인복은 있는 모양이야…….”

“그거 나중에 아딜한테 말해 주시기!”

“흐하하! 생각해 보겠네. 아무튼 잘 사용하게! 그리고 다음엔 좀 더 화려한 무대에서 만나세.”

“화려한 무대요?”

“조만간 크게 한바탕한다고 들었는데 아니었나? 뭐, 꼬마에게 생각이 있겠지! 그럼 난 이만 가 보겠네.”

노인은 설렁설렁 손을 흔들고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창문 밖으로 휙 뛰어내렸다. 바람에 실렸던 술 냄새도 그제야 사라졌다.

“가 버렸네…….”

미아는 굳이 창밖을 내다보지 않았다.

‘관심 없어. 알아서 잘 갔겠지. 엄마가 괴짜들이 하는 일에는 일일이 반응하는 거 아니랬어. 그보다…….’

화려한 무대.

노인이 던져 준 단어를 떠올린 미아의 눈이 반짝였다.

‘어떻게 잊고 있었지? 생각해 보니 원작 소설에서 세레니티가 무도회에 참석했었잖아!’

정확히는 무도회에 참석하려고 했다. 그러나 악역들의 농간으로 문 앞에서 돌아와야 했다. 그 악역이란 게 세레니티의 가족이었다. 정확히는 배다른 가족.

세레니티의 어머니가 죽고, 세레니티의 아버지와 재혼한 계모와 새언니들이 세레니티를 못살게 굴었던 것이다.

‘전형적인 신데렐라 스토리지.’

그들은 기껏 열린 무도회에 세레니티를 가지 못하게 하려고, 세레니티에게 가짜 무도회 초대장을 건네준다. 세레니티는 그것도 모르고 무도회장 코앞까지 다다른다.

그리고, 들어가지도 못하고 쫓겨난다.

‘시기상 그 무도회가 지금 아딜로트가 열려고 하는 무도회인 게 확실해.’

그렇다면 이번 무도회야말로 세레니티를 만나기에 딱 좋은 적기였다.

‘나는 황궁 밖을 나갈 수 없으니까, 일단 세레니티랑 만나서…… 어떻게든 황궁에서 다시 만나는 걸 유도하면 돼.’

그리고 그녀의 신뢰를 얻고, 정보를 얻어내는 것.

그게 미아가 취할 행동이었다.

‘일단 이 통로는 사용하지 말자.’

미아가 고개를 들어 눈앞의 일곱 명의 아기 천사 그림을 바라보았다. 유용하기야 하겠지만, 이런 걸 사용하면 필연적으로 알리바이에 공백이 생긴다.

‘페르디안은 아직도 날 안 믿는 눈치니까 조심해야 해.’

그때, 뒤늦게 방문이 열렸다.

“미아 님! 여기 계셨습니까?”

하인이 기사들과 함께 놀란 표정을 지으며 방으로 들어왔다.

“응? 무슨 일이야?”

“아! 혹시 수상한 자를 보지 못하셨습니까? 2층에서 수상한 그림자를 본 것 같은데…….”

“아니? 아무 일도 없었어! 여긴 계속 나만 있었는데?”

“그렇습니까……?”

“응!”

미아가 헤실헤실 웃자 하인은 이내 그러려니 하고 넘어갔다. 초상화 방을 나오며, 미아는 뒷짐을 진 채 총총 뛰듯이 걸었다.

‘수상한 자라. 수상하기야 엄청 수상했지만, 정체야 뻔하지 뭐.’

미아는 눈치챘다.

독한 술 냄새에 가려진 희미한 쓴 냄새.

미아는 최근 그 냄새를 맡아 본 적이 있었다.

황립 의료원에서.

그리고 엠브라에게서.

‘그 노인이 아딜을 진료해 주는 의원이겠지.’

아무래도 술 냄새로 약초 냄새를 숨기는 모양이었다. 이 역시 진작 눈치채고 있었다. 뭔가를 얻어낼 수 있을까 해서 모르는 척했을 뿐.

그 덕에 비밀 통로를 알게 되었으니, 꽤 괜찮은 소득이었다.

“그럼 무도회에 참석할 방법이나 고민해 볼까나!”

