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7. 무수히 이어질 행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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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7. 무수히 이어질 행복
2022.05.29.
굉장히 중요한 이야기가 나올 것 같은 분위기에 나는 나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하나, 결국 케일럽의 입에서 나온 말은.
“……아니, 하하하. 아무것도 아니에요.”
“케일럽, 괜찮아? 정말 아무것도 아닌 거 맞니?”
내가 걱정스레 물었다.
아무것도 아니라는 말을 믿기에는, 케일럽의 얼굴은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그의 얼굴에는 너무나 짙은 슬픔이 어려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케일럽은 한사코 고개를 저었다.
“저 정말 괜찮아요. 생각하시는 그런 문제 아니에요.”
“그래?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만…….”
케일럽에게 어떤 사정이 있건 간에 지금 상황에서 더 캐묻기는 어려울 것이다.
‘케일럽에게도 자신의 생각과 사생활이 있겠지. 나중에 언젠가라도 들을 수 있다면 좋겠네.’
그런 생각을 하며 나는 그의 손을 놓았다.
“출발하실 때가 되었습니다, 케일럽 님.”
마탑에서 보내준 수행원이 재촉했다. 결국 케일럽은 아쉬운 발걸음을 뗄 수밖에 없었다.
마지막 인사를 마치고, 케일럽은 등을 돌렸다.
“……아.”
그런데 열 걸음도 채 걷지 못하고 케일럽은 다시 이쪽을 돌아보았다.
“황후 폐하.”
“응, 케일럽.”
“저는 폐하께서 행복하시길 진심으로 바라요. 세상 그 누구보다도요.”
케일럽은 웃었다.
“그리고 충분히 그럴 자격이 있으신 분이에요.”
그 말을 하며 웃는 그의 얼굴에는 한 점의 티끌도 없었다.
나는 그가 한 치의 거짓도 없는 진심을 말하고 있음을 알았다.
나는 그를 마주보고 웃었다.
“그래, 케일럽. 너도 마찬가지야.”
그렇게 케일럽은 마탑으로 떠났다.
떠나는 그의 뒷모습은 어쩐지 홀가분해 보이기까지 했다.
***
그 이후로도 숨가쁘게 바쁜 나날이 이어졌다.
가장 소중한 친구들 중 두 명이 떠났다는 사실은 때때로 내 마음을 허전하게 만들었지만, 그래도 괜찮았다.
여전히 나의 주변에는 소중한 존재들이 많이 있어서 항상 나의 힘이 되어주었다.
……그리고 그 역시도.
“휴! 이제야 좀 살겠네.”
나이트웨어로 갈아입은 나는 침대에 드러누웠다.
바쁜 하루 뒤 만끽하는 푹신한 거위 털 이불이 살을 감싸는 기분은 언제 느껴도 짜릿했다.
그러고 있자니, 깜빡이는 시야에 누군가의 얼굴이 가득 들어왔다.
“역시 집만 한 데가 또 없지?”
알렉산드로스가 잘생긴 입꼬리를 끌어올려 웃었다.
그는 요즘 중앙궁, 특히 우리가 함께 쓰는 이 침실을 ‘집’이라고 부르고는 했다.
언어의 힘은 엄청나다더니. 이전에는 그저 잠을 자는 곳이었던 침실이 그가 그런 말을 쓰기 시작한 뒤로는 어쩐지 더욱 아늑하고 따스하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아니면 그냥 그가 있기 때문인지도 모르지.’
그렇게 생각하자 저절로 입가에 미소가 그려졌다.
“많이 피곤하겠지? 발을 주물러 줄 테니 이리 내밀어봐.”
“어머, 황제의 발 마사지라니 호사스럽네요.”
그렇게 말하면서도 나는 냉큼 그에게 발을 내밀었다.
알렉산드로스는 나를 향해 눈웃음쳤다. 무척이나 매혹적이면서도 다정한 애정으로 가득한 눈빛이었다.
