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미아 셀레스티얼, 여자, 19세.
직업, 셀레스티얼 백작 영애.
외모, 분홍색 머리카락에 분홍색 눈.
특이사항 첫째, 로맨스 판타지 소설에 빙의한 지 1년 차.
특이사항 둘째, 방금 원작을 바꾸는 데에 실패함.
“이 정도면 바뀔 때 됐잖아! 왜! 대체 왜 안 바뀌는 건데!”
미아는 흥분을 가라앉히기 위해 숨을 고르며 성 너머를 바라보았다. 붉은 깃발을 든 제국군이 성으로 진격하고 있었다. 이제 곧 이 소설의 남자주인공이 나타나 미아를 죽이리라.
“빙의도 서러운데 내가 왜 죽기까지 해야 해!”
미아의 입에서 왈칵 분노가 터져 나왔다.
미아가 빙의한 소설은 <장미 정원의 세레니티>라는 소설이다.
여자주인공 세레니티가 남자주인공인 아딜로트의 마음을 치유하고 둘이 맺어지는, 평범한 로맨스 소설.
미아는 거기서 반역을 일으키는 셀레스티얼 백작의 딸에 빙의했다.
악녀 아님. 특별한 역할 없음.
그걸 깨달았을 때 얼마나 가슴을 쓸어내렸는지 모른다.
‘목표는 생존! 아무것도 안 하다가 뭔가를 하면 바뀌겠지!’
하지만 전부 허사였다. 반역은 일어났고, 셀레스티얼 백작은 자신을 두고 튀었다.
“이 천하에 둘도 없는 쌍놈 새끼!”
왜 하필 자신은 그 쌍놈 새끼의 딸에 빙의했을까. 죽음을 피하려고 그렇게나 일했는데, 왜 결국 이 지경이 되었을까.
미아는 아딜로트가 이끄는 군이 성으로 진입하는 것까지 본 뒤, 비틀거리며 걸음을 옮겼다.
백작의 집무실로 향할 생각이었다. 자신이 아딜로트라면, 가장 먼저 백작의 집무실로 찾아올 터였다.
아딜로트 겐첸 슈뢰더.
이름만 들어도 설렜던 남자주인공의 이름이 지금은 두렵기만 했다.
소설을 열심히 읽은 만큼, 그가 얼마나 무자비한지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아딜로트는 함부로 무고한 사람을 죽이는 폭군은 아니었지만, 황권에 반기를 드는 자에게는 가차 없었다.
‘십자가형, 화형, 생매장형, 교수형, 압살형…….’
아딜로트의 수많은 처형 방식을 떠올린 미아가 몸을 떨었다.
‘차라리 나도 하인들 따라 도망칠걸!’
하지만 아딜로트는 끈질긴 사냥꾼이다. 도망쳤다면 도망친 만큼 더 잔인하게 죽일 게 뻔했다. 누가 뭐래도 별명이 ‘예쁜 또라이’니까.
‘아니면 빙의하자마자 도망쳤어야 했는데!’
하지만 그러기엔 셀레스티얼 백작가가 너무 가난했다.
미아의 독립 자금 하나 대 주기 어려울 만큼.
게다가, 남의 아버지를 죽게 내버려 두기에는 원래의 미아에게 미안하기도 했다.
“아무리 그래도 자기 외동딸을 버리고 튈 정도의 보기 드문 개새끼일 줄은 미처 몰랐는데…….”
하지만 후회는 아무리 빨라도 늦은 법.
미아는 비틀거리며 백작의 집무실 책상 앞에 주저앉았다. 이제 미아의 소망은 단 하나밖에 남지 않았다.
‘적어도 안 아프게 죽었으면!’
집무실에서 기다린 지 얼마 안 되어 문이 열렸다. 미아는 긴장한 상태로 열리는 문을 바라보았다.
곧, 키가 큰 남자가 붉은 망토를 휘날리며 방에 들어섰다.
남자? 아니다. 빛이 걸어 들어왔다.
그 얼굴을 본 순간, 미아의 머릿속은 공포도 잊고 새하얘졌다.
‘개잘생겼…….’
비 오는 날의 안개 같은 은발.
