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결과적으로 아딜로트는 셀레스티얼 백작의 반란을 무사히 진압했다. 백작 본인은 잡지 못했지만, 그의 딸을 붙잡은 데다 영지를 점령했으니 이긴 것과 다름없었다.
듣기로는 셀레스티얼 백작은 짐 하나 챙기지 못하고 도망쳤다고 했다. 그 와중에도 금붙이 상자만은 악착같이 들고 튀었다고 하니, 미아의 심기가 뒤틀릴 만했다.
‘날 남겨둔 것도 일부러겠지. 자기 쫓지 말고 내 쪽으로 향하도록.’
사람이 그렇게까지 조목조목 재수 없을 수가.
‘그래. 그딴 자식한테 돈 벌어 주느니 차라리 남주 밑에서 기는 게 나을지도 몰라!’
그렇게 인질로서 황궁 레벤토르로 향하는 길에, 아딜로트는 미아를 자신의 말 옆에서 걷게 시켰다.
미아는 진지하게 물었다.
“네 발로요?”
“……두 발!”
아딜로트가 몹시 짜증스럽게 답했다.
‘아딜은 이족보행 하는 동물이 좋은가 봐!’
참으로 다행인 일이었다. 덕분에 미아는 제법 체면을 차리고서 아딜로트 옆에서 걸을 수 있었다.
‘그렇다곤 해도, 손이라도 묶을 줄 알았는데 그런 것도 없네?’
미아가 양손을 쥐락펴락하며 생각했다. 제까짓 게 도망가 봤자 뭘 하겠느냐는, 아딜로트의 매우 정확한 판단력이 엿보이는 대목이었다.
‘그리고 도망치더라도 쫓을 자신이 있는 거겠지. 셀레스티얼 백작에게라도 가 주면 더 좋을 테고.’
살아남은 데다 팔다리도 자유롭다니. 아딜로트는 동물 복지에 매우 신경 쓰는 타입임이 분명했다.
‘생각보다 다 잘될 것 같아!’
그러나 딱 하나 문제가 있었다.
“폐하, 반역자는 삼대를 멸하는 것이 법도입니다.”
그렇게 말한 사람은 페르디안 키토 후작이었다.
하나로 묶은 긴 흑발에 잿빛 눈.
고운 외모지만 전장에서는 무자비하기로 이름 높은 아딜로트의 최측근이었다.
‘그리고 나중에 렌을 좋아하게 되는 과묵형 섭남!’
그는 도주한 셀레스티얼 백작을 찾다가 돌아와, 미아를 보자마자 무시무시한 표정으로 검을 꺼냈다. 아딜로트가 그 앞을 막았고, 두 사람은 설전을 벌이기 시작했다.
“폐하의 안전을 위해서라도 당장 미아 셀레스티얼을 죽여야 합니다.”
“잠깐 보류했을 뿐이야.”
“전례가 없는 일입니다, 폐하.”
“내가 언제 전례 신경 쓰고 황제질 하던가?”
“태후파가 꼬투리를 잡을 빌미가 될 것입니다.”
“언젠 안 잡았다고. 그치들은 하루가 24시간인 것도 내 탓이라고 우길걸.”
“그렇다고는 하나 셀레스티얼의 반역 자금을 조달한 장본인입니다. 무슨 생각으로 폐하 곁에 붙었을지 모르는 일입니다.”
“여차하면 죽이면 그만이야.”
“그렇다면 지금 죽이셔도 되지 않겠습니까.”
페르디안이 그렇게 말하며 잿빛 눈을 미아에게 향했다.
“폐하께서 명령하신다면 지금이라도…….”
동시에 그의 손이 자연스럽게 검 손잡이로 향했다.
일순 미아는 온몸의 솜털이 곤두서는 것을 느꼈다. 맹렬한 살기였다.
“……히끅.”
그 순간, 미아는 저도 모르게 아딜로트의 옷자락을 잡았다.
아딜로트도 페르디안도 동시에 동작을 멈췄다.
