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9. 네게 그의 사랑을 받을 자격이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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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9. 네게 그의 사랑을 받을 자격이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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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9. 네게 그의 사랑을 받을 자격이 있을까?
2022.05.01.
그들의 얼굴을 마주한 순간 내 눈은 크게 벌어졌다.
“어, 엄마, 아빠, 오빠?”
이번 생은 물론, 지난 생에서도 인연을 끊은 뒤 한 번도 본 적 없던 얼굴이었다.
그랬던 그들이 이곳 제국에서 모습을 드러내다니. 당연히 놀랄 수밖에.
“정아야, 왜 연락이 없니?”
엄마가 입을 열었다.
“어쩜 여자애가 그리 독하니? 한 번 싸웠다고는 해도, 지난 이십여 년간 부대끼며 함께 살았던 가족인데, 보고 싶지도 않아? 그렇게 냉정해서야 어딜 가도 사랑 못 받아.”
예상대로였다.
가족들은 욕심이 많았다. 내가 아무리 퍼주고 또 퍼주어도 고마워하긴커녕 더한 것을 원했다.
그런 그들이니, 나를 향해 원망의 말을 내뱉는 것이 당연했다.
차라리 무시해버리고 싶었지만, 이곳에는 우리 밖에 없었다. 내가 말을 끊지 않는다면 언제까지나 듣기 싫은 원망의 말이 이어지리라.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아요. 저는 이곳에서 충분히 사랑받고 있고, 행복해요. 그러니 허튼수작 부리지 마세요.”
그것은 진심이었다. 사랑하는 사람과, 나를 받아들여 주는 사람들을 두고 가족들의 곁으로 돌아갈 마음 따윈 나에겐 추호도 없었다.
“뭐라고? 얘가!”
“여보, 진정해. 정아야. 아빠다.”
이번에는 아빠가 입을 열었다.
“너는 네 오빠가 유학 중인 걸 알고도 우리와 연락을 끊었지. 정말 깜짝 놀랐단다. 우리가 말실수를 좀 했거니와 그렇게 영영 말도 안 하고 살려고 할 줄은 몰랐지. 화 풀리면 연락해올 줄 알았는데 너는 끝끝내 전화 한 통 없더구나.”
아빠가 한숨을 쉬었다.
“네 오빠 유학비 대느라 너희 엄마는 일자리도 구했어. 마트 캐셔 일인데, 하루 9시간을 서 있어야 해. 매일 다리가 부어서 잠도 제대로 못 잔단다.”
“…….”
“아빠도 곧 정년인 거 너도 알지. 퇴직하면 아빠는 대체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경비원이라도 해야 하는지. 아니면, 너희 오빠 졸업도 채 못하고 귀국시켜야 하는지…….”
“그걸 왜 저한테 말씀하시죠? 이제 저와 당신들은 남남이에요. 경비원을 하든 뭘 하든 알아서들 해결하세요.”
“정아야, 혈연이라는 것이 끊고 싶다고 그렇게 쉽게 끊어지는 줄 아니? 네가 아무리 부정해봤자 우린 가족이고, 너는 우리 딸이란다.”
끔찍한 이야기였다. 내가 그토록 원하는데, 연을 끊기 위해 얼마나 수많은 각오를 했는데, 아직도 내가 그들과 가족이라니!
너무 불쾌해서 구역질을 하고 싶을 정도였다.
하지만 아빠의 말은 끝나지 않았다.
“한데, 네 엄마아빠는 오빠 유학비 대느라 이렇게 고생하는데, 너는 설마 이렇게 호의호식하고 있을 줄은 상상도 못 했구나. 황후니 황궁이니, 이게 다 뭐란 말이냐?”
“그래, 임정아. 네가 엄마아빠한테 이런 식으로 굴어놓고 혼자 황후 되어 잘 먹고 잘살면 밤에 잠이 오니? 너같이 냉정하고 자기밖에 모르는 애가 황후 일은 참도 잘 하겠다.”
“엄마아빠 말이 맞아. 정아 네가 나라면 몰라도 엄마아빠한테 그러면 안 되지. 널 키우느라 두 분이 얼마나 고생하셨는데.”
내 가족들이 이곳, 황궁 한복판에 있을 리는 없었다. 차원이동은 젊은 여성만이 가능하다고 하니까.
심지어 그들이 내가 이곳에서 어떻게 사는지 안다는 건 더더욱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환영이 틀림없어. 핵이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내 마음을 흔들어놓으려고 하는 거야.’
나는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들의 말을 듣고 싶지 않았다. 더 들었다가는 그저 내 마음에 상처만 입고 말리라.
