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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2. 저는 빙의자입니다 (142/151)


142. 저는 빙의자입니다
2022.0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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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로벨리아.”

알렉산드로스였다.

빗어 넘긴 앞머리 아래로 너무나 잘생긴 다갈색의 얼굴이 오후의 신록빛 햇살을 받아 반짝였다. 그의 금빛 눈동자는 역광 속에서도 마치 불을 켠 듯 밝게 빛났다.

검은 예복과 장갑을 착용해 턱 아래로는 살결 한 점 드러나지 않았으나, 그럼에도 탄탄한 근육으로 짜인 육체의 아름다움은 숨겨지지 않았다.

여자라면 누구라도 매혹당할 정도로 고혹적인 광경이었다.

그리고 나 역시 순간 그의 모습에 넋을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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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죽음조차 갈라놓지 못한 그의 신의의 단단함을 목격하지 못했다면……. 나를 위해 변하고, 기댈 곳이 되어주는 다정함을 알지 못했으면……. 시간과 공간의 틈새에서조차 살아돌아오고, 시간을 뛰어넘어 회귀 전의 기억까지 손에 넣을 정도로 강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내가 몰랐더라면……. 나의 심장은 결코 그를 향해 뛰지 않았겠지.’

그가 나를 지키기 위해 했던 그 모든 일들,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을 정도로 고통스러운 경험들을 생각하면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내가 평생 받아볼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한 사랑을, 차마 다 가늠할 수도 없을 정도의 사랑을 그는 보여주었다.

그런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 방법 같은 건, 도저히 알 수 없었다.

지금까지도 나의 심장은 뛰고 있었겠지만, 그의 모습을 마주한 순간 나는 심장이 그동안 멈추어 있다가 드디어 뛰기 시작한 것처럼 느껴졌다.

집무실에 사람은 많았으나, 나의 눈은 오로지 그만을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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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셨어요.”

그저 그를 마주하고 있는 것만으로도 입꼬리가 살며시 올라갔다.

그리고 그 역시 오로지 나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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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리 그대를 보니 좋군. 그대를 만나지 않는 시간은 식경이 하루처럼 느껴져.”

그의 유들유들한 말솜씨는 여전해서, 나로 하여금 절로 웃음을 터뜨리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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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장이 심하시네요. 오늘 아침에도 뵈었는데 말이에요.”

그의 말이 과장이라고 생각하면서도, 그런 말을 듣는 건 역시 싫지 않았다.

그의 모습이 부쩍 가까워졌다. 어느덧 코앞까지 다가온 그는 주변의 시선도 신경 쓰지 않고 내 허리를 잡아당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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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지. 오늘 아침 우리는 한 침대에서 일어났지.”

귓가에 속삭이는 그의 목소리는 나직했으나 집무실의 모두가 들을 정도로 분명한 소리를 가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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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 어머. 세상에나…….”

시녀들이 서로 쑥덕거리며 좋아서 어쩔 줄 몰라 하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나는 그의 옆구리를 꼬집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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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옆자리에 누워 잤을 뿐이잖아요. 오해를 살 만한 발언은 삼가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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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하, 미안.”

이런 와중에도 그의 나직한 웃음소리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섹시해서, 괜히 내 귓가를 달아오르게 만들었다.

그때였다. 그가 나에게만 들리는 목소리로 속삭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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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난 한순간도 잠들지 못했어. 내 옆자리에서 새근거리는 그대의 숨소리가 너무 자극적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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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말을 듣는 순간, 기묘한 감각이 등골을 타고 찌르르 올라와서 나는 순간 다리가 풀릴 뻔 했다.

나는 놀라서 고개를 들었다. 눈이 마주치자, 그가 눈꼬리를 곱게 접어 웃으며 의미심장한 눈빛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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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순간도 자지 못했다고? 정말……일까?’

그렇다기에는 그의 얼굴에 피로의 기색은 없었다.

아무리 제국 제일, 대륙 제일의 검술사인 그라고 해도 한순간도 자지 못했는데 이렇게 멀쩡해 보일 수 있을까? 나는 조금 혼란스러웠다.