“히끅……. 딸꾹!”
“…….”
그들의 눈에 하찮디하찮은 여자 한 명이 딸꾹질하는 모습이 보였다.
겁먹은 얼굴에, 발발 떨리는 손가락. 안색은 창백했고, 어깨는 동그랗게 말려 흠칫거렸다. 그녀는 그 상태로 움찔거리며 아딜로트에게 슬슬 몸을 기울이고 있었다.
묘하게도 그것은 어떤 의도가 있다기보다, 저도 모르게 나오는 행동 같았다. 그것을 깨달은 아딜로트와 페르디안의 표정이 묘해졌다.
“……?”
미아는 두 남자가 자신을 바라보며 침묵하자 불안하게 주변을 살폈다가, 작게 말했다.
“사, 살려 주세요……?”
아딜로트가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딱 한 마디 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지, 후작.”
“……예.”
페르디안은 즉각 자세를 바로 했다. 그리고 자리로 돌아가, 더는 미아를 쳐다보지도 않았다.
페르디안이 물러나자 곧 다시 행렬이 출발했다. 멀리서 보면 큰 용처럼 보이는 거대한 군대였다. 붉은 사자가 그려진 깃발이 바람에 따라 흔들렸고, 나팔수는 전진에 맞춰서 높은 음으로 황제의 승리를 퍼뜨렸다.
아딜로트는 그 행렬의 선두에 서서 무심하게 정면을 바라보았다. 그는 온 세상이 자기만을 위해 존재하는 것 같은 이 상황이 아주 익숙해 보였다.
태연한 그 옆모습을 바라보며 미아는 생각했다.
‘내가 생각을 잘못했어. 진작 돈 벌어서 아딜에게 갖다 바치고 한다리 꿰찼어야 했는데!’
살아남기만 하면 그만이라고 생각할 게 아니었다. 소설에서 최고의 생존 보증 수표는 주인공의 신임이 아니었던가.
‘이왕 이렇게 된 거, 최대한 아딜 옆에 붙어서 오래오래 살아남자!’
물론 애완동물 신분이어야겠지만, 그쯤은 아주 작고 사소한 문제였다.
게다가 생각해 보니 그렇게 나쁘게 들리지도 않았다. 원래 개팔자가 상팔자인 법이다.
‘무엇보다 동물은 일을 안 해도 합법이야! 그리고 소설에서도 사람은 죽이지만 동물은 안 죽이지!’
미아는 긍정적인 마음을 가지려 노력하며 양 주먹을 쥐었다.
‘좋아! 노력해서 반역자 누명을 벗고, 훌륭한 애완동물이 되는 거야!’
아딜로트가 들었으면 기함했을 다짐이 이루어진 순간이었다.
* * *
황궁 레벤토르.
그 안의 정복자의 방.
특별한 예식이 있을 때만 사용하는 넓고 긴 홀이었다.
‘소설에서는 렌이랑 아딜이 결혼할 때 쓰였고, 악당이 무너질 때 쓰였고…….’
글로만 읽었던 공간이 저 멀리 가까워지고 있었다. 천장까지 닿을 높은 문이 가까워지자 미아는 작게 심호흡했다. 아딜로트가 그런 미아를 돌아보았다.
“미아 셀레스티얼.”
“네?”
“너까지 들어갈 필요는 없는데.”
미아가 얼굴을 굳혔다.
‘무슨 말 하는 거야! 네가 날 살려 뒀다고 공표해야 괜한 애들이 날 안 건드리지!’
마음이 급해진 미아가 속닥였다.
“폐하. 원래 황제는 옆에 멋있는 동물 하나쯤은 데리고 다녀야 위엄이 산대요!”
“널 데리고 다닌다고 위엄이 생길 것 같지는 않은데.”
“그렇죠? 사실 전 귀여운 타입이니깐.”
뭐 이런 여자가 다 있어. 형언할 수 없는 시선을 보내는 아딜로트를 두고 미아는 새침하게 표정을 관리했다.
