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화
“미로미스 전로를 통해 연철을 강철로 바꾸잖아요? 그 강철이 깨지는 건 강철 내부의 인이라는 물질 때문이에요! 전로 내부의 점토층이 인하고 반응하지 않아서요! 그걸 석회로 바꾸면 인을 제거할 수 있고, 또 그러면 안 깨지고…….”
미아가 아딜로트의 눈치를 보며 중얼중얼 정보를 늘어놓았다.
이것들은 <장미 정원의 세레니티>에 나온 게 아니라, 전부 현대에 살 때 책에서 읽은 것들이었다.
사실, 그녀는 꽤 기억력이 좋았다. 책도 많이 읽는 편이었다.
백과사전을 처음부터 끝까지 재밌어서 읽는 타입.
그게 미아였다.
‘물론 그렇다고 깊은 지식이 있는 건 아니지만, 뭐든 첫 단서가 제일 어려운 거니까.’
집무실은 조용해졌다. 정적을 깨고 슐츠 공작이 입을 열었다.
“……폐하.”
“알아.”
두 사람의 목소리에는 긴장감이 서려 있었다. 그만큼 방금 미아가 말한 것은 혁명에 가까운 일이었다.
그녀가 말한 방법이 가능하다면, 평소 강철을 만드는 데에 걸리는 시간과 돈이 1/20로 줄어든다.
앞으로 압도적인 국력을 갖게 된다는 뜻이었다. 이전에 미아가 발명했던 미로미스 전로도 엄청난 발명품이었건만.
아딜로트가 예리함을 나른함으로 가장한 채 물었다.
“이런 게 있었는데 왜 숨기고 있었지?”
“그, 그야…….”
미아가 머리카락을 X자로 만들어 얼굴을 가렸다.
한참 뒤, 우물쭈물하며 답했다.
“좀 이른 게 아닌가 싶어서…….”
“……하.”
아딜로트가 헛웃음쳤다.
그러니까, 기술의 발전이 너무 빠르다고 느꼈다는 뜻이다. 얼마나 많은 걸 알고 있어야 그런 걱정을 할 수 있는 것인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아딜로트는 묵묵히 생각을 정리했다가, 검처럼 들었던 펜을 내려놓았다.
“그래서 이 정보를 알려 주는 이유는? 순순히 줄 만한 정보가 아닌데.”
미아가 슬쩍 얼굴을 가린 머리카락을 내려놓았다. 그럴 것이다. 책에서도 이 방법이 엄청난 발견이었다고 쓰여 있었으니까.
미아가 침을 꿀꺽 삼켰다.
“부탁드릴 게 있어요…….”
“뭔데.”
“저…… 며칠만 궁 밖으로 나가고 싶어요, 폐하!”
그 순간 아딜로트의 붉은 눈에 서늘한 빛이 서렸다. 지금까지와는 결이 다른 한기였으나, 미아는 그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왜?”
“으음, 그게 그러니까, 사람 하나를 찾으려고……?”
“사람?”
아딜로트가 되물었다. 말을 잠시 멈춘 미아가 잠깐 고민했다.
황태자가 죽은 그 사건의 생존자를 찾는다고 하면, 당연히 말도 안 된다고 일축할 것이다. 아니면 네가 어떻게 그런 걸 알고 있느냐고 의심받을지도 몰랐다.
‘그럼 역시 이 방법밖에 없네.’
미아가 함박웃음을 지었다.
“약혼자를 찾으려고요!”
“…….”
“폐하?”
“아.”
잠깐 얼었던 거 같은데.
미아가 의아하게 쳐다보자, 아딜로트가 재빨리 표정을 가다듬었다. 그래 봐야 얼음장처럼 차가워서 이미 표정이랄 것도 없었지만.
“내가 알기로 셀레스티얼 백작 영애는 약혼 기록이 없는데.”
“남몰래 했어요!”
“남몰래.”
“네! 사랑하니까!”
“…….”
아딜로트의 붉은 눈이 조금 흔들렸다.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고?”
“네! 그 사람이 너무 보고 싶어요!”