“이 나라, 아니 전 대륙을 통틀어 오직 그대만이 누릴 수 있는 사치야.”
그의 커다란 손이 내 발을 조심스레 주무르기 시작했다.
사실 그에게 마사지를 받는 것이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다. 그리고 그때 알게 된 것은 그가 마사지를 무척 잘한다는 것이었다.
그는 대단히 힘이 셌지만, 나를 마사지할 때에는 너무 약하지도 세지도 않게 완벽한 힘 조절을 했다.
게다가 어쩜 그리 정확한 혈을 짚어 누르는지. 그의 손이 닿을 때마다 나는 그 부위의 근육이 녹아드는 것만 같았다.
“아, 정말 시원해요.”
“그렇게 고생을 했으니 시원할 만도 하지.”
“어쩜 이렇게 마사지도 잘하세요?”
“나는 원래 못하는 게 없어.”
알렉산드로스가 능청스럽게 말했으나 나는 알고 있었다.
그가 나를 위해 몰래 마사지를 공부했다는 것을.
나도 비서관에게 귀띔을 들은 뒤에야 알게 된 것이었는데…….
그 사실을 알게 됐을 때 나는 엄청 놀랐다. 당연한 일이었다.
황제가 마사지를 배우다니! 대륙의 주인과 마사지라니! 세상에 이렇게나 안 어울리는 조합이 또 있을까?
‘하지만 그는 나를 위해 300페이지짜리 보고서를 써가며 데이트에 대해 연구한 적도 있던 사람이었지.’
나는 베개에 몸을 뉘인 채 그의 옆얼굴을 바라보았다.
그의 잘생긴 옆얼굴은 평소답지 않게 진지해보였다. 아마 실수해서 내 발을 아프게 하기라도 할까 봐 꽤나 집중하고 있으리라.
그는 재능도 뛰어났으나 또 노력파이기도 했다.
‘폭군’이라는 이명을 가진 주제에 늘 공무로 바쁘게 사는 것 하며, 그러면서도 항상 더 발전하기 위한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나를 기쁘게 하기 위한 공부도 끝이 없는 것 같아보였다.
‘어쩜 이렇게 사랑스러운 사람이 있을 수 있을까?’
그를 보면 가슴속이 항상 몽글몽글해졌다. 세상에서 가장 따스하고 달콤한 기분.
그리고…….
‘나를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하는 그에게, 나도 무엇이든 하고 싶어. 그를 기쁘게 하기 위해서라면 뭐든…….’
그런 마음은 점점 커져만 갔다.
얼마 전 그에게 이렇게 물어본 적이 있었다. 한 방을 쓰게 된 직후의 일이었다.
“혹시 당신은…… 저와 당신 사이의 아이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세요?”
내 질문이 의외였는지 알렉산드로스는 눈을 조금 크게 떴다. 나는 부끄러움에 괜히 발가락을 꼼지락거렸다.
“아이는 갑자기 왜? 혹시 로버트가 군소리라도 한 것은 아니겠지?”
“전혀 아니에요. 그냥……. 황족에게 있어서 후손의 생산은 아주 중요한 문제잖아요. 게다가 우리는 부부고, 같은 방을 쓰고 있기까지 한데, 계속 이렇게 지내도 되나 싶어서…….”
황족이고, 부부이며, 같은 침대를 쓰고 있기까지 한데 손만 잡고 자는 것은 분명 그의 배려였다.
그것이 신경 쓰여 물었던 것인데, 알렉산드로스는 의외의 대답을 했다.
“그런 건 신경쓰지 마, 로벨리아.”
그는 나의 손을 잡았다. 검을 쥐는 곳에 굳은살이 박힌, 크고 따뜻한 손이 내 손을 부드럽게 감싸쥐었다.
“이 문제에서 중요한 건 의무니 뭐니 하는 게 아니야. 오로지 그대의 마음뿐이지.”