살아남기 위해서라면야 폭군을 헛소리로 혼미하게 만드는 일 따위 얼마든지 할 수 있었다.
다행히 아딜로트는 한숨을 쉬었을 뿐, 미아를 쫓아내지 않았다. 곧 정복자의 홀을 가리는 거대한 문이 열렸다. 그에 맞춰 문지기가 외쳤다.
“지고하신 오르퀘니나의 달, 아딜로트 겐첸 슈뢰더 황제 폐하 드십니다!”
방 안으로 들어서자, 샹들리에의 불빛과 붉은 휘장이 머리 위에 쏟아져 내렸다. 좀처럼 긴장하지 않는 미아도 약간은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긴 통로 가장자리로 내로라하는 높은 사람들이 전부 모여 있었다.
비싸 보이는 옷에 장신구. 깐깐하고 엄한 얼굴.
나이 지긋한 대신들과 표정 없는 기사들의 송곳 같은 시선이 일제히 미아에게 향했다.
‘괜찮아. 아딜로트가 나를 살려 뒀으니 아무도 내게 해코지 못 해.’
미아는 침을 꿀꺽 삼킨 뒤, 아딜로트의 몇 걸음 뒤에서 그를 따랐다.
아딜로트는 붉은 카펫을 지나, 태연히 황좌에 앉았다. 마치 원래부터 남들의 시선을 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처럼 자연스러운 동작이었다.
모두가 자리를 찾자, 대신 중 한 명이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폐하……?”
미아가 그쪽을 바라보았다.
희끗희끗한 머리에 갈색 눈. 왼쪽 눈을 가리는 외알 안경.
특징적인 외양 덕에 첫눈에 누군지 알 수 있었다.
‘그라스 후작이구나!’
그라스 후작은 원작에서 세레니티가 황궁에 들어왔을 때 사사건건 시비를 거는 역할이었다. 아딜로트의 정적인 크리소르 태후를 지지하는 자이기도 했다.
그는 몹시 심기가 불편한 얼굴이었다.
“왜.”
아딜로트의 대답에 그라스 후작이 목을 가다듬었다.
“그 영애, 아니, 그자는……. 반역자 셀레스티얼의 딸이 아닙니까?”
“맞아.”
“그런데 어찌 이곳에……? 설마 폐하께서 처형대로 향하는 길을 모르시진 않을 터인데.”
미아가 바로 얼굴을 찌푸렸다. 너 사람 많이 죽이지 않았냐는 노골적인 조롱이었다. 하지만 아딜로트는 태연하게 받아쳤다.
“후작이 죽을 때만큼은 꼭 떠올릴 텐데 걱정이 많군.”
그 많은 사람 안에 포함되고 싶은 거 아니면 조용히 하지? 의미를 알아챈 그라스 후작이 입가를 꿈틀댔다.
“……오르퀘니나의 미래를 책임지시는 폐하의 안위를 걱정하는 것은 신하로서 당연한 일이지요. 그래서 그자는 어떠한 연유로 이곳에 있는 것입니까?”
그 질문에 페르디안이 나섰다.
“미아 셀레스티얼은 아비의 죄를 대신 받기 위해 남았습니다. 또한 폐하께 충성을 맹세했습니다. 폐하께선 그를 어여삐 여겨 그녀를 살려 두기로 하셨습니다.”
페르디안의 설명을 들은 그라스 후작이 즉각 인상을 썼다.
“말도 안 되는 일입니다. 반역자는 삼대를 멸하는 것이 국법입니다. 또 반역을 저지를지도 모르는데 어떻게…….”
“그라스 후작. 지금 폐하의 뜻을 거스르겠다는 겁니까.”
“그런 뜻이 아니지 않소!”
“그럼 신하답게 폐하의 뒤를 따르기나 하십시오.”
파직.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맞붙었을 때였다.
“자. 두 분 모두 진정하시죠.”
누군가 손뼉을 짝 치며 앞으로 나섰다.
