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8. 전생에서부터 이어온 업보를 치르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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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8. 전생에서부터 이어온 업보를 치르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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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8. 전생에서부터 이어온 업보를 치르거라
2022.04.28.
“화, 황제 폐하!”
“폐하께서 돌아오셨다!”
“황제 폐하 만세! 만세!”
귀에 이명이 남을 정도로 큰 함성이 터져 나왔다.
모두가 얼싸안고 알렉산드로스의 귀환을 기뻐했다. 비서관은 소리 없는 눈물을 흘렸으며, 로벨리아도 감정이 북받쳐 넋을 잃었다.
환희와 감격에 술렁이는 이들을 진정시킨 건 알렉산드로스 본인이었다.
“그만. 환영은 고맙지만, 지금 낭비할 시간이 없다.”
그의 말에 모두가 기뻐하던 것을 멈추고 입을 닫았다. 알렉산드로스가 어느 정도로 신뢰와 충성을 사고 있는지 짐작할 수 있는 모습이었다.
모두를 조용히 시킨 뒤, 대신관이 급히 물러난 틈을 타 알렉산드로스는 로벨리아에게 말을 걸었다.
“그대를 다시 만난 기쁨과 반가움을 이루 말할 수 없지만, 한시가 급한 상황이니 인사는 생략하도록 하지. 로벨리아, 나는 회귀자다. 믿기 어렵겠지만 지금의 나는 이 세계의 예정된 운명에 대한 기억을 가지고 있어. 그것은 그대가 소설책을 통해 읽은 내용이기도 하지.”
며칠 만에 돌아온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은 하나하나가 충격적인 것이었다.
‘알렉산드로스가 회귀자이고, 원작의 내용을 알고 있다고? 대체 언제부터? 게다가 내가 빙의자라는 것을 알고 있어?’
혼란스럽기 그지없었으나 로벨리아는 금방 정신을 차렸다. 그녀는 세상의 그 누구보다도, 심지어 자기 자신보다도, 그를 믿었으니까.
“걱정 마세요. 당신을 믿어요.”
“그거 무척 기쁘군. 로벨리아, 잘 들어. 이전의 삶에서 나는 대신관과의 싸움에서 패배했다. 그를 쓰러뜨리기 거의 직전까지 갔으나 결국 실패하고 말았지. 그 이유는 첫 번째로, 대신관의 지금의 모습은 겉껍데기일 뿐이고 그 본체인 핵은 그의 몸속에 숨어 있기 때문이야. 방금 봤다시피, 그 핵을 부수지 않으면 대신관은 물리적인 공격을 받아도 곧바로 재생하기 때문에 그를 쓰러뜨릴 수 없어. 그리고 이전의 나는 그 핵을 꺼내는 데 실패했지.”
거기까지 말한 알렉산드로스는 잠시 숨을 골랐다. 갑작스럽게 쏟아지는 정보들을 로벨리아가 이해할 시간을 주는 것 같기도 했다.
“그리고 두 번째로, 설령 내가 핵을 꺼내는 데 성공했다고 해도 나는 그것을 부술 수 없었을 거야. 왜냐하면 그 핵은 이 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것에 면역이 되었기 때문이야. 즉 이 세계의 존재는 그 무슨 짓을 해도 핵을 부술 수 없다.”
알렉산드로스가 말을 이었다.
“하지만 지난 생의 내가 실패한 궁극적인 이유는, 로벨리아. 내가 나 자신 외에는 그 누구도 믿지 않았기 때문이야.”
“누구도…… 믿지 않았다고요? 하지만 당신은 분명 아이샤를…….”
“그래, 황비를 사랑하는 척했지. 그때 나는 협력자로서 그녀를 선택했으니까.”
그렇게 말하는 알렉산드로스의 목소리는 한층 무거워져서, 마치 깊은 회한의 무게가 담긴 듯했다.
“하나 나는 협력자인 황비조차 완전히 믿지 않았어. 나는 그녀를 그저 목적을 이루기 위한 체스 말로밖에는 생각하지 않았던 거야. 그래서 나는 큰 실수를 했어. 중요한 일은 전부 나 스스로 해결하려 한 것이지.”
그렇게 말하는 그의 얼굴은 괴로워 보였다.
로벨리아는 그가 느끼는 후회의 무게를 알 것 같았다.
대서관의 계획을 막기 위해 아이샤와 로벨리아, 모두를 도구로 취급했던 알렉산드로스는 자신의 오만으로 인해 패배하였다. 어리석음의 죗값을 절망 속에서 익사하는 것으로 치른 것이다.
‘지금의 그는 진심으로 뉘우치고 있구나. 내가 원작에서 읽은 그 모든 어리석은 행동들을 그 누구보다도 사무치게 후회하고 있어.’
