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4. 노먼의 아이
(144/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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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4. 노먼의 아이
2022.05.19.
갑작스레 끌어안겨진 그의 품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뜨거웠다.
그리고 내게 깊이 파고드는 그의 숨결. 그의 숨은 뜨거웠고 또 조급해서, 마치 끌어올리듯 내 몸을 달아오르게 만들었다.
“으음, 응…….”
나는 달콤한 한숨을 내쉬며 그의 가슴팍에 손을 대어 기댔다.
단단한 가슴팍 위로 그의 심장 박동이 그대로 전해졌다. 쿵, 쿵, 쿵, 쿵, 빠르고 경쾌한 울림이 느껴졌다.
그는 대체 언제 이렇게까지 달아오른 것일까. 언제부터 이렇게 빠르게 고동치는 심장을 숨기고 있었던 것일까.
내가 알 수 있는 것은 단 하나. 그가 이렇게 된 것이 나 때문이라는 것.
그의 그 빠르게 고동치는 심장이 향하는 사람은 오로지 나뿐이라는 것이었다.
‘그는 나를 정말로 사랑하고 있구나.’
새삼스러운 깨달음이 가슴 속에 선명한 파문을 남겼다.
‘그리고…… 나도 그를 진심으로 사랑해.’
그는 나를 사랑하고, 나도 그를 사랑한다는 것.
그 순간만큼은, 이 세상에서 중요한 것이라고는 오로지 그 사실밖에 없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그 작고도 분명한 사실에 나는 눈물이 나도록 행복했다.
“하아, 으응. 흐으응…….”
나는 팔을 뻗어 그의 목에 필사적으로 매달렸다.
그의 체온이 내 전신의 감각을 채우고 있었지만 그것만으로도 부족했다. 그를 더, 더 느끼고 싶었다. 그의 존재로 나의 모든 것을 채우고 싶었다.
“……!”
내 예상 밖의 행동에 그는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 내가 이렇게 적극적으로 나서는 일은 드무니까 그런 것이겠지.
그의 금빛 눈동자에 한층 짙은 욕망이 일렁이는 것을 본 나는 그가 더 조급하게 행동할 것이라고 예상했다.
하지만 내 예상은 틀렸다.
큰 손이 조심스럽게 나의 등을 감쌌다. 또 다른 손은 내 뒷머리를 감싸 안았다.
그의 몸에 기대는 대신 목에 매달려 불안정해진 나의 몸을 안정적으로 보호하기 위한 행동이리라.
그러는 동안에도 그의 숨소리는 한결 거칠어져 있어, 그가 매우 강력한 인내심을 발휘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이 관계 속에서 혹여 내가 상처받지 않도록 그는 부단한 노력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고 보면, 침대를 함께 쓰면서도 내 마음이 완전히 준비되기 전까지는 기다려주겠다고 한 사람이 바로 그였지.’
나를 이토록 신경 써주고 배려해주는 사람이 또 있을까?
하다못해 나조차도 나에게 이러한 다정함은 베풀 수 없을 것 같았다.
‘사랑스럽디 사랑스러운 사람.’
언제나 나는 최대치로 그를 사랑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의 다정함을 마주하고 있자면 믿을 수 없게도 그 마음은 더더욱 깊고 간절해져 갔다.
이런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 방법을 나는 영원히 찾을 수 없으리라.
그렇기에 우리는 영원할 것이다.
그의 품에서 나는 가벼운 미소와 약간의 눈물을 머금었다.
열정. 시들지 않는 사랑. 그것이 오늘부터 나의 이름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
“카스티야 제국은 대신관과 성녀는 물론 성국의 고위간부 다수가 얽혀 있는 이번 사건을 결코 좌시하지 않을 것이며, 제국의 안위를 위협하고 황족을 살해할 뻔한 죄에 책임을 물릴 것이다.”
대신관을 위시한 성국에서 이번에 벌인 사건은 정말로 큰일이었기 때문에 제국의 공식 입장을 준비하는 데에는 적지 않은 시간이 걸렸다.
그리고 그 오랜 준비의 결론은 이러했다.
“지금 이 시일을 기하여 카스티야 제국은 떨어진 법도를 바로 세우고 황실의 명예를 지키기 위하여 성국에 무력으로 대항할 것을 알린다.”
그렇다. 선전포고! 제국은 성국에 전쟁을 선포한 것이었다.
