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화
“크허! 바로 이 맛이지. 아가씨도 한잔하겠나?”
“아, 아뇨. 저는 술은 좀…….”
“그래? 인생의 낙을 모르는구먼. 푸휴…….”
길게 감탄사를 내뱉은 노인이 입가를 소매로 닦으며 눈을 빛냈다.
“어떤가? 이 노인네와 이야기 한번 해 보는 게. 의외로 좋은 답이 나올지도 모르잖나. 남들하고 하기 어려운 이야기를 할 수도 있고.”
“아뇨, 저는…….”
“예를 들어!”
노인이 미아의 말을 잘랐다. 목소리가 은근해졌다.
“황제에 대한 이야기라든가?”
* * *
“아딜은 진짜 잘생긴 거 같아요.”
“흠, 흠. 그런가?”
“네! 어떻게 그렇게 예쁜 은발이 다 있을까요? 감탄스럽다니까! 눈은 또 어떻고요?”
“남들은 징그럽다고도 하드만. 피 색깔이라고.”
비웃는 노인의 말에 미아가 발끈했다.
“그건 아딜의 눈을 제대로 안 본 사람들이나 하는 이야기예요! 실제로 보면 얼마나 예쁜 빨강인데요! 세상에서 제일 비싼 루비도 아딜 눈보다는 안 예쁠걸요!”
“흠, 흠……. 가까이서 본 적이 있다는 게로군? 사이가 좋은 모양이야.”
“그렇다기보다, 아딜이 친절한 거죠!”
이름 모를 노인이 씩 웃었다.
“그래서, 지금까지 이야기를 들어 본 바로는…… 황제가 잘생겼다는 것밖에 모르겠는데. 그게 아가씨의 걱정인가?”
“네? 제가 걱정이 있다고 말한 적이 있나요?”
“비 맞은 토끼처럼 처량 맞게 앉아서 아무도 나랑 안 놀아 줘, 잉잉, 거리고 있었잖은가?”
“그, 그렇게까진 안 말했거든요!”
정곡을 찔린 미아가 얼굴을 붉히며 외쳤다.
“게다가 지금은…… 그냥 아딜이랑 좀 싸웠을 뿐이에요!”
“신기하구만. 황제랑 사랑싸움을 다 하고.”
“그런 낭만적인 건 아니에요!”
“아니면?”
“그냥, 뭐랄까…….”
미아가 적절한 비유를 찾기 위해 머리를 굴렸다.
“산책 나가자고 하는 강아지랑, 밖에 비 오니까 안 된다고 하는 개주인……?”
“뭐? 크하하.”
노인이 무릎을 치며 웃었다.
“그래, 그럼 아가씨 고민은 개주인이 산책을 안 시켜 줘서 그렇다?”
“비유하자면요!”
“흠! 내 보기엔 다른 이유도 있는 듯한데?”
노인이 말끝을 흐렸다. 미아는 멈칫했다가, 팩 고개를 돌렸다.
“아닌데요? 고민 같은 거 하나도 없어요.”
“정말인가?”
“당연하죠!”
미아가 반짝거리는 분홍색 눈을 접으며 웃었다.
“아딜은 무적이라고요! 유능하고! 백성들도 생각해 주고! 그리고 마음도 따뜻하고, 검도 잘 써요! 그리고 잘생겼어!”
노인은 활짝 웃는 미아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리고 빈 술병을 뒤로 휙 던져 버렸다.
“그 말 후회 안 하나?”
“네!”
“내가 사실 그 황제를 죽이러 온 사람이라고 해도?”
“네?”
스릉.
눈치채지도 못한 사이, 노인은 단검을 미아의 목에 들이밀고 있었다.
“……!”
미아가 숨을 삼켰다. 예리한 날을 이리저리 장난스럽게 돌리며 노인이 킬킬댔다.
“아가씨가 황제가 아끼는 이라고 하던데…….”
“사, 사, 살려…….”
“나도 피를 보고 싶지는 않네. 그러니 얌전히 대답 하나만 해 주면 살려 주지.”
“대, 대답이요……?”
“그래. 황제의 약점이 뭐지?”
그 말을 들은 미아의 눈동자가 커졌다. 그녀는 눈을 잘게 떨다가, 드레스를 움켜쥐고서 히끅거렸다.