흐트러진 머리카락 사이로 루비를 연상시키는 새빨간 눈동자가 빛났다. 눈꼬리가 올라가 서늘한 인상에, 만사에 무심해 보이는 표정이었다.
그가 바로 오르퀘니나의 젊은 황제이자, 피에 미친 폭군이라 불리는 아딜로트 겐첸 슈뢰더였다.
<장미 정원의 세레니티>의 남자주인공 말이다.
그 뒤로 수많은 기사가 줄줄이 들어와 방을 살피기 시작했으나, 아딜로트가 옆에 있으니 잘못 자란 감자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와, 저 얼굴로 세상 사는 건 어떤 기분…….’
감탄하던 미아의 눈에 아딜로트의 피 묻은 검이 보였다.
미아가 눈을 감았다. 저 얼굴로 세상을 살아서 예쁜 또라이가 되셨구나.
한편, 방에 들어선 아딜로트는 미아를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그저 방 한가운데 서서 주변을 살피고 있을 뿐이었다.
“……?”
그러곤 고개를 갸웃했다. 곧 수색을 마친 기사들이 아딜로트에게 다가와 보고했다.
“폐하, 아무것도 없습니다.”
“셀레스티얼은 이미 도망친 듯합니다.”
아딜로트의 미간이 좁아졌다. 그는 다시 한번 고개를 갸웃했다가, 이윽고 미아를 돌아보았다.
“미아 셀레스티얼.”
“네……에!?”
난데없이 이름이 불린 미아가 급히 대답했다. 미남은 목소리도 끝내준다는 생각을 하며.
“너 혼자야?”
아딜로트는 담담하게 물었다.
“……네! 저 혼자예요…….”
“왜?”
“하, 하인들한테는 다 도망치라고 해서…….”
“왜? 도망치면 내가 못 죽일 것 같아?”
하하, 미친놈…….
미아가 몸의 떨림을 애써 억누르며 드레스 자락을 부여잡았다.
“폐, 폐하……. 부탁드릴 게 있어요.”
아딜로트의 눈에 이채가 서렸다.
“부탁?”
“네……. 제, 제가 대표로 죽을 테니까…… 절 보셔서 하인들은 봐주시면 안 될까요?”
아딜로트가 대답 없이 눈을 깜빡였다. 미아는 그의 심기를 불편하게 하지 않기 위해 좀 더 목소리를 낮췄다.
“그 사람들은 정말 아무 잘못 없어요. 바, 반역 같은 것도 모르고 있고……. 무, 물론 저도 몰랐지만, 저는 셀레스티얼이니깐…….”
“그래서 너 혼자 죽겠다고 남들은 다 내보냈다?”
“말하자면 그런데…….”
“그리고 정말로 아무도 곁에 안 남았고.”
“…….”
“인복이 없는 건가, 아니면 인망이 없는 건가?”
무심한 듯 예리한 중얼거림에, 미아는 눈물이 터지려는 것을 꾹 참았다. 서러움이 득달같이 몰려들었다.
<장미 정원의 세레니티>에 빙의한 지 1년.
살아남기 위해 뼈 빠지게 일하기 바빴다. 그러니만큼 자기편을 만들거나, 식솔들의 신뢰를 얻진 못했다.
그건 원래 몸의 주인이었던 ‘미아 셀레스티얼’도 마찬가지였던 모양이다. 미아가 ‘나 혼자 남겠다’고 했을 때, 아무도 빈말로도 곁에 있어 주겠다 하지 않은 것을 보면.
죽음의 순간에 혼자 남겨지는 감정은 생각보다 비참했다. 그래도 미아는 그들을 이해했다. 그녀 역시 살고 싶었으니까.
미아가 애써 웃는 척 했다.
“그치만 한 명이 죽어서 다른 사람들이 살면, 그게 나으니까…….”
그 말에 느슨하던 아딜로트의 시선이 순식간에 예리해졌다.
“난 그렇게 생각 안 하는데.”
그의 입술 사이로 북풍처럼 싸늘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미아가 뒤늦게 움찔했다.
‘그러고 보니 아딜로트의 엄마가 아딜이랑 사람들을 구하려고 희생했었지.’
아딜로트의 어머니는 레아 황비.
