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3. 로벨리아라는 이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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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3. 로벨리아라는 이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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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3. 로벨리아라는 이름
2022.05.15.
나는 힘주어 말했다.
“저는 이곳과는 다른 세계, 대한민국이라는 국가에서 왔습니다. 저는 그곳에서 오랜 행정 업무 경력과 학력을 쌓았으며, 많은 것을 알려드릴 수 있습니다. 이는 분명히 국가의 발전에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을 종합하여, 제가 제국의 황후로서 적임자임을 자부하는 바입니다.”
내 말에 기자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그렇군……! 황제 폐하를 속인 문제가 없다면 사실상 성녀와 마찬가지잖아.”
“이제까지 성녀는 성국의 소속이었는데, 처음으로 온전히 제국 소속의 성녀가 생긴다면 엄청난 도움이 되겠지.”
“게다가 황후의 업무를 할 수 있을 정도로 경력과 학력이 있는 성녀라니…….”
어느샌가 수백 개의 시선은 나를 향한 호의를 품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며 나는 빙긋이 웃었다.
이제 그 누구도 더 이상 내게 남편과 국민들을 속였다는 이유로 비난할 생각은 없어 보였다.
‘아마 대신관 때문에 일어난 지난 사건을 나와 알렉산드로스가 힘을 합쳐 해결한 것, 그리고 내가 그간 궁내부 업무를 충분히 잘해왔기에 가능했던 결과겠지.’
그렇게 생각하면 성취감과 감동이 짜르르 하고 선명한 울림으로 전해져왔다.
도무지 믿을 수가 없었다.
‘그동안 나는 누구를 대하더라도 죄책감을 지울 수 없었지. 내가 눈앞의 사람을 속이고 있다는 생각. 그리고 내 자리가 아닌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는 생각 때문에…….’
하지만 이제는 달랐다.
‘이젠 더 이상 누구에게도 거짓말 하지 않아도 돼. 이제는 누구도 속이지 않고 온전히 나 자신으로 있을 수 있어.’
나는 알렉산드로스를 돌아보았다.
그 역시도 기쁨과 자랑스러움으로 얼룩진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의 커다란 손이 뻗어와 내 손을 꽉 쥐었다. 나는 그의 손을 깍지 낀 뒤 앞을 보았다.
“황후 폐하 만세!”
“황제 폐하 만세!”
“두 분 폐하, 만만세!”
기자들의 만세삼창에 나는 솟구치는 눈물을 억누르지 못하고 그만 눈물을 보이고 말았다.
그런 나를 본 알렉산드로스는 마치 그동안 고생이 많았다는 듯, 나를 꽉 끌어안아주었다.
눈물과 함께 웃음이 나왔다.
누군가에게 받아들여진다는 사실은, 이렇게나 기쁘고 감격스러운 일이었다.
***
또 한 가지 반가운 소식이 있었다.
바로 여우가 돌아온 것이었다.
“글쎄, 이 여우가 후원 숲에 숨어 있었지 뭐예요!”
궁인의 말에 따르면, 여우는 최근 황궁에서 있었던 난리통을 피해서 후원에 조성된 숲에 숨어있었던 모양이었다.
나는 정말 기쁘고 반가웠다. 왜냐하면 나는 여우가 완전히 도망갔거나 죽은 줄 알았기 때문이었다.
“아가야!”
“끙, 끼잉 낑, 낑!”
내가 손을 뻗자, 여우는 마치 미꾸라지처럼 궁인의 품에서 튀어나와 내게로 안겼다.
그 묵직함과 따스함, 거위털 베개보다도 푹신한 털! 내가 그 모든 것을 얼마나 그리워하고 있었는지, 나는 그제서야 깨달았다.
여우는 낑낑 소리를 내며 내 얼굴을 마구 핥아댔다. 덕분에 화장이 반쯤 지워졌지만 전혀 아깝지 않았다.
나는 여우의 붉은 털에 얼굴을 부비곤 말했다.
“여우야, 정말 걱정했어. 난 네가 도망가거나 죽은 줄만 알았단다.”
“끄으응, 끄으응, 애애애앵…….”
“여우도 폐하가 정말 보고싶었나 봐요!”
시녀가 웃으며 거들었다.
한데 내가 보기에도 여우의 크고 그렁그렁한 눈을 보면 시녀의 해석이 신빙성이 없지는 않은 것 같았다.
“폐하, 외람되지만 폐하께서도 모르는 새 여우에게 정이 많이 드셨나 봐요.”
다른 시녀의 말에 나는 정신을 차렸다.
부끄럽지만 확실히 그랬다.
여우를 풀어줄 것이다, 키우지 않을 것이다, 정을 주지 않을 것이다.
그런 말을 반복하며 벽을 쳤다.