그의 괴로움이 느껴져 덩달아 마음이 무거워지던 로벨리아는, 알렉산드로스가 갑자기 손을 잡자 깜짝 놀랐다.
“하지만 로벨리아, 지금은 달라.”
그렇게 말하는 알렉산드로스의 목소리는 분명한 열기를 띠고 있었다.
“지금의 나는 그대를 믿어. 심지어 나 자신보다도.”
그의 두 눈을 본 순간, 로벨리아는 깨달았다.
그의 말에는 한 치의 거짓도 없었다. 그의 말은 온전한 진심이었다.
“그렇기에 그대에게 가장 중요한 일을 맡길 수 있어. 로벨리아, 부디 그대가 대신관의 핵을 부숴줬으면 해. 아까 말했다시피 대신관의 핵은 이 세계의 모든 것에 면역이니, 그것을 부술 수 있는 사람은 다른 세계에서 온 존재인 그대밖에는 없어.”
대신관의 핵이 이 세계의 존재에 면역이라는 말과, 그가 자신이 빙의자임을 알고 있다는 의미의 말을 들은 시점에서, 그가 어떤 부탁을 할지 로벨리아는 충분히 예상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녀는 놀라지 않고, 의지가 가득 담긴 눈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 핵이라는 것은 어떻게 꺼내죠?”
“유감이지만 내가 꺼낼 수는 없어. 핵을 꺼내기 위해 그를 베어낸다고 해도, 대신관은 곧바로 회복하고 말 테니까. 물리적인 방법으로 핵을 꺼내는 것은 불가능해.”
“물리적인 방법이 안 된다면, 마법적인 방법은 어떨까요?”
로벨리아는 순간 머릿속에 섬광처럼 스쳐 가는 발상을 말했다.
“마침 우리의 곁에는 그 누구보다 대단한 재능을 가진 마법사가 있어요. 케일럽, 할 수 있겠니?”
갑자기 자신에게 말을 걸어올 줄은 예상하지 못했는지 케일럽은 흠칫 놀랐다. 그는 잠시 고민하는 듯하더니 이렇게 대답했다.
“제가 6서클이었을 때는 대신관을 뒤덮고 있는 사악한 기운 때문에 알지 못했는데, 7서클인 지금은 느껴져요. 그의 몸속에 그의 힘이 모이는 핵이 있다는 사실을요.”
“위치를 알겠다면, 그걸 꺼낼 수도 있겠니?”
“네, 가능할 것 같아요. 아니, 가능해요. 다만 시간이 좀 필요해요. 아주 섬세한 제어가 필요하거든요.”
로벨리아와 케일럽의 대화를 듣고 알렉산드로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로벨리아 그대가 믿는 이라면, 나도 믿어보도록 하지. 핵을 빼내는 동안 대신관이 가만있을 리 없으니 내가 시간을 벌겠다.”
“저와 기사들이 폐하를 엄호하도록 하겠습니다.”
노먼의 충성스러운 말에, 알렉산드로스는 눈짓으로 동의의 뜻을 표했다.
“바로 가지. 대신관은 다시 황궁을 제물로 바칠 준비를 하고 있을 것이다.”
“알렉산드로스, 부디 조심해요!”
로벨리아가 걱정스럽게 말했다.
정말이지, 그를 잃고 싶지 않았다. 특히나 가까스로 그를 되찾은 지금은 더더욱.
알렉산드로스는 그런 그녀를 안심시키듯 웃어 보였다.
“로벨리아, 그대는 상상도 하지 못할 거야. 다시 그대의 곁으로 돌아오게 되어 내가 얼마나 기쁜지. 나는 그동안 죽어 있었고, 지금 막 살아난 것만 같은 기분마저 들어.”
“알렉산드로스…….”
“영원히 불타오를 메스타포에 맹세하지. 나는 신과 그대가 준 이 기회를 무슨 일이 있어도 놓치지 않을 거야.”
알렉산드로스의 맹세. 그것은 너무나 단단하고 믿음직한 울림으로 다가왔다.
“무슨 짓을 해서라도 무사히 그대의 곁으로 돌아오도록 하지.”
그는 가볍게 눈꼬리를 접고는, 로벨리아의 입술 위에 도장 찍듯 입맞추었다. 입맞춤은 아주 잠깐이었으나, 로벨리아는 그와 완전히 이어진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알렉산드로스가 등을 돌려 대신관에게 향했다. 노먼의 목소리가 뒤를 이었다.
“가라, 기사단! 황제 폐하를 지켜라!”
“와아아아!”
“황제 폐하 만세!”
대신관 역시 가만있지 않았다. 알렉산드로스의 귀환 뒤 책략을 준비하는 것인지 잠시 물러나있던 그는, 알렉산드로스가 다가오는 모습을 보고 성기사들을 향해 명령했다.
