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화
“왜! 이렇게! 오바하냐! 하는 표정이잖아, 아무리 봐도! 엉엉!”
솜방망이 같은 주먹이 다시 베개를 팡팡 때렸다.
“아무리 레아 황비 이야기가 떠올랐다지만, 대체 이게 뭐야…….”
살아남고 싶었지만, 살아남아서 더 많은 흑역사를 만들고 싶다는 뜻은 아니었다. 그녀는 한참을 더 다리를 버둥거리며 괴로워하다, 베개를 내던지며 결심했다.
잊자.
잊어버리자.
아무 일도 없었던 거야!
“그래! 원래 애완동물은 좀 감수성 과잉이어도 돼! 귀여우니까!”
미아는 한순간에 낙담과 자기합리화를 끝마쳤다.
“그래서 이다음엔 분명…… 반란이 진압되고, 아딜의 악명이 더 높아질 차례였지?”
베개를 껴안고 누운 미아가 중얼거렸다.
‘그럼 원작과 달라지긴 하겠네.’
원래대로라면 셀레스티얼 백작가는 일가친척과 하인들까지 모조리 몰살당해야 했다. 크리소르 황태후는 그걸 이용해 더욱 강도 높은 흑색선전을 펼칠 예정이었다.
그런데 자신이 살아남았고, 범죄자를 제외하면 다른 하인들도 모두 무사했다. 그때 미아의 생각이 문득 셀레스티얼 백작가가 운영하던 사업들에 뻗쳤다.
‘광산이랑 주류, 농업 쪽이 제일 컸는데. 그나마 나라로 환수당했으니 다행인가?’
반역자의 재산이니 당연히 나라가 가져갔을 것이다. 말인즉, 미아가 일궈 온 것이 아딜로트의 도움이 되었다는 의미였다.
아예 아깝지 않은 건 아니었지만, 목숨값으론 싼 거였다. 게다가 돈은 다시 벌면 그만이다.
‘여차하면 상회 하나 더 만들어서…….’
그러자 미로미스 상회의 주인으로서 처리하던 어마어마한 양의 일거리가 떠올랐다. 미아는 그 계획을 고이 접었다.
“일하지 말자……. 개 팔자가 상팔자랬어…….”
아무튼, 조금 달라지긴 했어도 아딜로트와 크리소르의 적대 관계 자체는 변함이 없었다. 그렇다면 아딜로트의 악명은 계속 높아질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에 오해를 풀어 주는 게 여자주인공인 세레니티의 역할…….’
만인에게 사랑받는 것이야말로 여자주인공의 덕목.
당연히 세레니티도 악역 몇을 제외하면 모든 사람에게 사랑받았고, 실제로도 사랑받는 게 마땅할 정도로 착했다. 아마 지금도 구빈원에서 아이들을 돕고 있을 것이다.
‘그래도 렌이 등장하기까지는 아직 시간이 있지.’
거기까지 떠올린 미아가 흠칫했다.
‘근데 렌이 아딜이랑 사랑에 빠지면, 내가 애완동물로 있는 건 좀 그렇지 않나?’
물론 세레니티는 착하니 별말 안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으레 모든 남자주인공은 여자주인공에게만 집착하는 여주바라기인 법.
아딜로트가 어떻게 나올지는 알 수 없었다.
“최소한 야생에 방생해 주면 좋겠는데…….”
만약 방생이 아니라 안락사를 시키려고 들면 미아로서는 곤란해진다. 고민 끝에 미아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좋아. 나가자!”
일단은 황궁의 지리를 알아둘 필요가 있었다. 앞으로 많은 이벤트가 일어날 테니, 필요할 때 바로바로 찾아갈 수 있게끔 해야 했다. 어차피 아딜로트는 바쁘니 밤까지는 오지 않을 것이다.
게다가 아딜로트의 성격상, 정말로 미아가 가만히 있길 바랐다면 묶어 두는 쪽을 택했을 터였다.
‘말인즉 아딜도 어느 정도는 내 행동을 의도하고 있단 뜻이지.’
적인지, 아군인지 알아보기 위해.
속상하진 않았다. 황제라면 응당 그래야 하니까.
