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9. 예상치 못한 지원군2022.03.27.
상황이 이렇게 될 것을 미리 알았던 것인지, 알렉산드로스가 준 신호기는 마력장을 이용한 칼로 쓸 수 있었다. 어디까지나 다용도 칼 정도의 작은 크기라, 검투를 벌이거나 하는 것은 무리였으나, 그 예리함은 대단해서 강철도 잘라낼 수 있을 정도였다.
“손 조심해, 케일럽.”
하지만 그것은 이 물건이 유용한 만큼 아주 위험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케일럽이 차고 있는 마력제어구 대신 그의 손가락을 자르지 않도록, 나는 심혈에 심혈을 기울여야만 했다.
“괜찮아요. 전 황후 폐하를 믿어요!”
그의 강아지처럼 순한 눈망울에는 굳건한 신뢰가 반짝이고 있어, 그에 대한 고마움과 부담감이 동시에 느껴졌다.
‘케일럽이 날 믿어주는 만큼 잘해야만 해. 이 아이가 이제껏 내게 바친 헌신에 조금이나마 보답해야지.’
그렇게 생각한 나는 이를 악물고 마도구를 쥔 손에 힘을 주었다. 마치 광선검처럼 마도구에 푸른 빛이 어리고, 빛으로 이루어진 날이 느릿하게, 하지만 분명하게 마력제어구를 파고 들어갔다.
‘힘을 약하게 주면 잘리지 않지만, 그렇다고 힘을 너무 주면 마력제어구와 함께 케일럽의 경동맥까지도 끊어버릴 수 있어. 한순간도 집중력을 잃어선 안 돼.’
식은땀이 속옷을 다 적실 정도로 긴장감 어린 시간이 이어졌다. 한동안 나와 케일럽 둘 모두 숨소리마저 함부로 내지 못했다. 그리고 마침내…….
“됐다!”
덜그렁하는 쇳소리와 함께 케일럽의 손목에서 마력제어구가 빠져나오자 나와 케일럽 모두 탄성을 흘렸다. 그마저도 성기사들이 깰까 봐 큰 소리로 말할 수는 없었지만.
“손은 좀 괜찮니?”
“덕분에요!”
자유로워진 자신의 두 손을 믿을 수 없다는 듯 들여다보던 케일럽이 활짝 웃었다.
“내가 시녀들을 잠에서 깨울 테니, 네가 기사님들의 구속구를 풀어주겠니?”
“네! 맡겨만 주세요.”
십여 분 뒤, 감옥에 갇힌 일행들은 모두 함께 탈옥할 준비를 마쳤다. 나는 일행들을 향해 작은 소리로 말했다.
“성기사들이 방심해서 늘어진 지금이 기회예요. 제가 신호를 주면, 케일럽은 문을 열고, 기사분들은 성기사들을 제압해주세요. 기습해서 소란을 일으키거나 원군을 부르기 전에 제압하는 것이 중요해요.”
“알겠습니다.”
내가 신호를 보내자, 케일럽이 섬세한 마력운용능력으로 감옥의 몇 겹에 달하는 잠금장치를 풀어냈다.
“하하! 제국의 황실이니 뭐니 해도 별거 아니었잖아. 황제 하나 사라지니까 쩔쩔매는 꼬락서니하고는.”
“고작 이런 거에 그렇게 긴 시간을 소모했을 줄이야.”
감방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서는 성기사들이 연회음식과 술을 가져다놓고 웃고 떠들고 있었다. 개중에는 술에 질펀하게 취해 잠든 이도 몇 명 보였다.
“제국이 쫄딱 망한 와중에도 대신관님을 따르지 않고 그 멍청한 황후를 따르겠다는 녀석들은 대체 뭐야.”
“황제가 사라졌는데 질질 짜지 않는 건 대단하긴 하더라. 그래봤자 제까짓 게 뭘 어쩌겠냐만.”
“줄을 잘못 서도 한참 잘못 선 머저리들이지. 어차피 죽을 거, 여자들은 내 밤 시중이나 들어주고 죽었으면 좋겠네. 꽤 예쁘던데.”
“특히 황후의 시녀들 말이지.”
“사실 황후 본인도 괜찮지.”
“처형 전에 황후와 뜨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다니 간수 노릇도 꽤나 나쁘지 않군.”
빠드득. 케일럽에게서 이 가는 소리가 들렸고 성기사들이 두리번댔다.
“어디서 이상한 소리 나지 않았냐?”
“쥐새끼 소리겠지.”
