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0. 밝혀진 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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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0. 밝혀진 진실
2022.03.31.
나의 도주 사건 때 알렉산드로스와 노먼 사이에 큰 갈등이 생긴 줄 알았는데……. 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짐작도 가지 않았지만, 그때 이후로 노먼은 알렉산드로스에게 큰 신뢰를 산 듯했다.
‘정말 다행이야. 둘 다 정말 좋은 사람들인데, 둘 사이의 관계가 잘 풀려서.’
내가 그렇게 생각하던 그때였다.
“황후 폐하. 잘 들으십시오. 대신관은 진짜 대신관이 아닙니다.”
“네?”
“지금 대신관…… 그러니까, 요세프 카프카 리히트만을 가장하고 있는 자는 요세프 카프카 리히트만이 아닙니다.”
노먼이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그는 30년 전 진짜 요세프 카프카 리히트만을 살해하고, 그의 자리를 대신하게 된 외신(外神)의 숭배자입니다. 그러니까, 외신이 그 힘을 발휘하는 곳……. 즉 외우주에서 온 자인 것입니다.”
“세상에!”
“그럴 수가!”
나뿐만 아니라 그 자리에 있던 많은 사람들이 충격을 받았다.
“어쩐지, 뭔가 이상하다 했어요! 진짜 대신관님은 그런 짓을 할 만한 분이 아닌데 말이에요. 그 분은 진짜 위인이라고요.”
“제국 황실에 대한 반역을 일으켰을 뿐만 아니라 진짜 대신관님을 살해하고 그를 가장하다니……. 정말 끔찍한 범행이 아닐 수 없습니다.”
“성국은 그걸 알고도 용인하고 있단 말입니까?”
시녀, 기사, 비서관까지 흥분에 차 한 마디씩 말을 얹었다. 그런 와중 내가 말했다.
“대신관이 외우주에서 온 자라는 것은 그가 이 세계의 사람은커녕, 아예 인간조차 아닐 수도 있다는 뜻이군요. 그리고 그 강대한 성력……. 그것은 사실 성력이 아니라 외신의 힘이었겠군요.”
“역시 황후 폐하이십니다.”
노먼이 진중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대신관이 인간이 아니었다니……. 어쩐지 아무리 대신관이라고 해도 지나치게 강하다 싶었어요. 케일럽 님을 고작 몇 분만에 쓰러뜨린 것도 그렇고.”
“그러고 보면, 제가 그 자의 힘을 버티지 못했던 것은 그가 대단히 강하기 때문도 있었지만 그 힘이 굉장히 낯설어서 어떻게 대응해야할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었어요. 그 힘을 온몸으로 받을 때 성력의 성스러운 힘이라고는 할 수 없는, 매우 악의적이고 섬뜩한 아우라가 느껴지더군요.”
케일럽이 떠올랐다는 듯이 말했다.
“그렇게 낯선 힘을 가진 존재라면……. 그를 어떻게 상대할 수 있겠습니까?”
“그 부분에 대해서는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어려울 뿐, 그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니까요. 제가 황제 폐하의 명을 받들어 그간 준비한 일 중에는 외신의 힘에 대항할 방법을 찾고, 저의 군사들을 외신의 힘에 맞설 수 있도록 훈련시키는 일 역시 있었습니다.”
노먼이 모두를 안심시켰다.
“황실 기사단 분들이 그 방법을 당장 숙지하는 것은 쉽지 않겠지만, 하지만 저는 가능하리라 믿습니다. 다른 누구도 아닌 제국 최고의 강자만이 모인 집단, 황실 기사단이니까요. 이런 비상사태이니 최선을 다해주시리라 믿습니다.”
황실 기사단장이 나의 의중을 살피는 것이 보였다. 이런 비상상황이라고는 해도 황실 기사단은 황실의 소속이니, 나의 명령이 없으면 의사결정을 하기 어려운 것이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 생각이에요. 이번 일과 관련하여 황실 기사단의 훈련은 노먼에게 일임할게요.”
“믿어주셔서 감사합니다, 황후 폐하. 결코 그 신뢰를 져버리지 않겠습니다.”
“황후 폐하의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노먼과 황실 기사단장이 고개를 숙였다. 나는 그들에게 눈짓으로 고개를 들어도 된다는 뜻을 보인 뒤, 이렇게 말했다.
“이곳은 안전한 곳인가요? 노먼.”
