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화
“하하. 알겠습니다.”
아딜로트가 미간을 좁히고서 화내던 미아의 표정을 떠올렸다.
울먹이던 눈. 걱정 가득하던…….
“혹시 이전에 만난 적이라도 있으십니까?”
그런 아딜로트의 생각을 읽은 것처럼 요아힘이 물었다.
“아니.”
“그런데 퍽 친근하게 폐하를 대하는군요. 테타 씨의 생각은 어떠신가요?”
옆에 서 있던 엠브라가 난처하게 웃었다.
“으음, 문제 발언이나 행동은 없었어요! 솔직히 말해서, 폐하를 엄청 좋아하는 것으로밖에 안 보이던데요!”
엠브라가 미아의 행동을 떠올리며 답했다. 말을 얹진 않았지만, 아딜로트 또한 은근히 그것을 느끼고 있었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그랬다.
겁 없이 얼굴을 힐끔거리는 태도. 가당치도 않은 애교.
그러면서 그를 향해 보이는 기묘한 다정함.
속셈이라곤 없어 보이는 맑은 분홍색 눈을 들여다볼 때면, 어쩐지 가슴 깊은 곳이 술렁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건 그에겐 너무 낯설고 이상한 감각이었다.
“……쟤 진짜 이상해.”
그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고개를 돌렸다.
* * *
“죄송해요, 아가씨!”
하루 뒤, 엠브라가 약함을 들고 미아를 찾아왔다.
“폐하를 위해서였지만, 속인 건 사실이니까……. 사과드리고 싶어요!”
그녀는 정말로 미안한 눈치였다. 은근슬쩍 미아의 손 위에 뉴미니의 벚꽃 사탕을 올려 주는 것만 봐도 그랬다.
‘에휴.’
미아가 그 모습을 보며 뾰로통하던 표정을 풀었다.
“속인 사람은 말하기 금진데.”
“핫?”
냉큼 입술을 오므리는 엠브라의 행동에 미아가 웃음을 터뜨렸다.
“괜찮아요. 내가 의심스러운 건 당연한 일이니까.”
“……화나지 않으셨어요?”
“에헤. 쪼끔?”
미아가 고개를 기울이며 다시 웃었다. 아딜로트에게 화가 났다기보다, 그를 그럴 수밖에 없게 만든 크리소르 황태후에게 화가 났다.
생각해 보면, 자신은 반역 혐의와 더불어 크리소르 황태후의 첩자가 아닌가 하는 의심을 받고 있던 게 분명했다.
그러니 당연히 아딜로트는 자신의 정체를 확인했어야 했으리라.
미아만은 그런 아딜로트를 이해했다. <장미 정원의 세레니티>를 읽었으니까.
아딜로트는 크리소르 황태후에 의해 북부 전선으로 떠난 뒤, 수차례 뒤통수를 맞았다. 그러지 않게 된 건 요아힘이 합류하고 나서부터였다.
‘의심하고 계책을 세우는 게 요아힘의 역할이니까.’
솔직히 자신이 요아힘이었대도 시험했을 것이다. 이성적인 성격의 미아는 합당한 이유가 있으면 화내지 않는 편이었다.
“아딜은 주변을 의심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니까요! 아딜도 그러고 싶어서 그런 건 아닐 테니까.”
미아의 대답에 엠브라는 묘한 얼굴이 되었다.
“……좋은 분이시네요, 아가씨.”
“그쵸? 아딜은 왜 그 좋은 사람을 못 알아본담!?”
당당하게 하는 말에 엠브라도 결국 픽 웃고야 말았다. 그녀는 잠시 말을 멈췄다가, 보다 차분하게 말했다.
“누가 뭐래도 전 정말 아가씨가 반란에 가담했을 것 같지는 않아요. 크리소르 황태후의 첩자도 아닐 것 같고요.”
“그거 나중에 아딜한테도 말해 주세요!”
“언니라고 부르면 생각해 볼게요?”
“언니, 약속했다?”
“뭐……, 풋, 하하!”
망설임 하나 없는 말에 엠브라가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귀족이면서 전혀 으스대지도 않고.’
정말로 재간둥이인 아가씨였다. 누구라도 저도 모르게 마음의 문을 열어 줄 정도로.
‘하긴, 이런 사람이니 그 엄격한 폐하가 갑자기 옆에 두기도 하는 거지!’