미아는 최대한 사랑에 빠진 순진한 아가씨처럼 눈을 빛냈다. 아딜로트의 얼굴이 점점 더 싸늘해졌다. 표정이 썰물처럼 빠진 자리에, 점차로 묘한 잔인성이 떠올랐다.
“폐하……?”
옆에 있던 슐츠 공작마저 당황한 기색을 띄울 정도였다.
‘……뭐지? 아까보다 더 심각한 분위기인데……?’
미아의 등에 식은땀이 흘렀다. 자신이 뭔가를 잘못 말한 것이 분명했다.
‘나가려고 한 게? 아니면 전로? 아니면…….’
뭐가 됐든 튀어야 할 때다.
“으음! 그런데 제가 폐하를 너무 방해한 것 같아서, 슬슬 나가 봐야…….”
“그 약혼자란 남자는?”
그때, 아딜로트가 불쑥 물었다.
“네?”
“남몰래 약혼할 정도면 그리 변변찮은 놈은 아닌 것 같은데. 셀레스티얼 백작가가 망했으니 도망이라도 치지 않았겠어?”
그 순간 주춤하긴 했으나, 다시 주먹을 불끈 쥔 미아가 크게 외쳤다.
“그걸 확인해 보러 나가는 거예요! 사랑하는 남자니까!”
“미아 셀레스티얼.”
아딜로트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밖에서 너는 아직 반역자의 딸이야. 네가 그렇게 자유롭게 나다닐 수 있는 처지는 아닐 텐데.”
“알지만 꼭 필요한…….”
“네 장단에 맞춰 줄 시간 없어. 곧 황권이 건재하다는 걸 과시하기 위한 무도회도 열어야 하고, 셀레스티얼 백작가의 재산도 처분해야 하니까.”
“그, 그러니까 어차피 저한테 신경 쓸 시간도 없잖아요! 요즘 얼굴도 못 보니까, 잠깐 나갔다 와도…….”
“내가 보고 싶다며? 보러 오면 되겠네.”
이게 아닌데.
생각했던 것과는 사뭇 다르게 흘러가는 전개에 미아는 당혹스러웠다.
“제, 제가 전로 개선 방법도 알려드렸는데……!”
“기밀 서류를 훔쳐본 대가로 퉁치지.”
“날강도!”
“그 날강도가 황제라서.”
미아가 입을 떡 벌렸다.
‘너 도와주려고 그러는 건데!’
물론 엄밀히 말하자면 미아를 위한 것이기도 했다. 미아가 살아남은 것 때문에 해피엔딩이 나지 않을 수도 있으니까.
말인즉 배드엔딩.
‘크리소르 황태후가 아딜로트를 그렇게 죽이려 드는데 배드엔딩이 나면 뭐겠어?’
죽음.
아무리 생각해도 그거밖에 없다.
그렇게 되면 아딜로트 옆에 있는 미아의 목숨도 보장하기 어려웠다. 반역자의 딸을 그냥 놓아줄 리 없으니, 도망칠 수도 없고 말이다.
즉, 미아는 자신을 위해서라도 아딜로트의 황위를 지켜 줘야 했다.
‘배드엔딩은 안 돼! 죽고 싶지 않단 말야!’
이판사판이 된 미아가 외쳤다.
“마법! 마법으로 저를 추적해요! 아니면, 안 돌아오면 죽는 마법을 건다든가!?”
“…….”
미아의 말에 아딜로트는 뭐가 마음에 안드는지 더 미간을 좁혔다.
“……그 정도로 그 약혼자가 보고 싶다고?”
“네!”
“…….”
아딜로트가 짜증스럽게 머리카락을 넘겼다.
“……아딜?”
“폐하겠지.”
그가 책상 위의 종을 울렸다.
딸랑.
맑고 고운 소리가 나자, 곧 아딜로트의 개인 시종인 올리버가 들어왔다.
“부르셨습니까?”
“데리고 나가. 그리고 황제궁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해.”
“엑!? 아딜!”
“명 받들겠습니다.”
올리버가 미아를 이끌었다. 부드럽지만 단호한 힘이었다.
“가시죠, 미아 님.”
“잠깐만요! 아딜!?”
아딜로트가 서류를 책상에 던지며 이마를 짚는 모습을 끝으로, 집무실의 문이 닫혔다.