하지만 의문에도 불구하고 그의 말은 나의 심장을 뛰게 만들기 충분했다.

내가 자는 얼굴을 그가 지켜보았다는 것, 나에게 그러한…… 종류의 욕망을 느꼈다는 것은 정말이지 기묘하고 야릇한 기분이었다.

어쩐지 목이 탔다. 그와 맞닿아 있는 살결 전부에 열이 오르는 것만 같았다.

그의 그윽한 눈이 점점 가까워졌다. 그의 얼굴이 다가오는 동안, 어쩐지 그의 입술로 자꾸만 시선이 가서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하나 내 입술 위에 와닿은 것은 기다리던 입술이 아닌 그의 손가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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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은 건 아니겠지? 십 분 뒤에 기자회견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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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아!”

나는 너무 당황해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아마 머리카락이나 얼굴이나 비슷한 색으로 보였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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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 이, 잊었긴요! 다 준비해놓았는걸요.”

그건 사실이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나는 기자회견의 최종준비와 검토까지 마치고 마음을 가다듬고 있는 상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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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산드로스의 뇌쇄적인 매력에 휘말려서 순간적으로 잊어버렸지만.’

정말 지독한 매력이었다. 여자를 매혹해 타락시키는 인큐버스가 실제로 존재한다면 그의 모습을 하고 있을 것이 분명했다.

날 당혹하게 만든 당사자는 장난스럽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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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내 아내야. 빈틈이 없지.”

그러고는 내 이마 위에 입 맞췄다. 얼굴이 불타오르는 것 같은 와중에도 그의 입술은 무척 기분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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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바로 나가도록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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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지.”

시녀들이 발표자료를 건넸고, 알렉산드로스는 내게 팔을 내밀었다. 나는 이제 제법 그의 에스코트에 익숙해져 있었다.

우리는 함께 응접실을 나와 중앙궁의 로비로 향했다.

한때 대신관과의 전투가 이루어졌던 그곳은 언제 그런 일이 있었냐는 양 화려하고 번듯한 원래의 모습을 되찾은 상태였다.

그리고 그곳에서는 수백 명의 기자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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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 폐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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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후 폐하! 한 말씀만 해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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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들 정숙하시오! 폐하께서 직접 말씀하실 것이오!”

기자들의 웅성거림을 엄격한 비서관이 한순간에 정리했다. 이런 일에 능숙한 사람인 것 같았다.

알렉산드로스는 직접 단상에 섰다. 그는 그저 그 자리에 있는 것만으로도 모두의 시선을 끄는 힘이 있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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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일의 중대성은 황실 역시 익히 인지하고 있으며, 이번 사건의 주 책임자인 성국에 대한 의견 표명은 이번 주 금요일에 이루어질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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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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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 제군들은 그렇다면 오늘의 기자회견의 주제는 무엇인지 궁금하겠지.”

알렉산드로스는 그 차갑고도 강렬한 시선으로 기자들을 둘러보았다.

아까 전의 소란과 정반대로, 지금 기자들은 쥐죽은 듯 조용했다.

그들은 모두 알렉산드로스의 위엄에 짓눌린 것처럼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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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에 대해서는 황후가 직접 설명하겠다.”

드디어 내 차례가 왔다. 긴장감에 심장이 요동치는 것을 느끼며 나는 단상에 올라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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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어려워할 것 없어. 전생과 현생을 통틀어 발표는 수도 없이 해봤으니까.’

남의 발표까지 맡아서 했던 전생의 경험을 떠올리니 긴장감이 조금 줄어들었다.

나는 당당한 얼굴로 기자들을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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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제가 모두의 앞에서 발표할 사항은……. 바로 저의 출신에 대한 것입니다.”

기자들은 여전히 입을 열지 못했으나, 그들의 얼굴에 짙은 긴장감이 도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다급하게 노트를 펼치고 펜을 꺼내는 소리가 로비를 울려서 마치 파도치는 소리처럼 들렸다. 엄청난 속도로 내 모습을 스케치해나가는 화가들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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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소문으로 익히 들은 바가 있는 분도 있겠으나…….”