‘왜냐하면 갑자기 떨어진 이 세계에서 나 한 몸 간수하기도 어렵다고 여겼으니까. 언젠가 이혼하고 혼자 살아야 할 텐데 여우까지 감당할 수 있을 리 없다고 생각했지.’
하지만 이제는 상황이 달랐다.
내 상황은 이 이상 더 좋아질 수 없을 정도로 안정되었고, 여우 역시 나를 잘 따랐다.
이런 귀여운 털북숭이 하나도 책임질 수 없는 상황은 아닌 것이다.
그 사실을 깨달은 나는 부스스 웃었다.
나는 여우의 겨드랑이에 손을 끼워 들어올린 채, 여우에게 눈을 맞추고는 말했다.
“내 마음의 공간을 허락할 생각은 없었는데, 너 역시 어느샌가 내 가슴 한구석을 차지하고 말았구나. 꼭 황제 폐하처럼 말이야.”
“헥, 헥, 헥, 헥…….”
“네게 이름을 줄게. 앞으로 계속 한 지붕 아래에서 지낼 텐데 언제까지나 여우라고 부를 수는 없겠지.”
어쩐지 여우의 얼굴은 기뻐보였다. 여우가 사람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을 리가 없는데도 불구하고.
“코넬리안. 애칭은 코니로 하자.”
“어머! 정말 좋은 이름이에요.”
“코니라니 정말 귀엽네요! 안녕, 코니?”
시녀들은 내가 결국 코니를 키우기로 한 것이 무척 기쁜 것 같았다. 안 그래도 내게 계속 키우자고 졸랐으니.
시녀들이 에워싸고 코니의 매끄러운 털을 한 번이라도 만져보려 용을 썼지만, 코니는 도도하게도 그 유연한 몸을 씰룩이며 다른 사람의 손을 거부했다.
코니가 손을 허용하는 것은 오직 나뿐이었다.
내가 머리부터 척추를 따라 등을 길게 쓰다듬어주자, 코니는 만족스러운 듯 눈을 감더니 새근새근 잠에 들었다.
***
“그 여우 결국 키우기로 했다지.”
업무가 끝난 뒤, 나와 알렉산드로스가 함께 중앙궁 정원을 거닐고 있던 때였다. 알렉산드로스가 먼저 문득 그런 말을 했다.
“어머, 소식에 빠르시네요.”
내가 말해주려고 했던 것을 이미 알고 있다는 것에 나는 조금 놀랐다.
“그대에 대한 소식이니까.”
그 별것도 아닌 말은 괜히 내 가슴을 설레게 만들었다.
알렉산드로스가 쓰게 웃었다.
“어찌됐든 후회될 만한 결정이 아니었으면 좋겠군.”
“당신도 참. 좋은 말은 못 해줄망정 그런 말을 해요?”
“그대의 결정에 뭐라 하는 것은 아니지만, 나는 그 짐승이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아. 정을 주어봤자 야생동물은 야생동물이야. 그대도 지나치게 정을 주지 않는 게 좋아. 괜히 마음을 다치게 될지도 모르니.”
늘 그렇듯 그럴싸한 언변으로 늘어놓긴 했지만, 그 본심은 뻔했다.
내 관심을 여우에게 빼앗길까 봐 심통이 난 것이다.
‘세상에, 제국의 황제가 동물에게 질투를 하다니!’
더더군다나 그가 얼마나 교활하며 여유롭고 능수능란한 자인지 알고 있는 나로서는 더더욱 그의 그런 모습이 새롭게 보일 수밖에는 없었다.
‘한때는 도무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고, 나를 오로지 체스말로만 보고 있는 것 같아서 무섭고 불안했는데…….’
그랬던 사람이 이제는 여우에게 관심을 뺏길까 봐 질투하고 있다니!
그게 너무 웃기고 귀여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푸훗!”
“뭐가 그리 재밌지? 즐거운 이야기가 있다면 내게도 들려주었으면 좋겠는데.”
나는 찔끔 새어나온 눈물을 훔치며 모른 척했다.
“아, 아니에요. 아무것도.”
“흐음.”
알렉산드로스는 미심쩍다는 눈으로 내 얼굴을 들여다보았으나,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내가 그렇게까지 나오는데 그가 어쩌겠는가? 그는 결국 다른 화제를 꺼냈다.
“그건 그렇고 여우의 이름을 코넬리안이라고 지었다지?”
“맞아요. 줄여서 코니.”
“산수유라는 뜻이로군. 여우의 털이 붉어서 산수유인가?”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런 뜻으로 볼 수도 있겠지만……. 꽃말을 생각해서 지은 이름이에요.”
“꽃말?”
“네. 산수유의 꽃말은 ‘불변’이거든요. 저와 당신의…… 사랑. 그리고 이 행복이…… 영원히 변치 않았으면 하는 뜻에서.”
내 말에 알렉산드로스는 한 대 맞은 것만 같은 얼굴이 되었다.