* * *
“으아앙! 내가! 너! 도와주려고! 하는 건데!”
미아가 베개를 팡팡 때리며 외쳤다. 그녀는 현재 아딜로트의 침실에 있었다. 갈 데가 없었다. 아딜로트가 정말로 미아를 못 나가게 한 것이다.
“나가실 수 없습니다.”
“집무실에 가시는 거라면 안내해드리겠습니다. 하지만 밖은 폐하께서 금지하셨습니다.”
“돌아가 주십시오, 미아 님.”
미아가 어딜 가려고 하든 하인이 따라붙었다.
가능한 것은 정원에 나가는 정도.
그때마저 달리기가 빠른 시종 여럿이 멀리서 미아를 감시했다.
“이렇게까지 해야 할 필요가 있어!?”
원래 있던 자유마저 빼앗기게 된 미아가 분통을 터뜨렸다.
어떻게든 잘해 보려고 한 거였는데 남자주인공이 흐름을 방해하다니!
하지만 그런 감정도 며칠 뒤엔 사라졌다.
‘……심심해!’
대화할 사람이 없었다. 자신을 가둔 아딜로트에겐 가기는 싫었다. 가끔 페르디안을 마주쳤지만, 그는 마주칠 때마다 인상을 쓰곤 미아를 무시했다.
그나마 대화가 통할 것 같은 요아힘은 부재중.
하인들은 미아를 희귀한 동물 보듯 대할 뿐이었다. 직급이 높은 시종인 올리버, 제인도 안타깝다는 시선을 보내는 게 전부였다.
‘내가 이렇게 외향형이었다니.’
이젠 누구라도 좋으니 같이 이야기나 해 줬으면 좋겠다 싶었다. 그렇게 일주일을 내리 혼자 지낸 미아는, 정원의 나무 기둥 뒤에 앉아 긴 한숨을 내쉬었다.
“이젠 싫어……. 나가는 것보다 누구랑 얘기하고 싶어, 훌쩍……. 아딜 미워……!”
그때였다.
“흠, 흠, 그렇단 말이지?”
낯선 목소리가 위에서 들려왔다. 미아가 놀라기도 전, 무언가가 나무 위에서 쑥 하고 내려왔다.
“흐억!”
“비명 한 명 요란한지고.”
눈 앞에 펼쳐진 광경에 미아가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땅요정…… 같은 건가? 아니면 집요정……?”
“실례구만. 사람일세.”
나무 위에서 내려온 것은 짜리몽땅한 노인이었다. 턱 주변에는 텁수룩하게 수염이 나 있고, 옷은 엄청나게 지저분했다.
특징적인 건 허리춤의 술병이었다.
‘술 냄새!’
뒤늦게 미아가 코를 막고 뒤로 물러났다. 아니나 다를까 노인의 얼굴은 시뻘겠다. 멀리 있는 감시인들에게는 보이지 않는 각도로 등장한 노인은, 나무 기둥 뒤에 숨은 채로 킬킬댔다.
“그래서 아가씨는 뉘신고?”
미아는 코를 잡았던 손을 내리고서 좌우로 눈을 굴렸다.
“저, 저는……, 미아 셀레스티얼이라고 하는데요……?”
“흠, 흠, 셀레스티얼이라. 그래서, 얘기 상대가 필요하다고?”
“아뇨, 잘못 들으셨어요.”
미아가 빠르고 단호하게 답했다.
‘미친 사람인가 봐.’
그걸 본 노인이 껄껄대며 웃었다.
“미친 사람이라고 생각한 모양이구먼! 흠, 흠, 그 말도 틀린 건 아니지만!”
“히익……. 진짜 미치셨어요……?”
미아의 물음에 노인이 이번엔 아예 박장대소했다.
“그래! 미친 셈 치세나!”
“호, 혼자 미치시는 게…….”
“크하하! 이 아가씨, 말하는 게 아주 재밌구만!”
노인은 킬킬대며 술병을 들어 꼴깍꼴깍 술을 마셨다. 누런 술이 턱으로 흘러 수염을 지저분하게 적셨다.
‘어떡해. 지금 도망치면 되나?’
미아가 황망히 서서 슬금슬금 뒤로 물러나려던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