‘최대한 빨리 핵을 부수고 이곳에서 나가야 해.’
나는 사라진 핵을 찾기 위해 주변을 둘러보았다.
하지만 아무리 찾아봐도 주변은 온통 암흑뿐이었다. 핵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이 공간에 있는 것이라곤 나와 가족들뿐이었다.
심지어 기분 나쁘게도 가족들은 점점 더 크기가 커졌다. 처음에는 내가 알고 있던 크기였던 그들은 점점 불어나, 2m, 3m, 아니 건물에 비견할 정도로 부풀었다.
이 공간의 크기는 무한해 보였고, 그래서 나도 그들을 피하며 핵을 찾으러 다닐 수 있었지만, 가족들 역시 내가 어디로 도망쳐도 그 목소리가 들릴 정도로 커졌다.
“너 때문에 엄마는 매일 아프고 속상해서 잠도 제대로 못 자. 엄마도 이제 나이가 들어서 관절염에 하체 부종까지 있는데 캐셔를 해야 한다니 얼마나 비참한 삶이니? 엄마는 정말 너무 속상해. 애지중지 키워놓은 딸이 집을 나가서 다시는 엄마를 안 보고 산다니…….”
“정아야, 네가 생각하기에는 부족한 점이 많았을지 몰라도 엄마 아빠는 널 위해 최선을 다했단다. 너 키우는 데 얼마나 들었는지는 아니? 학원비에, 밥값에 옷값에 학비까지……. 그런데 이렇게 연락도 하지 않다니 아빠도 정말 속상하구나.”
“임정아 너 진짜 이기적이야. 그렇게 이기적이어서 남편에게 사랑은 제대로 받겠어? 남편이란 사람도 금방 네 본모습을 알아볼걸.”
어느덧 가족들의 크기는 5층 건물에 비견할 정도로 거대해졌다.
‘정말이지, 핵은 어디에 있는 거야!’
나는 그들의 말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려 애쓰며 입술을 깨물었다.
‘이러는 동안에도 알렉산드로스가 위험해질지도 모르는데……!’
어둠 속에서 반짝이는 것을 필사적으로 찾고 있던 내 시야에 무언가가 들어왔다.
빛나는 그것을 따라 달려가 보니, 의외의 것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로벨리아.”
그는 바로 알렉산드로스였다.
그는 언제나와 같이 깔끔하고 아름다운 모습을 하고 있었다. 뒤로 빗어넘긴 앞머리는 몇 가닥 흘러내렸으며, 머리부터 발끝까지 검은 옷으로 성장을 한 그 모습에는 기품이 넘쳤다.
하지만 그렇기에 더더욱 그의 차가운 얼굴이 돋보였다.
그 얼굴을 보는 순간 나는 철렁 심장이 떨어지는 것 같았다. 그는 나를 향해 더없이 냉정한 눈을 하고 있었다.
‘아니야, 이건 진짜 알렉산드로스가 아니야. 내 마음을 흔들기 위해 핵이 만들어낸 허상이라고.’
나는 그 사실을 되뇌었다.
그가 진짜가 아니라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그는 내게 단 한 번도 그런 얼굴을 한 적이 없으니까.
하지만……. 라이트 자작부인에 의해 내가 빙의자라는 사실이 알려졌을 때, 나는 며칠 동안 알렉산드로스를 보지 않으려 했다.
내가 빙의자라는 사실을 안 그가, 내게 속았다고 할까 봐. 아주 조금이라도, 잠깐이라도 배신감을 드러낼까 봐.
내가 사랑하게 된 그 사람의 차가움을 견딜 자신이 도저히 없어서.
“그렇게나 아니라고 부정하더니, 결국 빙의자가 맞았군.”
그가 입꼬리를 올렸다. 그러나 그것은 그가 언제나 내게 보여주던 다정한 미소가 아니라, 적개심이 담긴 비틀린 웃음이었다.
‘보지 말아야 해. 듣지 말아야 해!’
나는 생각했다.
그러나 믿을 수 없게도, 나의 몸은 움직이지 않았다. 귀를 막고 싶었지만 손을 움직일 수 없었고, 도망치고 싶었지만 발도 바닥에 달라붙은 듯 굳어버렸다. 심지어는 고개조차 돌릴 수 없었다.
“나는 그대를 믿었다, 그 누구보다도 더! 하지만 이게 결국 나의 헌신의 대가인가? 내가 황제로서 자존심도, 가진 것도 전부 내던지고 그대를 위해 모든 것을 바쳤다는 사실을 그대라면 알고 있겠지!”