미아가 흥얼거리며 복도를 가로질렀다.

* * *

미아는 며칠 시간을 두고 다시 아딜로트의 집무실을 찾아갔다.

‘윽.’

이번에도 페르디안이 문 앞에 서 있었다. 호위 중인지 자세에 각이 제대로 잡혀 있었다.

“후작 각하께선 또…… 여기 계시네요……?”

미아는 애써 웃으며 그에게 다가갔다. 당연하지만 페르디안은 웃으려는 일말의 노력도 없이, 바로 눈살을 찌푸렸다.

“폐하의 호위이니 당연하다.”

“폐하도 충분히 강할 텐데…….”

“만에 하나란 게 있다.”

“그건 그렇지만요…….”

네가 있으면 불편하니까 그러지…….

미아가 한숨을 내쉬었다.

‘뭐, 중요한 건 아딜로트지 페르디안이 아니니까.’

미아가 숨을 크게 들이마신 뒤, 미리 챙겨 온 젖은 손수건을 꺼냈다. 그리고 미친 듯이 눈가를 문지르기 시작했다.

“무슨……?”

페르디안이 말릴 새도 없었다. 여린 눈가가 순식간에 발갛게 달아올랐다.

“무슨 짓인가, 미아 셀레스티얼!”

당황한 페르디안이 외쳤다. 미아는 페르디안을 무시하고 손수건을 쭉 짜냈다. 눈이 젖어 들었다.

페르디안은 그제야 미아가 하려는 짓을 눈치챘다. 잿빛 눈에 경멸이 스쳤다.

‘알 바 아니지만!’

미아는 그를 무시하고, 큰 소리로 울기 시작했다.

“으앙앙앙앙! 흐윽, 흐아앙……!”

‘미아 셀레스티얼’의 몸은 목청이 좋았다. 아니, 몸으로 하는 건 대부분 잘했다. 덕분에 엄청난 크기의 울음소리가 나왔다.

집무실 안에 있는 아딜로트에게 들릴 정도로.

잽싸게 손수건을 집어넣기까지 한 미아를 보며 페르디안은 어이가 없었다. 세상에 어떻게 이렇게 뻔뻔한 여자가 있을 수 있나?

“흑, 흐윽……! 폐하! 폐하아아! 제 말 좀 들어 보세요! 으아앙!”

가증스럽게도 미아는 어깨까지 떨어 가며 구슬피 울었다. 안 그래도 작고 여린 체구에 순진한 인상이다.

누군가 귀여운 걸 좋아하는 사람이 본다면 앞뒤 분간 안 하고 달려들 만큼 예쁘장하게 생기기도 했다.

그러니만큼 그녀가 우는 모습은 상상 이상으로 애처로웠다. 과정을 보지 못했다면, 페르디안마저 허튼짓이라도 당했나 싶었을 것이다.

‘그 외모를 저렇게 사악한 방식으로 쓰다니.’

치가 떨렸다. 역시 첩자가 아닐까?

페르디안이 입을 열기도 전에 집무실 문이 열렸다.

“무슨 일이야?”

아딜로트가 굳은 표정으로 나왔다. 품이 넓은 편한 옷차림이었다. 저녁 어스름답게 남은 정무를 보고 있었는지, 손가락에는 잉크가 조금 묻어 있었다.

표정은 묘하게 서늘했다.

“폐하, 종을 울리시지 않고…….”

“무슨 일이냐고.”

“히끅…….”

미아가 진짜로 나기 시작한 눈물을 방울방울 흘리며 아딜로트를 응시했다. 아딜로트의 미간이 미미하게 좁아졌다. 그가 페르디안을 돌아보았다.

“네가 울렸어?”

“그렇게 한가하지 않습니다.”

“그거야 그렇겠지만.”

아딜로트가 빠르게 수긍한 뒤 한숨을 쉬었다.

“그럼 갑자기 왜 저러는데.”

“그건…….”

“흑, 폐하……. 흐아앙!”

미아가 잽싸게 페르디안의 말을 자르고 아딜로트에게 다가갔다. 페르디안은 기가 찬다는 얼굴로 미아를 노려보았다.

‘너 이따 보자.’

‘흐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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