충분히 그럴 만한 사안이라고 생각했으나 걱정이 안 되는 것은 아니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전쟁은 수많은 인명을 앗아가는 일이었으니까.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결국 전쟁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성국은 전 대신관 요세프 카프카 리히트만, 전 성녀 아이샤 렌 카스티야를 비롯한 주요간부들의 천인공노할 비행을 전면적으로 인정하며, 카스티야 제국에 사죄를 표합니다. 이러한 이유로, 성국은 제국에 대한 무조건적인 항복을 선언하는 바입니다.”
제국의 병력이 채 도달하기도 전에 성국이 항복을 선언한 것이다.
성국은 이번 일에 대한 모든 책임을 물고, 그 과정에서 제국의 주장을 전면적으로 수용하겠다고 선언했다.
심지어 알렉산드로스는 이것을 예상하고 있었던 듯했다.
“당연한 일이지. 이번 일로 성국은 그 구심점인 대신관과 주요 병력을 모두 잃어버렸으니. 이제껏 성국의 가장 큰 전력은 대신관과 외신의 힘이었을 텐데 외신과의 연결통로인 대신관을 잃어버린 시점에서 성국은 이빨 빠진 사자나 다름없어.”
나는 새삼스럽게 그의 계략과 외교 감각에 감탄했다.
나는 전생부터 지금까지 국내 행정을 중점적으로 공부했기 때문에, 성국의 이러한 반응은 예상하지 못하고 있었으니까.
‘더욱 훌륭한 황후가 되기 위해 나도 이제부터는 외교능력을 중점적으로 갈고닦아야겠어.’
말하기도 새삼스럽지만 나는 공부하는 것을 무척 좋아했다. 더군다나 이런 계기까지 생겼으니, 나의 의욕은 더더욱 불타올랐다.
어쨌든, 모든 요구를 수용하겠다고 한바, 알렉산드로스는 성국이 휘청일 정도로 어마어마한 피해보상금과 함께 철저한 수사를 통한 책임자의 처벌을 요구했다.
단, 성국에 수사를 전담시키는 것은 믿음이 가지 않으니, 제국의 믿을 만한 인원을 대거 투입하여 합동 수사의 형식으로 조사를 하게끔 했다.
‘모든 것이 최고의 방법으로 해결되었구나.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이렇게까지 성과를 얻어내다니, 정말 잘 됐어.’
그렇게 생각하고 있던 나에게 놀라운 소식이 들어왔다.
“이번에 성국에 파견되는 인원 중…… 노먼이 포함되어 있다고요?”
생각 밖의 소식에 나는 놀라움을 감출 수 없었다.
그런 내 앞에서 노먼이 진중한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예, 그렇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간 제가 많은 은혜를 입은 황후 폐하께 인사드리러 온 것입니다.”
“파견은 언제인가요? 돌아오는 날짜는요?”
“다음 주 화요일이며, 적어도 3년은 걸릴 듯합니다.”
이런저런 일들을 함께 겪으며 노먼은 나의 가장 믿음직하고 좋은 친구 중 한 명이 되어 있었다.
그런데 그런 소중한 친구인 노먼을 3년이나 만나지 못한다니! 생각만 해도 까마득했다.
“당신의 선택을 존중할게요. 다만 어째서 그런 선택을 하셨는지 여쭈어봐도 될까요? 지난 사건으로 인해 노먼의 사교계에서의 이미지는 굉장히 좋아졌고, 훈장까지 받았잖아요. 제국에서 지낸다면 특별 공로를 인정받아 아주 편안한 생활을 할 수 있을 텐데요.”
그것은 정말이었다.
오랜 시간 동안 귀족 사회에서 ‘괴물 공작’이라는 오해를 받았던 그였으나, 지난번 사건에서의 활약 이후로 노먼의 뛰어난 능력과 충성심이 널리 알려져 그는 지금 사교계의 떠오르는 스타가 되어 있었다.
‘안 그래도 노먼은 아름답고 부유하니까, 지금이라면 사생아 아들이 있다 해도 훌륭한 혼처가 줄을 설 텐데.’
그런데 그 모든 것을 마다하고 해외로 가겠다니! 그곳에서의 일은 아주 바쁘고 힘들 것이 분명한데도 말이다.
내 말에 노먼은 씁쓸한 얼굴로 웃어 보였다.