쥐 소리라는 말에 다른 성기사들은 납득한 듯하였으나, 그중 특별히 감이 좋아 보이는 한 남자는 납득하지 못한 듯했다.
“아니야. 쥐새끼 소리라기에는 뭔가 이상했어. 내가 한 번 보고 올게.”
“그래라.”
“저 녀석은 제가 제압하게 해주세요, 황후 폐하.”
“그러렴. 하지만 무리하면 안 돼.”
이쪽을 향해 다가오는 성기사를 보며 케일럽이 소곤거렸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성기사가 코너를 돎과 동시에, 케일럽의 마법이 작렬했다.
“……!”
일단 목소리를 잃는 마법. 정확히는 일정 공간 이상으로 소리가 전달되지 않게 하는 마법이라고 했는데 나로서는 정확한 메커니즘은 알 수 없었다. 다만 이제부턴 그가 아무리 비명지르고 발버둥 쳐도 동료들은 결코 알 수 없으리라는 사실은 분명했다.
“!!”
그리고 마력으로 이루어진 금줄로 손목, 발목이 동여매지는 마법. 어디선가 나타난 녹색 줄에 결박당하자 성기사는 그대로 통나무처럼 쓰러질 뻔했으나, 눈치 빠르게 튀어나간 한 황실 기사가 그가 넘어지지 않게 붙잡아주었다.
“감히 그 더러운 혀를 놀려 세계에서 가장 고귀하신 분을 욕되게 했겠다?”
케일럽이 음산한 목소리로 속삭이자 성기사는 필사적으로 고개를 저었다. 그의 얼굴은 온통 공포와 경악으로 물들어 있었으며, 눈과 입은 평소의 몇 배나 벌어져 있었지만 신기하게도 소리는 조금도 나오지 않았다. 황실 기사들은 그를 감방에 던져넣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우리가 갇혀 있던 그곳이었다.
“그곳에서 충분히 반성하도록 해.”
케일럽이 감방 창살 너머로 경고했다.
“너와 딱 잘 어울리는 친구들과 함께 말이지.”
“……!!!!”
별안간 어둠 속에서 아주 작은 소리가 들려왔다. 그것은 감방 가까이서 귀를 기울이지 않으면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은 소리였으나, 돌바닥을 손톱으로 긁는 듯 몸서리가 쳐지는 이상한 소리였다. 그것을 들은 모양인지 성기사의 얼굴이 더더욱 하얗게 질려갔다. 잠시 후…….
“헉!”
시녀들이 놀란 듯이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기사들과 비서관, 그리고 나 역시 놀라기는 마찬가지였다. 살면서 그렇게 끔찍한 풍경은 본 적이 거의 없었으니까. 감방 바닥의 틈새, 벽, 창틀을 타고 시커먼 생명체들이 스멀스멀 기어오기 시작했다. 그것은 벌레들이었다. 시커먼 껍질에서 반질반질한 빛이 나는 바퀴벌레, 살이 통통하게 오른 꼽등이, 돈벌레, 지네, 갑충, 송충이, 벌레는 아니지만 거의 내 팔뚝 크기는 될 것 같은 시궁쥐까지. 마치 이 세상의 가장 더럽고, 흉측하고, 끔찍한 생명체는 다 모인 듯한 무시무시한 풍경이었다. 이 감옥에 그렇게 많은 수가 살고 있는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던 양의 벌레들이, 새카만 양탄자처럼 감방 바닥을 가득 채우더니……. 느리게, 하지만 분명하게 성기사의 몸을 타고 오르기 시작했다. 성기사는 손목과 발목이 묶인 채로 그렇게 높이 뛸 수 있을 줄은 상상도 하지 못한 높이를 뛰어올랐다. 하지만 그런 저항도 오래가지 못했다. 끝끝내 벌레의 군단은 성기사의 몸을 뒤덮고, 그의 옷 사이로 파고들고, 심지어 입이나 귀, 코까지 파고들었다. 지옥도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로 처참한 풍경인데도 벌레들의 바스락거리는 소리 말곤 거의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는 게 인상적이었다. 눈물, 콧물, 침, 터져나간 벌레의 체액으로 뒤범벅이 된 성기사의 소리 없는 절규를 지켜보며 한 시녀가 내게 말했다.
“정말 끔찍하네요.”
이레네는 성기사를 보았다가 질린 듯한 얼굴로 케일럽을 보았다. 이 와중에 케일럽은 아무 연민도, 죄책감도 느끼지 않는 듯한 즐거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아, 벌주는 데 생각보다 오래 걸렸네요. 죄송해요.”