“알렉산드로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물론 그대와의 아이를 가지고 싶어. 아이는 우리의 결합을 더욱 단단히 만들어 줄 테니까.”
그가 진중한 얼굴로 말했다.
“하지만 그대의 마음이 준비되기 전에는, 그대는 그 어떤 것도 신경쓸 필요 없어. 부디 그대의 마음만을 생각해. 그대가 진정으로 원하기 전까지는. 나는 그대에게 어떠한 부담도 주고 싶지 않으니까…….”
그를 사랑하는 것에 어떠한 의심도 없음에도 불구하고.
아이를 갖는다는 것, 그리고 그와의 밤을 보낸다는 것은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가 내게 모든 것을 바쳤듯, 나도 그에게 뭐든 해주고 싶은 마음은 진심이야. 이만하면 충분히 마음의 준비가 된 것 같아.’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와 좀 더 가까이 있고 싶어. 그의 더욱 깊은 곳을 알고 싶어. 그리고 그렇게 해서…… 그와 나의 사랑의 결실을 가질 수 있다면 그건 더할 나위 없는 기쁨이겠지.’
그렇게 생각한 나는 큰 결심을 한 채 그의 이름을 불렀다.
“알렉산드로스.”
최대한 아무렇지도 않게 부르려고 했는데, 내 목소리는 분명하게 떨리고 있었다.
나의 목소리가 심상치 않음을 눈치챈 것일까, 알렉산드로스가 이쪽을 향해 의아한 눈을 돌렸다.
“응?”
“저…… 그게. 으, 으음…….”
그렇게나 열심히 준비했는데. 꽤나 분위기 있고 멋진 멘트를 생각하고 여러 번 시뮬레이션하기까지 했는데, 실전 앞에서 그 모든 것은 소용이 없었다.
내 얼굴은 삽시간에 머리카락과 같은 색이 되어버렸다.
“무슨 일이지?”
알렉산드로스가 다시 물었다.
내 머릿속은 온통 새하얘졌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고, 표백된 머릿속에서 준비해둔 멘트는 단 한 마디도 남지 않고 날아가 버렸다.
‘이건…… 그때와 똑같잖아!’
그랬다. 그에게 내 마음을 전할 때.
그때도 나는 그에게 최고로 멋진 고백을 하려다가 그만, 강렬한 감정에 휩싸여 모든 것을 잊어버리고 말았다.
결국 내가 그에게 내 마음을 전한 때는 가장 낭만적이지 못한 상황에서, 가장 낭만적이지 못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래도, 그 고백이 소용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나는 기억하고 있었다. 그 멋도 없고 낭만도 없는 고백이 얼마나 절절한 진심을 담고 있었는지.
그 말에 그는 어떤 반응을 보였으며, 우리의 마음이 어떻게 하나로 이어졌는지.
‘그래, 역시 중요한 건 연습이 아니라 진심이야.’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준비해뒀던 멘트 같은 건 잊어버려. 알렉산드로스에게 내 진심을 보여주자!’
그렇게 생각한 나는 눈을 질끈 감고…….
그의 입술을 내 입술로 덮쳤다.
“……!”
내가 먼저 키스를 한 일이 처음은 아니었기 때문일까.
알렉산드로스는 처음에는 조금 놀라는 듯했으나 곧 자신의 주도권을 찾았다.
‘하지만 이게 끝이 아닌걸. 이번에는 정말 놀라겠지.’
입술과 입술이 겹쳐지고 뜨거운 숨이 섞일 때.
나는 그의 가슴팍에 손을 올리고 지긋이 눌렀다.
어 하는 사이에, 나는 그의 몸 위에 올라탄 모습이 되었다.
알렉산드로스는 꽤나 놀란 듯했다.
내가 이렇게나 도발적으로 군 건 정말로 처음이었으니까!
“로벨리아?”
그는 입술을 떼고 믿을 수 없다는 듯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나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그저 그의 위에 올라탄 채 시선을 피할 뿐이었다.