“제가 뭘 알아야 알려드리죠……!”
“장난치자는 게 아니라네, 아가씨.”
“힉!”
노인이 칼을 더 가까이 들이밀었다. 미아가 눈을 질끈 감으며 외쳤다.
“정말 그런 거 없어서 말 못 한단 말이에요!”
“정말?”
“정말!”
노인이 비웃음을 흘렸다.
“그럼 죽게나.”
“네!?”
미아가 경악해 눈을 떴다.
‘어떡해! 미쳤나 봐!’
미아가 칼을 피하려 몸을 낮췄다. 순간, 노인이 허공에 칼을 휘둘렀다.
휘잉!
멋들어지게 곡선을 그린 칼은, 뽑은 게 무색하게 다시 칼집으로 되돌아갔다.
“합격이네.”
노인이 킬킬 웃었다.
“……네?”
멍한 얼굴의 미아를 두고, 노인은 품에서 작은 술병을 꺼냈다.
“황제의 옆에 서려면 황제가 어떤 자인지 알아야 하지. 황제는 빛이 바래서도, 업신여겨져서도 안 되네.”
“어…….”
“그리고 모르는 사람에게 황제의 약점이나 단점을 까발려서도 안 되지. 아가씨는 그걸 아주 잘 알고 있는 것 같군. 합격이야.”
미아가 멈칫하고서 노인을 티 나지 않게 아래위로 훑어보았다.
‘그러니까…… 내가 합격이라고?’
그녀는 곧 심통이 난 얼굴로 입술을 깨물었다.
“그렇게 말씀하시는 공은 누구신지?”
노인이 씩 웃곤 다시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흠, 흠! 아가씨가 굳이 알 필요는 사람일세. 뭐, 나중 가면 알게 될지도 모르고.”
“아하……. 그러시다?”
미아가 눈썹을 사납게 올리곤 몸을 돌렸다. 그리고 하인들을 향해 외쳤다.
“여기 미친 노인이 있어요!”
“푸웁!”
노인이 술을 뱉었다.
“자, 잠깐! 내가 여기 있다는 건 아직 비밀이란 말일세!”
“헉, 더 수상해! 여기요!”
미아가 뻔뻔하게 손을 살랑살랑 흔들었다.
‘물론 진짜 부를 건 아니지만.’
감시인들에게는 그냥 인사하는 것으로 보였을 것이다. 노인은 어느새 땀을 뻘뻘 흘리고 있었다.
“이, 이보게나! 꼭 이렇게까지…….”
“해야죠! 황궁에 이렇게 수상한 사람이 있는데, 어떻게 가만 보아 넘기겠어요! 우리 폐하께 위험한 분일 수도 있는데!”
“아니, 난 황제 편이라네. 자네 방금 내 말을 듣고도……!”
“증거도 없는데 어떻게 믿어요!”
“그, 그야 그렇지만…….”
“다른 방법으로 공이 결백하는 걸 증명해 주신다면 모를까 말이에요!”
하고 있는 말과는 다르게 미아의 얼굴은 활짝 웃고 있었다.
“그게 기왕이면 제가 좋아할 방법이면 더 좋고요!”
노인이 멍청한 얼굴을 했다.
“허, 허허. 허.”
그러더니 뚝뚝 끊기는 웃음소리를 흘리다가, 마지막에는 그야말로 박장대소하기 시작했다.
“크하! 하하하하! 자네 꽤 영악하구만?”
“남몰래 사람을 시험하신 분보다는 아닌 것 같은데요!”
미아가 새침하게 눈을 흘겼다. 바닥을 구를 기세로 웃던 노인이 곧 웃음을 멈췄다. 노인답지 않은 기백이 느껴지는 검은 눈이 빛났다.
“그건 미안하네. 좋아. 맹랑함을 높이 사서, 이 노인네가 선물을 하나 주지.”
“선물이요?”
노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은 궁 안으로 들어가세. 궁 내부면 하인들이 쫓아오지 않겠지?”
“그렇긴 한데…… 정문으로 들어오실 수 있겠어요?”
“난 따로 들어가지. 아가씨 먼저 들어가 있으면 내가 찾아가겠네.”