“아시지 않습니까. 저는 그런 것에 관심이 없다는 사실을.”
“그건 그렇지만…….”
“제가 지금 이 시점에 성국행을 선택한 것은……. 마음을 정리할 필요가 있어서입니다.”
“마음을 정리하신다고요?”
내가 되묻자 노먼의 붉은 눈에 한층 더 깊은 빛이 어렸다.
“예. 그것은 무척이나 사적이고 감정적인 일이라 자세히 알려드리기는 어렵습니다.”
잘은 몰라도, 그의 눈을 보면 그가 아주 오래, 깊이 고민해온 문제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그를 오랜 시간 만나지 못한다고 생각하면 마음이 아프지만……. 그래도 노먼의 선택이니까. 그도 분명 아주 오래, 신중하게 고민했을 거야. 그의 선택을 받아들이자.’
“어떤 문제가 노먼을 괴롭히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것이 잘 해결되고, 노먼의 마음이 자유로워지기를 바라요. 노먼의 행복을 위하여 성국행을 응원할게요.”
“감사합니다, 황후 폐하.”
“다만 한 가지 걸리는 것이 있어요. 노먼의 아이는요? 에른스트 역시 몇 년 동안 보지 않으실 건가요?”
아들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자 노먼의 얼굴에 한층 괴로운 빛이 떠올랐다.
“몰래 가끔 보러 가기는 했지만, 그쪽에서 저를 만난 적은 없었으니까요. 에른스트는 제가 없어도 잘 지낼 겁니다.”
“노먼…….”
“그리고 아무리 늦는다고 해도, 아이가 성년이 되기 직전에는 꼭 올 생각입니다. 공작위를 물려주고 관련된 교육을 받는 일에 대해 에른스트와 논의해야 할 터이니.”
노먼은 별로 걱정하지 않는다는 식으로 말했으나, 나는 영 기분이 명쾌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가슴이 더 답답해졌다.
“하지만 노먼, 해외에 있는 동안 친구인 저를 만나지 않는 것과 친아들을 만나지 않는 것은 달라요. 심지어 에른스트는 노먼의 존재조차도 모르잖아요. 아무리 보호하기 위해서라고는 해도, 성년이 되었을 때 존재하는 줄도 몰랐던 아버지가 갑자기 나타나서 작위를 물려주겠다고 하면 납득할 거라고 생각하세요?”
“그건…….”
“그리고 지금은 예전과는 상황이 다르죠. 당신이 ‘괴물 공작’이라는 오명을 신경 쓰고 있는 것은 알지만, 지금은 그 누구도 당신을 괴물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모두가 당신을 존경하고, 사랑하죠.”
나는 진지하게 말했다. 내 말 중 일부라도 그에게 와닿기를 바라면서.
“성국행에 반대하지는 않지만 이것만은 부탁해야겠어요. 에른스트를 만나요, 노먼. 친부라는 사실을 밝히고 아이를 데려가세요. 지금부터라도 함께 있어주세요.”
“하지만…… 잠시 저에 대한 여론이 좋아졌다고는 해도, 언제 원래대로 돌아갈지 모릅니다. 더군다나 저는 좋은 아버지가 아닙니다. 저의 아버지를 닮아서, 아이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곁에 있으면 에른스트를 상처입힐지도 모릅니다.”
“맞아요. 노먼은 언젠가 에른스트를 상처입힐 거예요.”
자기가 먼저 말했지만, 내가 동의할 거라고는 예상 못 했는지 노먼은 뜨악한 얼굴로 나를 보았다.
“역시 황후 폐하께서도…… 그렇게 생각하시는 겁니까.”
“들어보세요! 하지만 가족으로서 함께 지내다 보면 서로를 상처 입히는 건 누구에게나 당연한 일이에요. 인간이니까요! 인간은 불완전한 존재니까요! 하지만 괜찮아요. 서로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아껴주고, 잘못을 했다면 충분히 사과하면 돼요.”
그렇게 말하는 내 목소리가 저절로 열을 띠었다.
어쩌면 의외일지도 모르겠다. 전생, 현생을 통틀어 쓰레기 같은 가족만 만나온 내가 이런 이야기를 한다는 것이.
하지만 그런 가족들만 만나온 나니까 알고 있었다.
가족이라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
인간이란 혼자 있을 때 얼마나 고독감을 느끼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