능수능란한 그답게 그의 그런 얼굴을 볼 수 있었던 건 한순간이었다. 그는 경치를 감상하듯 등을 돌렸다.
하지만 그의 귓불이 붉은 것은 뒤에서도 너무나 잘 보였다.
“그래, 정말……. 사랑스러운 이름이야.”
그가 등을 돌린 채 대답했다.
알렉산드로스가 코니에게 대고 ‘사랑스럽다’는 표현을 쓴 건 처음이어서 나는 또 큰소리로 웃을 뻔했다.
쿡쿡거리는 웃음소리를 가까스로 삼킨 뒤, 내가 입을 열었다.
“뜻이 예쁜 이름을 지어주고 싶었어요. 제 이름은 별로 뜻이 좋지 않거든요.”
“뜻이 좋지 않다고?”
알렉산드로스가 다시 나를 보았다.
내 시선은 정면의 온실에 고정되어 있었다.
로벨리아꽃. 보랏빛의 여린 꽃잎을 가진 아름다운 꽃이 유리 온실 안에서 군락을 이루고 있었다.
“로벨리아꽃은 독초잖아요. 예전에 폐하께서도 말씀하셨죠?”
아주 오래전, 아이샤가 처음으로 살롱을 개최했지만 완전히 망쳤던 그 날, 나와 알렉산드로스는 함께 이곳을 산책했고 로벨리아꽃을 보았다.
그게 벌써 일 년도 더 전이라니, 시간의 흐름이 놀랍기만 했다.
“독초라 그런지 로벨리아꽃의 꽃말은 온통 나쁜 말뿐이거든요. 악의, 불신, 원망, 절교…….”
이 이름이 싫은 것은 아니었다.
그야말로 악녀에게 잘 어울리는 이름이 아닌가. 독초이며, 그래서 꽃말은 나쁜 말뿐이라니.
‘나는 이혼당하기 위해 스스로 악녀를 자처했었지. 이혼을 포기하면서 흐지부지되기는 했지만……. 여전히 나를 악녀로 기억하고 있는 사람도 있을 거야.’
그런 나를 대변해주는 것 같은 이 이름을 곱씹을 때마다 씁쓰름한 기분이 되곤 했다.
“그래서 제게 소중한 존재에게는 뜻이 긍정적이고 예쁜 이름을 지어주고 싶었어요. 대리만족도 할 겸. 겸사겸사.”
나는 알렉산드로스를 돌아보며 웃었다.
나를 보는 그의 눈은 어쩐지 평소보다도 깊어져 있었다.
“그걸 아나? 로벨리아.”
그의 아름다운 입술이 부드럽게 달싹였다.
“로벨리아꽃의 꽃말은 그것뿐이 아니야. 나쁜 뜻도 있지만, 사실 다른 뜻도 있지.”
“네? 다른 뜻이요?”
그것은 뜻밖의 말이라서 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로벨리아꽃에 다른 꽃말이 있다는 것도 의외, 그가 꽃말 같은 것까지 잘 알고 있는 것도 의외였다.
놀란 내 모습을 본 알렉산드로스는 눈을 반달모양으로 휘어 웃었다.
“그래. 내가 아는 로벨리아꽃의 꽃말은 열정, 시들지 않는 사랑이야.”
그의 말에 나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
알렉산드로스는 그런 나를 보고 빙긋이 웃더니 화단의 꽃을 한 송이 꺾었다.
붉은 꽃을 골라 내 머리카락에 꽂아주며 그가 속삭였다.
“그 중 어떤 말을 고르느냐는 이름의 주인에게 달렸겠지.”
“…….”
“하지만 나는 어쩐지 알 것 같은 기분이 드는군. 이 이름의 주인에게 어느 쪽의 꽃말이 더 잘 어울릴지…….”
정말 이상한 기분이었다.
한 사람이 그저 몇 마디의 말로 다른 사람을 얼마만큼이나 행복하게 만들 수 있는지, 이전의 나는 미처 몰랐다.
이렇게나 커다란 행복의 형태를 이전의 나는 도저히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내 눈가에는 어느샌가 물기가 어렸다. 눈꼬리에 눈물을 그렁그렁 매단 채 나는 활짝 웃어 보였다.
“내 말에 감명받았나? 그럼…….”
알렉산드로스는 능글맞게 미소 짓더니 눈을 감았다.
“기껏 감동 줘놓고 이러기예요?”
핀잔주는 듯 말했지만, 내 입가에서도 웃음이 비식비식 새어 나왔다.
나는 천천히 그에게 다가가, 그의 입술 위에 입을 맞추었다.
내가 그에게 입 맞추기 위해서는 까치발을 들어야만 했다.
그의 입술에 내 입술이 닿자…….
“꺄악!”
그의 단단한 팔이 갑작스레 나를 덥석 끌어당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