슬쩍 문을 열어 보니 황제궁이기 때문인지 복도에는 사람이 없었다. 주변을 뒤져 간편한 옷을 찾아낸 미아는 재빨리 옷을 갈아입고 황제의 침실을 나섰다.
타박타박.
미아는 분홍색 머리카락을 흔들며 복도를 걷기 시작했다. 자연스럽게 아딜로트가 떠올랐다. 그가 말했던 것을 돌이켜봤을 때, 아딜로트는 아마도 자신을 미끼로 도주한 셀레스티얼 백작을 잡고 싶은 모양이었다.
물론 미아는 회의적이었다.
‘그 우유부단하고 자기밖에 모르는 사람이 과연 날 보러 올까?’
애초에 출세에 목을 매느라 딸을 돌보지도 않았던 남자다. 그런 이가 딸이 잡혔다고 나타날 것 같진 않았다. 나타난다고 해도, 미아에게 이로운 결과가 나올 것 같지도 않았고.
‘어쨌든 나는 할 만큼 했어, 미아 셀레스티얼.’
남의 부친을 이 정도로 먹여 살려줬으면 됐다. 앉아서 먹기만 하면 되는 밥상을 걷어찬 건 셀레스티얼 백작이었다.
‘이제부턴 완전히 남이야.’
그렇다는 건, 어쨌든 미아가 미아 나름대로 살아남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뜻이었다.
“그럼 일단 아딜에게 신뢰를 줘야 한다는 건데…….”
때마침 복도가 끝나고 너른 레벤토르의 전경이 나타났다.
“어디부터 살펴보지?”
미아는 햇빛을 손으로 가리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때, 붉은 궁 너머로 반짝이는 것이 보였다. 둥글고 투명한 유리 지붕이었다.
‘황립 의료원은 약초밭을 길러야 해서 유리 정원이 딸려 있다고 했지.’
의료원이라면 미아도 나름 잘 알고 있는 편이다. 물론 글로.
여자주인공인 세레니티 듀레인의 주 활동 무대가 의료원이었기 때문이다.
세레니티는 성 밖에서 주로 의료 봉사를 했다. 그 때문에 황궁에 들어와서도 사람들을 돕길 바랐다. 자연히 그녀는 의료원에 자주 들르게 되었다. 황립 의료원의 의원들은 처음에는 세레니티를 경계했다.
황립 의료원의 의원들은 전부 크라우스 공작가에서 지원을 받아 의원이 된 자들이라, 기본적으로 황태후 친화적인 집단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자주인공 세레니티는 넓은 마음씨와 아름다운 외모로 결국 의원들을 자기편으로 만들었다.
‘그래서 독 먹고도 살고, 다쳐도 바로 치료받고…….’
재밌게 읽었던 소설의 배경을 직접 눈으로 본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리고 운 좋으면 나도 친해져서 정보를 빼 올 수 있을지도 모르지!’
미아는 사람들을 피해 무사히 의원들이 있는 곳에 도착했다. 때마침 안쪽에서 인기척이 들려왔다.
“실례합니다!”
미아가 짐짓 경쾌하게 문을 열었다. 의료원은 내부는 더러웠다. 여기저기 처리하다 만 일감들이 널려 있었다.
공기 중에서는 옅게 쓴 약초 냄새가 났다. 그리고 미아는 남자 한 명을 발견했다. 흰 가운을 입고 있었기 때문에, 미아는 그가 의원이라고 생각했다.
“아! 저기, 이상한 사람은 아니고요! 사실 근처에 들른 김에 상처약이나 얻어 갈까 하고…….”
미아가 대충 둘러대며 그에게 다가간 순간, 남자가 한 걸음 물러났다. 당황한 눈치였다.
‘내가 뭔가 방해했나?’
미아의 시선이 남자의 손으로 향했다. 약함과 약초 같은 것이 보였다.
“아! 일하시던 중이겠다! 죄송해요. 바쁘시면 약만…….”
그 순간 남자가 손에 들고 있던 것을 재빨리 원래대로 돌려놓았다.
‘보라 뿌리 엉겅퀴’
미아가 약함 앞의 명패를 확인한 것은 본능이었다.
“와아, 신기한 색의 엉겅퀴네요! 뿌리가 보라색인 거예요?”
“……!”
