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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군의 애완동물이 되었다-8화 (8/193)

8화

‘황태후 크리소르 크라우스.’

그녀를 발견한 미아의 입매가 굳었다. 단발머리 의원이 급히 허리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일이 조금…….”

“일? 나를 진료하는 것보다 중요한 일이 있다고?”

“그, 그렇지 않습니다! 약의 배합이 생각보다 오래 걸려서 늦었을 뿐입니다!”

“황립 의료원의 의원이라는 자가 입에는 변명뿐이구나.”

“죄송합니다!”

의원의 거듭된 사과에도 황태후 의 눈초리는 여전히 매서웠다.

“되었다. 어서 끝내도록.”

그녀는 셰즈롱그에 누워 팔을 뻗었다. 뒤쪽에 서 있던 시녀가 크리소르의 소매를 올렸다. 그걸 신호로 몇 의원들이 나서서 그녀를 진료하기 시작했다.

미아는 고개를 숙인 채, 최대한 다른 의원들 뒤에 숨어 몸을 낮췄다. 황태후 크리소르 크라우스는 소설 <장미 정원의 세레니티>의 악역이다.

아딜로트의 적이기도 하며, 그의 원수이기도 하다. 크리소르는 아딜로트의 어머니인 레아 황비를 싫어했다. 그래서 그녀와 선황제 사이를 이간질했다.

‘사실상 레아 황비의 모국인 젠타리아와 전쟁이 벌어진 것도 크리소르 때문이지.’

레아 황비가 죽은 순간, 크리소르는 이제 모든 권력이 자신 것이라 확신했다.

하지만 선황제는 병사했고, 아들인 클라우디오 황태자는 사고사했다. 순식간에 천당에서 나락으로 처박힌 것이다.

이전까지만 해도 아딜로트를 싫어하진 않았던 크리소르지만, 클라우디오가 죽은 뒤로 그녀는 달라졌다.

크리소르는 클라우디오의 죽음이 아딜로트 때문이라고 굳게 믿고 아딜로트를 죽이려 들기 시작했다.

원작을 떠올린 미아가 사람들 사이로 슬쩍 크리소르를 살폈다.

“복용량을 더 늘려 보겠습니다.”

“여기서 더 말이냐.”

“차도가 있으면 좋겠지만, 갈수록 주기가…….”

“……알았다. 그리하거라.”

‘지병이 있다는 게 사실이구나.’

크리소르는 아들인 클라우디오가 죽은 뒤 지병을 얻었다. 그 때문에 원작 마지막에서는 자신의 목숨이 얼마 남지 않은 것을 깨닫고, 과격한 시도까지 했다.

‘여주인 렌도 아직 못 만났는데 악역부터 만나다니. 뭔가 잘못되진 않겠지?’

미아가 걱정과 불안으로 더더욱 몸을 낮췄다. 그사이 의원들은 크리소르에게 몇 가지 처방을 내렸다.

“……해서, 일주일치 약입니다.”

크리소르는 그 짧은 시간에 전보다 더 지쳐 보였다.

“피곤하니 이만 물러가거라.”

일이 끝날 기미가 보이자 그제야 미아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래도 다행이다. 아무 일 없이 넘어가는구나…….’

그때였다.

“분홍 머리.”

크리소르의 녹색 시선이 정확히 미아에게 꽂혔다.

“넌 남거라.”

고개를 숙이고 있던 미아의 몸이 그대로 굳었다. 순간 녹색 단발머리 의원이 기묘하게 눈을 빛냈다.

“폐하? 저희 신입인데 뭔가 문제라도……?”

“내가 네게 그것까지 말해야 하느냐?”

“폐하. 저는 의원으로서 휴식을…….”

“주제넘은 소리 말고 꺼지도록.”

크리소르가 짜증스럽게 말했다.

“……예. 태후 폐하.”

녹색 머리 의원은 고개를 조아린 뒤 다른 의원들과 함께 자리에서 물러났다. 뿔테 안경 너머로 그녀의 갈색 눈이 끈질기게 미아에게 따라붙었지만, 미아는 그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방 안에는 곧 미아와 크리소르, 그리고 그녀의 시녀들만 남았다.

“가까이 오거라.”

“…….”