미아는 아딜로트가 그녀를 의심하는 게 당연하다고 말했지만. 엠브라가 볼 때 아딜로트는 벌써 미아에게 반쯤 넘어가 있었다.
평소 다른 사람을 대하던 차가운 태도만 떠올려 봐도 그랬다. 요아힘 재상도 그걸 느끼고 있을 테고, 그래서 자신에게 독을 바르라고 지시한 것이리라.
이렇게 쉽게 마음의 빗장을 열어버린 사람이 적이라면 너무 위험한 일일 테니까.
‘다행히 그럴 일은 없을 것 같네.’
생각을 마친 엠브라가 씩 웃었다.
“그냥 엠브라라고 불러요! 언니 소리 한 번 들었으면 됐다!”
“정말요? 난 상관없는데!”
“나중에 황후한테 언니 소리 듣게 될까 봐 무서워서 그래요!”
“네에?”
미아가 고개를 갸웃하길래 못 알아들은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엠브라, 황후한테 언니 소리 들을 수 있으면 들어야죠! 으스대기 딱 좋은데! 얼마나 이용 가치가 높은데!”
엠브라는 다시 크게 웃어 버렸다. 그녀는 순식간에 미아가 좋아졌다.
이후 그녀는 미아의 화상을 살폈다. 다행히 며칠이면 나을 것 같았다. 금방 해독제를 마셔서인지 독 역시도 많이 흡수되지 않았다.
치료가 이어지는 동안, 이번에는 미아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엠브라. 혹시 바깥에서 아딜 평판은 어때요?”
“폐하의 평판이요?”
“네. 셀레스티얼 백작가가 그렇게 됐으니 더 무시무시해졌겠죠?”
엠브라의 눈썹이 고뇌하듯 찌푸려졌다.
“그렇긴 해요! 셀레스티얼 백작가를 진압한 일로 흑색선전이 엄청났거든요. 물론 아가씨가 살았고, 하인들도 살긴 했지만요.”
“역시…….”
이야기를 들은 미아가 한숨과 함께 과거를 떠올렸다.
‘당장 내가 할 수 있는 일만 한다고 가문을 부흥시키는 일에만 급급했지.’
그 결과 셀레스티얼 백작가는 어마어마한 부를 얻게 되었지만, 그 부는 원작의 흐름을 바꿔 주지는 못했다. 우습게도 이미 정해져 있던 미래를 바꾼 건, 고작 미아의 말과 행동이었다.
‘바꿔 말하자면, 내가 살아남은 순간 계속해서 뭔가가 바뀌기 시작할 거란 뜻이야.’
그래서 미아는 결심했다.
기왕 바뀔 거, 제대로 한번 바꿔 보자고.
“다른 건요?”
“글쎄요? 폐하의 평판이야 항상 바닥이라서.”
엠브라가 근심스럽게 말했다.
“아시잖아요? 백성들 눈에는 아무래도 그런 것만 보이나 봐요! 가문 하나를 하룻밤에 몰살했다느니, 폐하의 군대가 지나간 곳은 쑥대밭이라느니.”
말을 마친 엠브라가 싱긋 웃었고, 사정을 아는 미아는 좀 억울해졌다.
‘아딜 잘못은 하나도 없는데.’
가문을 몰살시킨 건, 일가족이 전부 간첩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군대가 지나간 곳은 원래 쑥대밭이다. 그게 특별히 아딜로트의 군대라서는 아니다.
오히려 아딜로트는 민간인을 괴롭히지 않도록 군의 기강을 엄하게 잡는 편이었다.
‘지금 황궁의 기사들이 얼마나 군기가 바짝 들었는지만 봐도 알잖아!’
하지만 그 모든 게 아는 사람만 아는 이야기였다. 어느새 시무룩해진 미아의 모습에 엠브라가 허둥지둥 말을 덧붙였다.
“어쨌든! 폐하는 그런 걸 전혀 신경 쓰지 않으시죠. 저라면 절대 제정신으로 못 있을 텐데……. 대단한 분이세요.”
미아를 위로하기 위해 한 말이었지만, 별로 힘은 나지 않았다.
‘아니야. 신경 쓰지 않는 게 아니라, 체념한 거야.’