언제 벌레떼로 성기사를 고문했냐는 듯 순진한 얼굴로 돌아온 케일럽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나는 괜찮다는 뜻을 담아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케일럽이 시간을 끌어준 덕에, 웃고 떠들던 성기사들은 어느샌가 술에 취해 곯아떨어져 있었다. 덕분에 우리는 식은 죽 먹기로 그들을 제압할 수 있었다.
“입에 재갈을 물리고, 소지품을 전부 빼앗고, 손발을 결박하고 감옥에 가두도록 해요.”
모든 성기사들을 아까의 그 사람과 똑같은 꼴을 만들어준 뒤, 나는 모두의 선두에 섰다.
“앞장 설 테니 저를 따라오세요. 지금부터 갈 길은 몹시 복잡하니까, 한순간이라도 한눈을 팔면 길을 잃을지 몰라요. 큰 소리를 내지 않도록, 질서정연하게 움직여 아무도 다치지 않고 무사히 목적지에 닿을 수 있도록 해요.”
“네!”
*** 우리는 숨죽여 감옥을 빠져나온 뒤, 벽의 비밀장치를 조작하고, 서재의 책장을 밀어 비밀의 문을 통과하는 등 굉장히 복잡한 길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황궁에 이런 비밀통로가 있는 줄은 몰랐어요.”
“황족분들만이 사용하시는 비밀용 탈출구가 있다는 소문은 들었지만 실제로 눈으로 본 건 처음입니다.”
사실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알렉산드로스가 이번에 알려주기 전까지는 비밀통로의 존재조차 몰랐으니까.
‘길이 복잡해 헷갈릴까 봐 걱정했는데, 정확히 기억하고 있었구나. 다행이야.’
비밀통로는 오랫동안 쓰이지 않은 곳이라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길이 잘 닦여 있고, 중간중간 등불도 켜 있었으며, 먼지나 거미줄도 없었다. 아마 어떠한 마법의 힘이 이곳을 청결하고 안전하게 유지하고 있는 것 같았다. 길은 굉장히 길었다. 세 시간을 쉬지 않고 걷자, 드디어 외부의 공기가 느껴지기 시작했다.
“거의 다 왔어요!”
“이 끝에는 수도 외곽의 한 건물이 있어요. 그곳에서 우리들의 지원군이 기다리고 있을 거예요.”
나는 알렉산드로스에게 들은 내용을 모두에게 말했다.
‘하지만 지원군이 누구인지는 나도 아직 몰라.’
나는 생각했다.
‘내가 이 신호기로 불러낸 지원군은 대체 누굴까? 황궁이 이 지경이 되었는데, 아직도 알렉산드로스와 나를 도와줄 사람이 남아 있을까?’
그런 나의 의문은 출구를 빠져나왔을 때 풀렸다.
“제국의 영원한 달, 황후 폐하를 뵙습니다.”
익숙한 은발 위로 떠오르는 새벽 해의 노란빛이 바스러졌다. 아름다운 붉은 눈, 나보다도 새하얀 피부. 그 모든 것들은 몹시 그립고도 반가운 것들이었다.
“노먼!”
반가움에 탄성을 지른 나를 향해 노먼 역시 부드럽게 웃었다. 그의 그 따스하고 인간적인 미소를 본다면, 그 누구도 그를 감히 괴물 공작이라고 부를 수 없으리라.
“알렉산드로스가 말한 원군이 당신일 줄은 꿈에도 몰랐어요. 세상에나! 노먼, 당신이 어떻게 여기까지……. 공작저에서 자숙하고 있었던 거 아니었어요?”
그의 자택 연금은 풀렸으나, 그는 세간의 시선을 의식해 당분간 나를 만나지 않고 수도의 자택에서 자숙하겠다고 했고 나는 그런 그의 의사를 존중했다. 그래서 우리 사이에는 도망 사건 이후로 연락이 거의 오가지 않은 상황이었다. 내 말에 노먼은 한결 진지한 얼굴이 되어서 말했다.
“죄송합니다, 폐하. 사실 세간의 시선을 의식하여 연락을 삼가겠다고 한 것은 변명이었습니다. 저는 그동안 황제 폐하의 비밀 임무를 맡아 수행하고 있었기에 연락을 드리지 못했습니다.”
“알렉산드로스의…… 비밀 임무라고요?”
“예. 그분께서는 대신관이 얼마나 사악하고 위험한 인물인지, 그리고 성국이 얼마나 부패했는지 일찍부터 알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그에 대한 조사와 작전의 준비를 담당할 사람을 찾으셨고, 영예롭게도 제가 그 임무를 맡게 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