미아가 한숨을 참고서 몸을 일으켰다. 그녀는 지난 1년 동안 미아 셀레스티얼로서 배운 귀족적인 걸음걸이로 크리소르 앞으로 다가갔다.

“황태후 폐하를 뵙습니다.”

중년의 나이에도 매혹적이고 아름다운 여자가 메마른 냉소를 흘렸다.

“웃긴 꼴을 하고 있구나, 셀레스티얼의 딸이여.”

“과찬이십니다.”

미아가 눈을 내리깔았다. 태연한 겉모습과 달리 속은 복잡한 상태였다.

‘정체를 들킨 건 알겠어. 그런데 왜 내게 남으라고 했지?’

셀레스티얼 백작은 반역자다. 남에게는 미아 역시 반역자로 보일 것이다. 아딜로트를 싫어하는 크리소르 입장에서는 고마운 일일 것이다.

그러니 더더욱 미아를 이런 식으로 불러낼 이유가 없었다.

‘내가 크리소르라면 처음엔 의심받지 않도록 내버려 둔 다음, 나중에 뭔가로 유혹해서 암살을 사주할…….’

거기까지 생각한 미아는 머리를 망치로 한 대 맞은 기분이 들었다.

‘설마?’

굳은 미아를 향해 크리소르가 싱긋 웃었다.

“하지만 잘했다. 훌륭하게 그 악마의 옆을 파고들었구나.”

미아가 눈을 질끈 감았다.

‘백작 이 망할…….’

이제야 모든 것이 이해가 갔다. 셀레스티얼 백작의 배후에 크리소르가 있었던 것이다. 원작에는 나오지 않은 내용이었다.

‘어쩐지 부득불 반역을 저지르길래 이상하다고 생각은 했는데!’

미아가 처음 빙의했을 때.

그녀는 가장 먼저 죽음을 피할 방법부터 찾았다. 자연히 반역을 없던 일로 만들면 되지 않겠느냐는 데까지 생각이 미쳤다.

그날부터 셀레스티얼 백작을 살폈다.

‘원작에서 셀레스티얼 백작은 늘 출세욕과 가난 때문에 불만이 많았다고 쓰여 있었지.’

그래서 미아는 원작의 정보를 이용해, 셀레스티얼 백작가에 부를 가져다주었다. 가난한 셀레스티얼 백작가가 부흥하면 백작이 반역을 일으키지 않을 거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런데 아니었고, 반역은 벌어졌다. 원작에 쓰여 있던 것과 달리, 단순히 가난 때문은 아니라는 사실이 드러나는 대목이었다.

‘하다못해 크리소르랑 셀레스티얼 백작이 이어져 있었다는 떡밥이라도 줬어야죠, 작가님!’

책의 내용은 기억하고 있으니 한 줄만이라도 뉘앙스가 있었다면 알았을 텐데.

그럼 그 돈을 백작에게 다 갖다 줄 게 아니라, 진작 백작을 두고 튀었을 텐데!

‘그거 하나만 믿고 뼈 빠지게 일했더니…….’

원작을 보면 미래를 알 수 있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거기서 나오지 않은 것까지 알 수 있는 건 아니었다. 미아가 복잡한 마음을 추스르는 동안 크리소르의 말이 이어졌다.

“하지만 아직이다. 좀 더 그놈 옆에 붙어 있도록. 일을 벌이는 건 좀 더 나중이니.”

“…….”

“그래도 네 덕분에 자금을 조달하기가 쉬웠다. 어린 것이 선견지명이 있더구나. 모든 일이 끝나면, 내 너를 친히 내 옆자리에 앉히마.”

친히 아량을 베풀었으니 기뻐하라는 듯이 말투였다. 미아는 영광스럽다는 듯이 고개를 숙이고는, 빠르게 앞으로의 일을 계산했다.

우선 하나만은 확실했다.

‘크리소르는 내가 반역을 막고 싶어 했다는 걸 몰라.’

아무래도 셀레스티얼 백작이 그렇게 둘러댄 모양이었다.

‘그야 돈을 내가 벌어오는데, 물주가 반역에 대해 모른다고 말하긴 좀 그랬겠지.’

분홍색 눈이 냉정하게 빛났다. 살아남을 수 있는 몇 가지 방법이 동시에 머릿속에 떠올랐다.

‘장단을 맞춰서 정보를 빼내 볼까?’