“오르퀘니나를 생각하는 두 분의 진심은 잘 전달되었습니다. 우선은 무사히 반란을 진압한 것만 축하하는 게 어떨까요?”
상아색의 로브에, 연한 갈색의 머리카락. 은테 안경 너머의 연둣빛 눈이 다정하게 휘어지는 것을 보며 미아는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섭남3!”
요아힘 키르히.
<장미 정원의 세레니티>에 나오는 세 번째 남자주인공이자 오르퀘니나의 재상이었다.
‘이놈이고 저놈이고 정말 잘생겼네.’
미아는 순수하게 감탄하며 요아힘과 페르디안, 그라스 후작의 삼파전을 관전했다.
“폐하께서 잘못된 길을 가실까 봐 걱정했을 뿐이오.”
“폐하는 늘 옳으십니다.”
“폐하라고 늘 옳지는 않습니다, 당연하지만.”
차례대로 그라스 후작, 페르디안, 요아힘이었다. 성격이 그대로 보이는 대화였다. 그리고 당연하지만, 대화의 승자는 웃는 얼굴의 재상이었다.
“그러니 당장은 기사들에게 휴식을 주는 것이 우선이라고 간언하는 것이 저희의 역할이겠지요. 축하의 자리에선 축하만 하는 것이 좋습니다.”
요아힘은 그렇게 말하며 은근히 빨리 끝내기를 바라는 듯한 기사들 쪽을 눈짓했다.
“……이 문제는 다음 회의에서 다시 이야기하는 게 좋겠소.”
결국, 그라스 후작이 혀를 차며 물러났다.
마침내 사위가 조용해졌다. 아딜로트는 심드렁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오늘따라 평소보다 조용하군.”
그는 낮게 웃고는 덧붙였다.
“이상하게 공들은 꼭 내가 허리에 뭘 달고 있으면 그렇더라고.”
그렇게 말하며 허리춤의 검집을 손가락으로 건드렸다. 귀족들이 시선을 피하는 게 보였다.
‘관계없는 나도 지금은 좀 무서운데, 오죽하겠어.’
게다가 막 군을 이끌고 온 탓에 아딜로트는 묵직한 갑옷 차림이었고, 그를 지지하는 기사들 역시도 그랬다. 그들이 허튼 소리하면 가만두지 않겠다는 듯이 눈을 부라리고 있는데, 함부로 말할 사람이 있을 리 없었다.
곧 냉소 짓는 아딜로트 앞에 페르디안이 한 걸음 나섰다.
“폐하. 저는 군을 이끌고 셀레스티얼 백작을 추적하겠습니다.”
“마음대로 해. 대신 너무 힘주진 말고.”
“예?”
“백작가의 금지옥엽이라지 않나. 언젠간 보러 오겠지.”
시큰둥한 대답에 페르디안의 잿빛 눈이 살짝 커졌다. 그는 곧 절도있게 고개를 숙였다.
“따르겠습니다.”
“그럼 오늘은 이걸로 끝. 뒤처리는 재상에게 맡기지.”
“걱정하지 마시고 오늘은 푹 쉬시지요, 폐하.”
그대로 아딜로트가 자리에서 일어났을 때였다.
“한데 이자는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페르디안이 물었다.
“대충 아무데나…….”
무심코 대답하던 아딜로트가 멈칫한 뒤 미아를 돌아보았다. 페르디안 역시 마찬가지였다.
덩달아 요아힘도 애매한 미소를 지었다.
“본래대로라면 국사범은 지하 감옥행이지만…….”
그가 잠시 말을 멈추고 미아를 지긋이 바라보았다.
“……?”
세 남자의 시선에 미아는 어쩔 줄을 몰라 눈만 깜박였다. 그러다 무슨 생각을 했는지, 눈싸움하듯 눈을 부릅떴다.
마치 ‘……지지 않겠어!’와 같은 얼굴이라, 세 남자의 입에서 동시에 묘한 헛웃음이 흘러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