“황제 폐하께서 모든 수단과 능력을 동원하여 준비하신 피난처입니다. 외우주의 존재에게는 발각되지 않는 종류의 결계가 수 겹으로 둘러쳐져 있어서, 앞으로 한 달 정도는 안전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재정비를 한 뒤, 황궁으로 돌아가도록 하죠. 그릇된 자의 손에 넘어간 황궁을 탈환해야하지 않겠어요.”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비밀통로의 입구가 있는 곳에 피난처를 마련한 것도 알렉산드로스의 의도였을 거야. 이것을 이용할 방법이 있을까.’
잠시 고민한 내가 말했다.
“황실 기사단과 슈워츠코프 기사단을 재정비 한 뒤, 황궁의 정문을 통해 탈환전을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비밀통로를 통과하여 황궁의 내부부터 탈환전을 하는 것이 좋겠어요. 적의 의표를 찌르는 것이죠.”
당연하지만 나는 행정가지 전술의 전문가는 아니었다.
그러니 이 발언에는 레퍼런스가 있었다. 바로 한국전쟁에서 이루어졌던 ‘인천 상륙 작전’이었다.
1950년 9월, 대한민국 국군의 방어선은 후퇴에 후퇴를 거듭하여 낙동강까지 밀려나 있었다.
이때 UN군 사령관 맥아더 장군은 인천에서 UN군을 상륙시켜 전진하는 일명 ‘인천 상륙 작전’을 펼쳤다.
조선인민군은 낙동강의 방어선에 거의 모든 전력을 집중하고 있던 상황이었기 때문에, 맥아더 장군의 의표를 찌르는 전략은 수도권 탈환의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황후 폐하, 정말 대단하세요! 어떻게 그런 전술까지 생각해내셨어요?”
내 말에 시녀들이 감탄했다. 노먼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저 역시 기습을 제안하려 했는데, 저와 황후 폐하의 의견이 맞아서 다행입니다.”
‘알렉산드로스, 그는 상황이 이렇게 될 것까지 예상하고 있었던 것일까?’
그에 대한 생각을 하니 가슴속이 찌르르 아파왔다.
‘그렇게 사라진 뒤로 어떻게 된 건지, 돌아올 방법은 있는지 통 알 수가 없으니…….’
시급한 일들이 많아 걱정과 불안을 잠시 미루어두기는 했지만, 그것이 내 마음 속에서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그에 대한 생각을 하면 나는 금방 울고 싶은 기분이 되어버렸다.
나는 고개를 세차게 저어 잡념을 털어버렸다.
“황궁의 외부에서부터 시작하는 것보다 내부에서부터 파고드는 것이 훨씬 좋은 전략이 될 거예요. 황궁 외곽에는 경비가 쫙 깔렸을 것이고, 지금쯤 우리가 사라졌다는 것도 알았을 테니 보안에 더더욱 힘을 쓰고 있겠죠. 하지만 알려지지 않은 비밀통로를 이용해 내부로 침입하면……. 대신관은 어디를 방어해야할지 알 수 없어져요.”
“저도 같은 의견입니다. 그렇다면 황궁 탈환 작전은 비밀통로부터 시작하는 것으로 하죠.”
그렇게 우리는 그날의 회의를 마무리 지었다. 그렇다 해도 노먼은 황실 기사단에게 대응법을 훈련시키느라 쉴 수 없었지만.
‘일이 이렇게 될 줄 알았으면, 괜히 시간 끌지 말고 바로 알렉산드로스에게 내 마음을 전할 것을.’
나는 한숨을 쉬었다.
‘만약……. 그가 그렇게 시공의 틈새로 끌려들어간 것이 마지막이라면, 그럼 난…….’
줄곧 외면하고 있던 두려움이 등골을 싸늘하게 만들었다.
‘만일 그렇게 되면, 나는 나 자신을 도저히 용서할 수 없겠지.’
끊임없이 나를 배려하고, 행복하게 만들어주었던 그.
나를 위해 너무나 많이 변했던 그.
내가 죽은 줄 알았을 때조차, 계속해서 변치 않는 진심으로 나를 사랑했던 그.
‘나는 줄곧 그런 그를 믿지 못하고, 밀어내기만 했지. 그는 그렇게나 내 일상을 행복으로 가득 채워주었는데, 난 한 번도 그에게 되돌려주지 못했어.’
그의 그 깊고도 무거운 감정에 조금도 보답하지 못한 상태로 그를 다시는 만날 수 없게 된다면…….