하지만 미아는 그 선택지를 바로 없앴다. 안 그래도 가까스로 살아남은 상황이다. 만약 대화 내용이 아딜로트에게 들어갔다간, 정말로 죽을 게 뻔했다.

“미아 셀레스티얼? 대답은?”

미아의 머리 위로 크리소르의 물음이 떨어졌다.

‘거리를 둬야 해.’

생각을 정리한 미아가 느리게 굽혔던 허리를 폈다.

“황태후 폐하, 저는…….”

“이러시면 안 됩니다, 후작 각하! 여기가 어딘 줄 알고 이러십니까!”

그 순간, 누군가의 외침이 궁을 울렸다. 미아의 말이 멈췄다. 모두가 뒤를 돌아보았다. 목소리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여기가 아무리 황태후 폐하의 궁이라도 황궁 레벤토르의 주인은 황제 폐하십니다.”

“아무리 그래도 황태후 폐하의 앞입니다!”

“그 궁에 황제 폐하의 소유물이 떨어져 있으니, 주워오는 것도 가신의 역할입니다.”

‘이 목소리는…….’

놀란 미아가 눈을 깜빡인 순간 문이 벌컥 열렸다.

“황태후 폐하를 뵙습니다.”

방 안으로 성큼성큼 들어선 남자는 페르디안 키토 후작이었다. 매서운 회색 눈이 방 안에 들어오자마자 미아를 찌릿 노려보았다.

‘왜? 왜 째려봐? 왜!?’

그는 깨갱 하고 움츠러드는 미아에게서 홱 몸을 돌려 황태후를 바라보았다.

“키토 후작. 무례하군.”

태연한 얼굴로 황태후가 입을 열었다. 페르디안을 찢어 죽이고 싶다는 눈이었다. 물론 페르디안은 눈도 까딱하지 않았다.

“무례를 용서하십시오. 금방 떠날 것입니다.”

그가 다시 미아에게 시선을 주었다.

“황제 폐하의 애완동물을 수거하러 왔을 뿐입니다.”

“……깩.”

크리소르가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애완동물?”

“거기 분홍 털 짐승 말입니다.”

“지, 짐승이라뇨…….”

크리소르의 고개가 미아에게 돌아갔다.

“아아.”

그리고 갑자기 아주 기특하다는 얼굴로 웃기 시작했다.

“그렇군. 내가 폐하가 아끼는 분을 붙잡고 있었군.”

그녀가 무슨 오해를 했는지 알 것 같다는 생각에 미아가 고개를 도리질했다.

‘아니야, 그거……. 총애 같은 거 안 받고 있다니까……?’

악녀처럼 아주 표독스럽고 사납게 웃던 크리소르는 다시 페르디안을 노려보았다.

“그럼 이제 꺼져 주시게.”

“그럴 생각입니다.”

그리고 페르디안은 다시 미아를 무시무시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따라오십시오.”

“네, 넵…….”

미아가 울상을 지었다.

그녀가 나가기 전 크리소르를 흘낏 보자, 크리소르가 입 모양으로 말했다.

나중에 연락하지.

‘아니야……! 나 네 편 아니라니까……!’

시작부터 뭔가가 단단히 잘못되었다.

* * *

페르디안은 거침없는 걸음걸이로 궁을 나섰다. 미아는 그의 등 뒤에서 흔들리는 검은 머리카락을 보며 걸었다.

‘페르디안 키토 후작. 아딜로트의 최측근이자, 소설 속에서는 세레니티를 남몰래 짝사랑한 조연…….’

외모로만 따지면 어디 가서 남자주인공을 해도 좋을 정도지만, 아쉽게도 이 소설의 남자주인공은 아딜로트다.

‘그래도 나중엔 아딜 옆에서 만족했으니까 괜찮으려나…….’

그때였다.

퍽.

“읍!”

갑자기 멈춘 페르디안의 등에 미아는 코를 박고 말았다. 검사답게 딱딱한 등에 부딪히자 고통이 엄청났다.

“……?”

미아가 코를 문지르며 페르디안을 올려다보았다. 독수리 같은 잿빛 눈이 미아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딜로트나 크리소르의 앞에서와 달리 노골적인 시선이었다.

미아의 몸이 굳었다.

‘아. 이거…….’

경멸이다.

“잘도 죽지 않고 살아 있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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