무슨 재주로 그러겠다는 걸까.
의아한 마음으로도 미아는 말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가 궁으로 다가가자 그녀를 지켜보고 있던 하인들이 해산하는 게 보였다.
평소 미아가 궁 내부에 있을 때 일을 터뜨린 적은 없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미아가 궁의 적당한 빈방에 다다랐다. 얼마 안 있어, 창문이 덜컹거렸다.
“휴! 오랜만에 하니 영 낯설구만.”
창문을 열고 노인이 불쑥 방 안으로 들어왔다. 미아가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떻게 들어오신 거예요? 황제궁 주변은 기사들이 계속 감시 중인데……?”
“삶의 지혜랄까?”
“엑…….”
“……그렇게 노골적으로 가당찮다는 눈빛을 할 것까진 없잖은가.”
노인이 헛기침하고는 손가락을 까딱였다.
“아무튼, 따라오게. 시험을 통과했으니 선물을 주어야지.”
그렇게 말한 노인이 앞장서기 시작했다. 행색도 초라하고 수상했지만, 선물이라니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미아 역시 노인을 따라 이동하기 시작했고, 노인은 아주 조심스럽고도 대범하게 인적을 피해 움직였다. 그가 향한 곳은 황제궁 2층 구석의 초상화 방이었다. 노인을 따라가며 미아는 감탄을 흘리지 않을 수 없었다.
‘하인들의 동선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어. 거의 제집 드나드는 수준인데?’
마침내 노인과 미아가 초상화 방에 다다랐다. 쓰지 않는, 그러나 버리기엔 애매한 초상화들을 모아 놓는 방이다. 사람이 들어오는 일은 거의 없었다.
노인은 방 정중앙에 걸린 푸른 옷의 귀부인 초상화에 다가갔다. 그가 큼큼 헛기침했다.
“순서를 잘 기억하게나. 순서가 아주 중요하거든.”
노인이 그렇게 말한 뒤, 초상화의 귀퉁이를 기울이기 시작했다.
푸른 옷의 귀부인 초상화, 녹색 옷의 기사 초상화, 검은 옷의 꼬마 초상화…….
‘뭐하는 거지?’
미아가 의아해한 것도 잠시. 귓가에 점점 낯선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달칵. 끼이익……. 딸각.
기계가 맞물리고 태엽이 돌아가는 아주 작은 소리였다. 마지막으로 노인이 푸른 옷의 귀부인 초상화를 반대로 기울였다 되돌린 순간이었다.
쿵! 스르르…….
왼쪽의 벽 하나를 통째로 차지하고 있던 거대한 천사 그림이 움직였다.
아니, 벽 자체가.
미아의 입이 절로 벌어졌다.
“이건…….”
어슷하게 움직인 벽 너머에 있던 비밀 공간이 드러났다. 마법의 푸른 불이 은은하게 아래로 향하는 계단을 밝히고 있었다. 틈을 통해 지하의 냉기가 흘러나왔다.
‘황족만 쓸 수 있다는 비밀 통로?’
원작 소설에는 그런 게 있다는 식으로만 언급되었다. 나온 적도 없다.
그걸 이렇게 알게 되다니.
미아는 입을 다물지 못했다.
“비밀 통로네. 수도 중심 거리의 낡은 술집 지하와 이어져 있지.”
노인은 허리춤에 손을 얹고 으스대듯 말했다. 노인의 말에 정신을 차린 미아의 얼굴이 굳었다.
“이걸 왜 저한테?”
“그야 아가씨, 밖으로 나가고 싶어 하는 거 아니었나?”
“이런 걸 막 알려 줘도 되나요?”
“황궁에 이런 게 한두 개도 아닌데 하나쯤 알려 준다고 뭐 어떤가!”
“그 한두 개도 공이 소유권을 가진 건 아니지 않나요……?”
미아가 노인을 흘끗거렸다.
전통적인 오르퀘니나의 황족은 흑발에 적안.
아딜로트는 레아 황비의 머리카락 색을 따라가 은발이지만, 기본적으로 왕족은 검은 머리다. 하지만 눈앞의 노인은 흑발도, 적안도 아니었다.
즉, 황족이 아니다.
결론?
노인은 남의 재산으로 생색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