그녀는 옆 나라 젠타리아의 귀족이었다. 그러다 황후의 이간질로 오르퀘니나와 젠타리아 사이에 전쟁이 벌어졌다.
젠타리아는 패배했고, 당시의 황제는 모든 젠타리아인을 죽이려 들었다. 그 앞을 레아 황비가 가로막았다.
‘폐하. 제가 모두를 대신해 죽겠습니다. 백성들만은 살려 주세요.’
황제는 그것을 들어주었다. 그리고 정말로 자신의 아내를 사형대에 올렸다. 아딜로트는 자기 엄마가 사형대에 오르는 것을 뜬눈으로 지켜봐야만 했다.
당시의 아딜로트는 황태자도 아니었고, 외국인 황비가 낳은 황자에 불과했기 때문에, 그걸 막을 힘이 없었다.
그러나 운명의 장난으로 황제는 병사. 황태자는 사고사.
아딜로트 겐첸 슈뢰더는 그렇게 하루아침에 오르퀘니나의 황제가 되었다.
‘물론 그래도 자기가 힘이 없어서, 그런 주제에 어머니를 희생해 살아남았다는 트라우마는 계속되지만…….’
그런 아딜로트의 트라우마는 나중에 등장한 여자주인공 세레니티가 치유해 준다.
‘그 렌을 본받아도 모자랄 판에 외려 트라우마를 자극하다니…….’
진짜 끝이었다.
결국, 참았던 흐느낌이 터져 나왔다.
“흐, 흐윽……, 백작 개새끼…….”
난데없는 욕설에 모두가 멈칫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미아는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흘리며 울기 시작했다.
“썩을 놈……. 내 돈 이상한 데나 꼬라박고 내가 진짜 서러워서…….”
“…….”
“흐어엉.”
체면도 자존심도 없는 울음이었다. 여자가 그런 식으로 우는 걸 처음 보는 아딜로트는 멍하니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기실 그는 조금 당황하고 있었다.
이유는, 소문과 너무 달라서.
6개월 전부터 사교계엔 소문 하나가 떠돌았다. 셀레스티얼 백작가에 천재적인 사업가 한 명이 들어왔다는 소문이었다.
사실 여부는 불투명했으나, 셀레스티얼 백작가가 갑자기 돈을 갈퀴로 쓸어 담고 있는 건 사실이었다. 귀족들은 소문의 책사에 대해 궁금해하기 시작했지만, 누구도 그의 정체를 알지 못했다.
그러다 황실의 비밀정보부에 실마리 하나가 잡혔다. 소문의 책사가 사실은 셀레스티얼 백작의 딸이라는 정보였다.
망해가던 셀레스티얼 백작가를 빚더미에서 일으킨 수완가.
샛별처럼 등장해 시장경제를 뒤집어엎은 미로미스 상회의 숨은 주인.
손대는 사업마다 성공시킨다는 전설의…….
“엉엉!”
“…….”
아딜로트는 한숨을 쉰 뒤, 방금 자기 아버지를 개새끼로 만든 여자에게 물었다.
“미로미스 상회를 세운 미아 셀레스티얼, 맞나?”
미아가 울던 것을 멈추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러더니 몇 초 뒤, 다시 울음을 터뜨렸다.
“으앙앙앙! 죽기 전에 원산지 확인이나 당하고! 엉엉!”
……아니야.
아딜로트가 빈손으로 머리카락을 쓸어넘겼다.
“에트루리나에 숨은 광맥을 찾아내 개발하고, 미로미스 상회에서 쓰는 신형 전로를 개발한 게 네가 맞는지 말해.”
“으앙앙앙! 흐어어엉!”
“대답에 따라 살려 줄 수도 있어.”
“제가 맞고 전부 제가 했어요, 폐하.”
마치 벚꽃 같은, 연한 분홍색의 머리카락을 가진 여자가 울다 말고 공손히 말했다. 순하고 맹한 얼굴과 달리 의외로 악착같은 근성이 느껴지는 대답이었다.
아딜로트가 헛웃음을 터뜨렸지만, 그가 자신을 어떻게 보든 미아는 알 바 아니었다.
미아의 목표는 언제나 생존이었으니까.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낫댔어!’