‘그렇게 되면 난 도저히…….’
“폐하, 괜찮으신가요? 안색이 너무 나쁘세요.”
시녀의 말에 나는 뒤늦게 상념에서 빠져나왔다. 나는 애써 그녀에게 웃어보였다.
“응, 난 괜찮단다. 잠시 다른 생각을 했구나.”
“폐하…….”
시녀들의 걱정스런 눈동자들이 나를 향했다.
‘내가 이 아이들을 안심시켜주기는커녕, 걱정을 시키고 말다니. 그러면 안 돼. 가장 윗사람인 내가 더 희망을 가지고 솔선수범해야지.’
나는 마음을 굳게 먹기 위해 다시 한번 다짐했다.
‘너무 걱정하지 말자. 우선 지금은 황궁을 탈환하는 것만 생각하는 거야. 그것이 내가 당면한 문제니까.’
***
한편, 알렉산드로스는 로벨리아의 일기를 읽고 있었다.
그것은 충격의 연속이었다. 그녀의 일기에는 그의 상상을 뛰어넘는 놀라운 이야기들이 적혀 있었다.
‘그녀가…… 정말로 빙의자였다니.’
라이트 자작부인의 폭로 사건은 자작부인과 대신관의 공모로 인한 모함으로 결론지어졌지만, 놀랍게도 그녀의 주장은 일부 사실이었다.
로벨리아는 이 세계 출신의 사람이 아니었다. 그녀는 성녀와 같은 세계에서 온, 진짜 빙의자였다.
라이트 자작부인이 로벨리아가 빙의자라는 사실을 폭로하였을 때, 여론이 로벨리아를 비난한 내용 중에는 황제를 속인 것에 대한 비난도 있었다.
그만큼이나 자신의 배우자가 자신이 알던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 자신이 알던 사람의 겉껍질만 뒤집어썼을 뿐 실상은 전혀 다른 사람이라는 사실은 누구에게나 큰 충격일 것이다.
하지만…….
‘분명 충격적이기는 하지만…… 사안의 중대성만큼이나 충격받지는 않은 것 같군.’
알렉산드로스는 그런 생각을 한 자신에게 놀랐다.
그가 누구보다도 사랑하며, 전 생애에 있어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그녀였다. 그녀가 죽었다고 생각했을 때는 충동적으로나마 대의를 포기하고 목숨을 끊을 생각마저 들 정도로.
그런 그녀에 대한 문제인데 그렇게까지 충격받지는 않았다니? 어떻게 그럴 수가 있단 말인가?
‘그건 아마도…….’
알렉산드로스는 그 어느 때보다도 진중한 태도로 생각했다.
‘나는 아무래도, 이 사실을 내심으로는 눈치채고 있었을지도 모르겠군. 그저 눈치채지 못한 척 하고 있었을 뿐.’
그랬다.
어느 순간 행동, 태도, 표정, 말투, 취향, 가치관, 모든 것이 한 순간에 다른 사람 수준으로 변화해버린 그녀를 보면서도, 그 사실을 조금도 예상하지 못하기에는…….
그는 지나치게 영리했고 또 노련했다.
사람의 영혼이 뒤바뀌다니, 보통 사람들이라면 가정하기도 어려울 정도로 황당무계한 일이었고, 그렇기에 그도 의식적으로는 그런 생각을 하지 않았지만…….
무의식의 수면 아래, 그의 본능은 조금씩 눈치채가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의 아내는 어느 순간부터, 이전과 다른 사람이 되었다고.
‘그리고 내가 사랑하는 로벨리아는 분명히 변화 이후의 사람이다. 이전의 사람에게는……. 미안함은 있지만, 역시 사랑의 감정은 느껴지지 않아.’
그러니 사랑하는 사람에게 배신당했다거나, 속았다고는 느껴지지 않았다. 그가 사랑한 건 처음부터 바뀐 이후의 로벨리아였으니까.
‘그보다는 이런 어마어마한 비밀을 숨기고 있느라 대단히 괴롭고 불안해했겠군.’
그녀에게 배신감을 느끼기는커녕, 그런 생각을 하면 알렉산드로스는 가슴 한편이 저릿하게 아파왔다.
‘그녀의 책임감 강한 성정이라면, 그녀는 자신이 나를 속였다고 생각하고 내게 죄책감을 느끼고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이 일기를 같이 보자고 한 것도 그런 죄의식의 일환이었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