“이건, 그…….”
“…….”
“……이쯤 되면 당신도 아실 거라고 믿어요. 그러니까…….”
그때의 나는 모르고 있었다.
내 숨결이 그의 목덜미에 와닿는 것을.
커튼처럼 흘러내린 머리카락이 그의 뺨과 목을 간지럽히는 것을.
그의 가슴팍 위에 있는 손이 부끄러움에 연신 꼼질거리고 있었다는 사실을.
“그러니까…… 제 의도를.”
그가 대체 뭐라고 반응을 할까? 예상할 수가 없었다.
어쩌면 웃음을 터뜨릴지도 모른다. 어울리지도 않는 내 도발적인 행동에 배를 잡고 농짓거리를 던질지도 모른다.
하지만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어떤 것이라도 나는 도저히 견뎌낼 수 없을 것 같았으니까.
내 얼굴은 그야말로 펑 하고 터지기 직전이었다.
나는 그의 시선을 피하기 위해 눈을 감고 다시 한번 입을 맞추었다. 그의 입을 막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꺄악!”
예상치 못하게 나의 몸은 크게 기울어졌다.
어 하는 사이에, 그의 몸 위에 올라가 있던 나는 오히려 침대에 누운 모습이 되고 말았다.
그리고 그는…….
“아, 알렉산드로스?”
나는 눈이 휘둥그레져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는 내 몸 위에 올라타 있었다.
그와 눈이 마주치는 순간 나는 헉 하고 숨을 들이켰다.
그의 두 눈.
그 두 개의 금빛 눈동자는 그 어느 때보다도 빛나고 있었다.
형형한 두 눈은 마치 굶주린 맹수와 같았다.
여유라곤 찾아볼 수 없고, 뜨겁고 깊은 욕망으로 일렁이고 있었다.
그리고 그 눈빛은 너무나도 아름답고 또 색정적이었다.
“당연히…… 알지.”
그가 나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내가 어떻게 모를 수 있겠어.”
그의 긴 손가락이 내 뺨을 훑어내렸다.
“지금 그대가 내게 물어야 할 것은 그런 게 아니야.”
마치 맹수처럼 그르렁거리는 목소리에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그는 나의 귓가에 입술을 가까이 대고 속삭였다.
“그대가 내게 물어야 할 건……. 언제쯤 그대를 재우겠느냐, 겠지.”
그 나직하고 야릇한 목소리.
귀를 통해 척추를 따라 훑어 내리며 전신을 때리는 그 음성에 나는 도무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그제서야 나는 깨달았다.
물론 나는 그가 오래, 많이 참았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내가 생각하는 그 정도가 아니었다.
그는 나의 예상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정말이지 아득하도록 깊게, 그 깊이를 알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한 욕망을 지금껏 숨겨오고 있었던 것이다.
그 욕망의 깊이를 마주하자 나도 이성을 유지하기 어려워졌다.
나의 온몸이, 세포 하나하나까지도 그에게 매혹된 듯한 기분을 느끼며, 나는 작게 웃었다.
“그래서 언제쯤 저를 재우실 건가요?”
나는 그의 목에 팔을 감으며 속삭였다.
알렉산드로스는 코와 코가 스칠 정도로 가까운 거리에서 깊은 눈으로 나를 내려다보며, 대답했다.
“그대가 울며 애원해도 재우지 않을 거야.”
“그거 기대되는데요.”
“그 말, 분명히 후회하게 될 거야.”
그는 내 손바닥에 입술을 누르며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나 역시 비직비직 올라오는 입가를 억누를 수가 없었다.
다시 그와 나의 입술이 겹치고.
나는 눈을 감았다.
‘이 순간이 끝나지 않기를 바라지는 않을 거야.’
나는 생각했다.
‘왜냐하면 우린 앞으로 무수히 많은 밤을 보낼 거고, 그건 항상 행복한 일일 테니까. 계속,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