미아는 아딜로트의 눈치를 보며 잽싸게 머리를 굴렸다. 아무래도 아딜로트는 자신을 죽이는 걸 망설이는 것 같았다.
“폐하, 혹시 전로의 구조가 궁금하신 거라면 제가…….”
“기술자를 잡았으니 그건 됐어.”
“……개발자는 저니까 제가 더 잘 알 텐데요!”
“그렇다고 해도 반역자는 못 믿지.”
“그, 그럼 앞으로 유행할 사업이라도 귀띔을……!”
“황제가 유행을 선도해서 뭐하게.”
“……폐하가 나를 낚았어…….”
미아의 허망한 중얼거림에 아딜로트가 다시 한번 실소를 흘렸다. 그는 한참을 말이 없다가 입을 열었다.
“미아 셀레스티얼. 내가 널 왜 살려야 하는지 네가 말해 봐.”
“……!”
미아가 고개를 쳐들었다. 아딜로트는 좀처럼 빈말을 하지 않는다.
‘그런 그가 이렇게까지 말한다는 건…….’
기회였다. 반드시 잡아야 하는 기회.
“사, 살려 주시면 반드시 은혜를 갚을게요!”
“어떻게.”
“뭐든 할게요! 아무거나! 시키는 대로 다!”
그 대답에 아딜로트는 물끄러미 미아를 바라보았다. 묘한 시선이었다.
“내가 뭘 시킬 줄 알고 겁도 없이?”
“뭐 시키실 건데요?”
“…….”
미아가 순진하게 물었고, 아딜로트는 대답할 말을 찾지 못했다. 그의 침묵을 어찌 해석했는지, 갑자기 뭔가를 깨달은 듯한 미아는 몹시 비장한 표정을 지었다.
“폐하……. 전 정말 아무거나 괜찮아요! 살려만 주신다면, 애완동물 같은 거여도 좋아요!”
상상 이상으로 핀트가 나간 헛소리에 아딜로트가 짧게 신음을 흘렸다. 미아는 그것을 놓치지 않았다. 그녀의 표정이 밝아졌다.
“그게 나으세요!? 그게 좋으시구나! 제가 사실 거기에 소질이 있는데!”
“애완동물에.”
“애완동물에!”
아딜로트는 할 말을 잃었다. 그의 미진한 반응에 미아는 다급해졌다.
“게, 게다가 말도 할 줄 알고 재무제표도 볼 줄 알아요!”
“…….”
“……대소변도 잘 가려요!”
아딜로트가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 쳤다. 어쩐지 백작이 꼭꼭 숨겨 놓더라니, 미친 여자였어…….
그가 한 걸음 물러나자 미아의 눈에는 당장 눈물이 고였다.
“피, 필요 없으세요……?”
“당연히 없지.”
미아는 절망했다.
“그, 그렇지만 저는 제 몸밖에 드릴 게 없는데……!”
“…….”
“가진 건 몸뿐인데……!”
“…….”
“제, 제 몸이 싫으세요!?”
“살려 줄 테니까 오해 살 발언은 그만두지?”
결국, 아딜로트가 충동적으로 대답했다.
“정말요!?”
그는 곧바로 후회했으나, 이미 미아가 눈을 반짝인 뒤였다. 어쩐지 말려든 기분이었다.
“하…….”
아딜로트는 한숨을 쉬고는 검을 집어넣었다. 좀 돈 것 같긴 하지만 머리는 비상한 모양이니, 살려 두면 어딘가는 쓸데가 있을 터였다.
“……당분간은 두고 보지.”
“감사해요, 폐하! 저 힘낼게요!”
미아가 양 주먹을 쥐었다.
“애완동물로서!”
그러니까 그거 아니라고.
아딜로트가 마른세수했다. 벌써부터 이 여자를 살려 두는 게 옳은 일인지 의구심이 생기기 시작했다.
어쩐지 한숨이 많아질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그런 아딜로트를 뒤로하고, 잔뜩 신난 미아는 그저 신에게 감사했다.
‘드디어! 이 거지 같은 소설에서 살아남을 수 있어!’
미아 셀레스티얼, 여자, 19세.
‘폭군의 애완동물’이라는 새 직업이 생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