이곳에 온 뒤, 내가 가장 두려워했던 것.

그것은 나의 비밀이 밝혀지는 일.

그 비밀을 나는 지금, 이 자리에서 모두에게 밝히려고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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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다른 세계에서 온, 빙의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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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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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럴 수가!”

알렉산드로스가 카리스마로 다물게 했던 기자들의 입도 어쩔 도리 없이 벌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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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빙의가 된 시점은 언제였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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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 폐하께서 그 사실을 알게 되신 시점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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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설마, 이전에 라이트 자작부인이 폭로했던 내용이 사실인 것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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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 조용!”

비서관이 호통을 쳤으나 이번에 기자들은 쉽게 진정되지 않았다.

제국의 황후가 빙의자였다니! 이제껏 모두가 알고 있던 사람과는 다른 사람이었다니!

심지어 그 사실을 스스로 밝혔다니! 이것은 꽤나 주목받는 기삿거리가 될 것임이 분명했다.

모두가 내 다음 말에 집중하고 있었기에, 내가 입을 열자 시끄럽던 기자들도 조용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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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빙의자라는 것은 사실이나, 라이트 자작부인의 폭로는 대부분 사실이 아닙니다. 그때 밝혀졌듯 라이트 자작부인의 주장 대부분은 저를 모함하기 위한 거짓 증언이었습니다. 그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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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모두의 궁금증이 최대로 증폭될 만한 시점을 골라 나는 잠시 말을 멈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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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실제 로벨리아 르 카스티야가 아닌 빙의자라는 사실에서 가장 큰 쟁점은 배우자를 배신했다는 것이겠지만, 저와 황제 폐하는 이 사실에 대해 합의를 이루었으며 좋은 관계를 형성하고 있고, 이 사실에는 어떠한 의심의 여지도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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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후의 말이 맞다. 그녀가 빙의자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지금도, 우리는 서로를 변함없이 사랑하며 나는 그녀를 나의 반려이자 제국의 황후로서 받아들였다.”

알렉산드로스가 거들자, 기자들은 아무런 불만도 표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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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그렇다면……. 황후 폐하께서 이제껏 빙의자라는 사실을 숨긴 것이 국민들에 대한 배신이라는 의견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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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에 대해서는 내가 대답하지.”

겁 없는 기자의 질문에 알렉산드로스가 끼어들었다.

하지만 그가 끼어들게 내버려 둘 내가 아니었다.

나는 손을 들어 그를 제지했다.

순간 그의 눈에 걱정스러운 빛이 스쳤으나, 나는 안심하라는 뜻으로 그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결국 알렉산드로스는 내게 맡기겠다는 듯이 물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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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빙의된 뒤 일 년 반 넘게 그 사실을 숨겼다는 사실을 인정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결코 악의나, 타인을 우롱하기 위한 의도가 아니라, 저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실제로 익히 알려져 성녀로서 대우받는 차원이동자와 달리 빙의자는 그 존재가 알려져 있지 않아, 제가 빙의자임을 밝혔어도 그것이 받아들여질 가능성은 낮았을 겁니다. 빙의자임이 받아들여지기보다는 제가 정신이상자로 몰릴 가능성이 훨씬 높았겠지요.”

그것은 틀림없었다. 이번에 빙의자라는 존재가 알려진 것은 성국과 예언기록이 가진 권위에 힘입어서였다.

그리고 빙의 직후의 나는 황후라곤 하나 그 영향력이 극히 미미한, 허울뿐인 황후에 불과했다. 그런 나의 주장을 진지하게 들어줄 사람은 많지 않았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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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실히 황후 폐하의 말씀이 일리가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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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같아도 빙의자임을 쉽게 밝히지는 못했을 거야.”

내 설명에 납득한 기자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말을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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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저는 제국을 더욱 부강하고 발전하도록 하기 위한 의지와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는 그간 제가 수행했던 궁내부 업무로 증명할 수 있습니다. 또한, 차원이동자가 성녀로 대우받는 것은 다른 세계의 발전된 문물과 기술을 전해주기 때문인데, 이는 저 또한 할 수 있는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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