미아는 좀 더 풀이 죽었다. 아딜로트도 초반엔 소문을 잡았다. 하지만 그를 공격하는 악의적인 선동은 계속되었다.
아딜로트는 그걸 막을 수 없었다. 지금이야 나아졌다지만, 그 시절 아딜로트는 정말로 군사력밖에 가진 게 없었으니까.
결국 아딜로트는 대외 이미지를 완전히 포기하고서, 아예 공포 정치로 노선을 바꿔 버렸다.
‘그 배후에 있는 게 황태후 크리소르와, 그녀의 친가인 크라우스 공작가지.’
크리소르가 그렇게까지 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크리소르는 여전히 아딜이 클라우디오 황태자를 죽였다고 생각할까요?”
미아의 갑작스런 말에 엠브라가 멈칫했다. 엠브라는 벚꽃 사탕 하나를 까서 미아의 입에 넣어 주었다.
“이 아가씨, 무서운 말을 하시네?”
“여긴 아디르 침시이니까…….”
사탕을 먹은 탓에 미아의 발음이 뭉개졌다. 엠브라가 씩 웃었다.
“사실, 폐하가 직접 죽이지 않았다는 건 당연히 알겠죠. 크리소르는 나쁜 거지 멍청한 게 아니니까.”
“그엇겟죠……?”
“하지만 중요하게 생각하진 않을 거예요. 그 자리에 누가 있었든, 크리소르는 그 사람을 죽이고 싶어 했을 테니까요.”
미아가 사탕을 문 채로 한숨을 쉬었다.
아딜로트가 황제에 즉위하기 전.
클라우디오 황태자와 아딜로트 황자 사이에 있던 일은 백성들 사이에서도 어마어마한 이슈였다.
가장 큰 궁금증은, ‘그래서 정말로 황자가 황태자를 죽였느냐?’였다.
‘당연히 아니지만.’
누구라도 그렇게 오해할 만한 상황이었다. 선황 루드비히가 죽은 직후, 클라우디오 황태자는 황제가 되기 위한 준비에 들어갔다.
그러던 어느 날 클라우디오 황태자가 아딜로트에게 사냥을 제안했다. 아딜로트는 협박에 못 이겨 어쩔 수 없이 그것을 수락했다. 황태자는 마부와 아딜로트만 데리고 숲으로 향했다.
그리고 그 숲에서 마부를 해치고, 아딜로트 역시 해치려 들었다.
‘목격자는 없는 게 낫겠지?’
‘대체 왜 이러는 거야! 난 황좌를 탐낸 적도 없는데…….’
‘약한 걸 괴롭히는 데에 이유가 필요해?’
황태자가 몰랐던 것은, 그 시점에서 아딜로트의 몸이 어느 정도 단련되어 있었다는 점이다. 아딜로트는 남몰래 레아 황비에게 검술을 배웠었고, 레아 황비가 죽은 뒤로도 단련을 계속해 왔다.
두 사람 간에 몸싸움이 벌어졌다.
그리고 운 나쁘게도 클라우디오는 빗물에 발이 미끄러져 뇌출혈로 사망하고 만다.
‘역시 나쁜 짓 하면 벌 받는다니깐.’
원작의 내용을 다시 돌이켜본 미아가 눈썹을 찌푸렸다. 걱정스러운 부분이 있었다.
‘<장미 정원의 세레니티>는 해피엔딩이었지만……. 지금도 과연 그럴까?’
나비 효과란 게 있다. 나비의 날갯짓 같은 미세한 차이가 지구 반대편에선 폭풍이 될 수도 있다는 뜻이다.
원래의 흐름과 달리 자신이 살아남았으니, 응당 뭔가 바뀔 것이다.
‘마냥 원작대로 해피엔딩이 나겠지, 하고 앉아서 기다릴 상황이 아니야.’
몇 번이나 다시 읽었을 만큼 좋아하던 소설이었다. 자신 때문에 주인공들이 해피엔딩을 맞이하지 못한다면 크게 후회할 것 같았다.
“역시…… 제가 할 수 있는 걸 해야겠죠?”
아드득, 사탕을 깨문 미아가 중얼거렸다. 묘하게 냉정한 표정에 엠브라는 잠시 대답하지 못했다. 이 아가씨는 평소엔 아주 해맑다가도 가끔 이렇게 속을 알 수 없는 눈을 하곤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