그런 것쯤은 나도 알고 있었다.
그는 나를 위해 뭐든지 했다. 심지어 내가 죽었다고 생각했을 땐 식음을 전폐하고 폐인이 되기도 했다.
그가 로벨리아 공작영애라고 생각하는, ‘나’를 위해.
그렇기에 더더욱 그에게 미안했다. 죄책감을 느꼈고, 사실이 밝혀질까 봐 두려웠다.
그가 배신감을 느낄까 봐, 나를 미워하게 될까 봐 괴로웠다.
“사랑하는 사람이 사실 다른 사람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기분을 그대가 알까? 겉껍데기만 같은 남이 사랑하는 사람의 흉내를 내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어떤 기분인지 아나? 알 리가 없지. 그대는 내 마음을 배신했어!”
“아, 알렉산드로스…….”
그가 진짜 알렉산드로스가 아닌 것을 아는데도, 내 입에서는 절로 그의 이름이 터져 나왔다.
「하지만 그가 진짜가 아니라는 것이 중요할까? 어차피 진짜 알렉산드로스도 네게 같은 말을 할걸.」
낯선 목소리가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넌 그 사람을 속였어. 그가 빙의자냐고 물었을 때도 아니라고 거짓말했지. 그때도 그는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어……. 넌 그의 그런 믿음을 배반한 거야.」
괴로움에 숨쉬기가 어려워지고, 턱이 덜덜 떨렸다.
마치 내가 고통스러워하는 것을 즐기기라도 하듯이, 유혹적인 목소리에는 웃음기가 돌았다.
「그런 네게 알렉산드로스의 사랑을 받을 자격이 있을까?」
“그래! 임정아, 넌 사랑받을 자격이 없어. 가족도 버린 패륜아를 사랑해줄 사람이 있을 것 같아?”
“엄마랑 아빠는 많이 늙었고 병들었어. 그런데 이제 가난하고 슬프기까지 하구나. 이게 다 너 때문이란다.”
“저런 남자가 너한테 어울릴 거라고 생각하다니 자신감이 너무 과한 거 아니야? 애초에 남의 자리를 빼앗아서 들어간 거잖아. 거긴 네 자리가 아니었던 거야.”
어느덧 가족들은 시야에 가득 찰 정도로 커졌다. 이 모든 것이 끔찍한 악몽 같았다.
숨쉬기가 벅찼다. 가슴이 무너질 것 같았다. 가슴부터 시작해 전신이 부서져 버릴 것만 같았다.
「차라리 죽는 게 낫지 않았을까?」
달콤한 목소리가 속삭였다.
「가족들을 버리고 남의 것을 빼앗은 자리에서 정말 행복할 수 있다고 생각했어? 그런 짓까지 했는데도 누구에게도 사랑받지 못할 삶이라면, 차라리…….」
“이…… 흐윽, 이이익.”
어느샌가 나도 모르는 눈물이 뺨을 타고 줄줄 흘러내리고 있었다.
나는, 전신을 텅 비워버릴 정도로 소리쳤다.
“이이이이, 입 다물어!”
그와 동시였다. 완전히 굳어버린 몸이 움직이기 시작한 것은.
나는 가짜 알렉산드로스에게 힘껏 주먹을 날렸다.
그는 190cm에 달하는 장신에, 떡 벌어진 어깨와 잘 짜인 근육을 가진 거구였으나 어처구니없게도 내 주먹 한 방에 바람 빠진 풍선같이 날아갔다.
“입 다물어! 모두 개소리 집어치워! 그 입 다물어!!”
나는 필사적으로 소리쳤다.
“가만히 있으니까 내가 무슨 가마니인 줄 알아? 웃기지도 않은 소리로 날 흔들어놓으려 하지 마! 날 키우는데 든 돈? 그 정도는 내 봉급을 다 갖다 바칠 때 다 갚았어! 이십여 년간 부대낀 가족이라고? 그 이십 년 동안 나를 방치하고 학대하고 차별대우해놓고 그딴 소리가 나와! 임정현이 공부하기 싫다고 밴드하고, 골프 배우고, 프랑스에 유학까지 보내주는 동안 나는 20만 원짜리 학원 한 개 보내준 게 전부였잖아! 뭐 관절염? 캐셔? 그런 건 그 잘나신 아들한테 도와달라고 해! 그리고 임정현, 넌 어릴 때부터 계속 날 때렸지! 넌 기억 못 할지 몰라도 난 다 기억하고 있어! 초등학교 4학년 때는 팔도 부러져서 깁스까지 했는데 뭐, 내가 이기적이고 냉정하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