“전군 공격해라! 황제와 기사단을 막아라! 무엇을 희생하더라도!”
“와아아아!”
성기사들이 계단을 통해 쏟아져 내려왔다.
다시 한번 대규모의 전투가 벌어졌다. 성기사단과 로벨리아의 기사단이 맞붙었고, 홀은 치열한 격전지가 되었다.
“시공의 틈새에서 귀환하여 그대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해 아쉽군, 대신관.”
알렉산드로스가 비웃듯 대신관을 향해 말했다.
“안타까운 소식이 하나 더 있다. 바로 내가 회귀 전의 기억을 되찾았다는 것이다.”
“뭐, 뭐라고!”
“그래. 지금의 나는 지금까지 네가 알던 내가 아니야.”
낮은 웃음소리는 대신관에게 그 어느 때보다도 음산하며 위협적으로 느껴졌다.
알렉산드로스는 앞머리를 거칠게 쓸어넘겼다. 흩어지는 검은 머리칼 사이에서 형형한 안광이 번쩍였다.
“너의 숙적이 돌아왔단 말이다. 지난 생에서부터 이어온 업보가 네놈을 파멸시킬 차례다!”
대신관의 얼굴은 믿을 수 없이 이상한 빛을 띠기 시작했다. 시뻘건 피가 몰린 듯 검붉어지더니, 곧 새파랗게 물들었다.
“큭……. 너, 네, 네가……! 네놈이 감히, 운명을 거역해!”
“운명 나부랭이가 아무리 대단해 봤자 인간의 의지보다 강할 리 없지. 이 세계를 우습게 본 대가를 치르도록 해라, 대신관!”
알렉산드로스의 말과 함께 어마무시한 검격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대신관 역시 가공할 만한 힘을 쏟아내며 그에 응했다.
이 세계의 최강자와, 외부 세계의 최강자의 전투가 시작되었다. 그것은 너무나 파괴적이기에, 기사들의 싸움 따위는 우스워 보일 정도였다.
“지금이야, 케일럽! 알렉산드로스가 대신관의 주의를 끌고 있을 때 핵을 꺼내!”
“네, 노력하고 있어요!”
케일럽은 눈을 감고 심안(心眼)에 모든 집중력을 쏟아부었다.
‘0.1mm만 잘못 조정해도 핵이 아닌 대신관의 육신을 잘라내게 되고, 그럼 상처가 회복되면서 핵의 위치도 이동해서 모든 걸 처음부터 다시 해야 해. 마치 수술을 하듯, 극도로 주의 깊게…….’
7서클의 막대한 마력은 대신관의 육체를 뚫고 들어갔고, 천 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천재의 정밀한 제어능력은 손톱보다도 작은 핵을 추출해내기 시작했다.
옷이 온통 땀으로 젖을 정도로 집중한 끝에, 결국 케일럽은 대신관의 몸 밖으로 핵을 꺼내는데 성공했다.
“됐어요!”
케일럽이 핵을 로벨리아의 앞으로 가져왔다. 다행히도 대신관은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았다.
로벨리아는 핵을 주의깊게 살펴보았다.
그것은 일종의 결정체였다. 단단하고 투명하며 반짝이기에 다이아몬드처럼 보이기도 했으나, 다이아몬드와 달리 오색이 아닌 오로지 하얀 빛으로만 반짝였다.
그 어떤 무색 보석도 그런 식으로 빛나지 않기에, 그것은 아름다우면서도 무척이나 이질적이고 불길하게 느껴졌다.
“더 도와드리고 싶지만…… 황제 폐하의 말씀에 따르면, 이걸 부술 수 있는 사람은 황후 폐하뿐이에요.”
케일럽이 머뭇거리면서 하는 말에, 로벨리아는 그를 향해 미소 지었다.
“아니야. 정말 수고 많았어, 케일럽. 여기서부터는 내게 맡겨.”
“네! 폐하, 믿고 있어요!”
로벨리아는 심호흡을 하곤, 대신관의 핵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때였다.
로벨리아는 순간 정전이라도 된 줄 알았다. 주변이 온통 캄캄해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전이 아니었다. 시야가 완전히 암전되었을 뿐만 아니라,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으니까. 주변에서 그토록 격렬한 전투가 벌어지고 있는데도.
‘핵이 가진 힘이구나.’
로벨리아는 입술을 깨물었다.
핵을 부수는 일이 쉬울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이제부터 어떤 일이 벌어져도 로벨리아는 이겨낼 생각이었다.
바로 그때, 로벨리아의 눈앞에 익숙한 얼굴들이 나타났다. 이런 곳에서 만나리라곤 상상도 하지 못한 얼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