이렇다 할 특정이 없는 남자의 얼굴이 무섭게 굳었다. 그의 손이 스르르 품 안으로 들어가, 뭔가를 움켜쥐는 것이 보였다. 미아의 안에서 뭔가가 경고음을 울리기 시작했다.
아무도 없는 의료원.
몽타주를 그리래도 못 그릴 것 같은, 특징 없는 얼굴의 의원.
그녀가 천천히 뒷걸음질쳤다.
“음! 의료원분이…… 아니신가~?”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남자가 매서운 눈으로 미아를 주시하며 한 걸음 더 다가온 순간이었다.
“약을 빼먹어? 네가 그러고도 의원이야!?”
문밖 복도에서 어마어마한 고함이 들렸다.
“……칫.”
남자가 혀를 차는 게 들렸다. 그러고는 빠르게 유리 정원으로 사라져 버렸다.
‘뭐였지, 방금 그 느낌은?’
미아는 얼떨떨한 기분으로 바닥을 뒹굴고 있는 흰 가운을 집어 들었다. 그때, 문이 벌컥 열렸다.
“앗.”
“응?”
가장 먼저 녹색 단발머리에 안경을 쓴 여자가 가장 보였다. 그 뒤로 흰 가운을 입은 의원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미아가 가운을 팔목에 걸친 채 굳었다.
‘침입자로 오해하면 어떡하지?’
하지만 여자는 예상과 다른 방식으로 성을 냈다.
“너 이번에 온다던 신입이지! 여기서 대체 뭐해!?”
“엑.”
미아가 허둥지둥 손을 저었다.
“저기, 저는…….”
“급한데 여기서 대체 뭐 하는 거야! 빨리 따라와! 약상자 들고! 너희는 빼먹은 거 빨리 챙겨!”
“네?”
“어허. 손이 보인다! 우리 다 목 잘리면 네가 책임질 거야!?”
“자, 잠깐만요! 저는 여기 사람이 아니……!”
“신입은 선임의 말에 토 달지 않는다!”
목청부터 박력까지 그야말로 어마어마한 포스였다. 한술 더 떠 누군가 너무나 자연스럽게 미아에게 약상자를 건네주었다.
“그러니까 나 아닌데!”
“시끄럽다, 신입!”
아무리 외쳐도 아무도 미아의 말을 들어 주지 않았다. 의원들은 곧 하얗게 질린 얼굴로 줄줄이 사탕처럼 어디론가 걷기 시작했다. 꼭 죽으러 가는 사람들 같았다.
결국 미아는 무리의 맨 뒤에 붙어 가운을 입었다.
‘하아. 황궁인데 이렇게 허술해도 되는 거야?’
투덜거리는 동안 미아는 방금 만났던 수상한 남자에 대해서는 까맣게 잊고 말았다.
‘차라리 잘됐어. 의원들을 따라다니면서 정보를 모아 보자.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진료하는 것 같으니까.’
하지만 생각과 달리 의원들은 점차 황궁의 깊은 곳으로 향했다.
갈수록 미아는 불안감을 느꼈다. 황궁의 가장 깊은 곳에 누가 살고 있는지 알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미 돌아가긴 늦은 상황이었다.
할 수 있는 거라곤 그저 최대한 눈에 띄지 않게 몸을 낮추는 것뿐.
미아와 의원들이 몹시 고풍스럽고 오래된 궁에 다다랐다. 황제궁이나 중앙궁과는 분위기가 달랐다. 한낮인데도 어쩐지 어두웠고, 하인들의 얼굴도 밀랍인형 같았다.
“기다리고 계십니다.”
밀랍인형의 대장 같은 시녀가 조용히 의원들을 맞이했다.
“예!”
선두에 선 여자가 답했다. 미아는 이제 이 궁의 주인이 누구인지 확신했다.
‘그 여자. 이 소설의 악역.’
* * *
의원들이 안내를 받아 큰 방으로 들어갔다. 햇빛이 잘 드는 곳에, 여자 한 명이 앉아 있었다.
새까만 곱슬머리와 표독스러운 녹색 눈. 입가의 주름과 콧등의 매혹적인 점.
“늦었군.”
중저음의 무겁고 날카로운 목소리가 허공을 갈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