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8. 반격의 시작2022.03.24.
“여우 한 마리도 빠져나가지 못하다니, 희망이라곤 눈 씻고 찾아볼 수도 없군.”
누군가의 한숨 섞인 말에 나는 그쪽을 돌아보았다. 그는 알렉산드로스의 비서관인 로버트였다. 나의 시선을 느꼈는지 그는 놀라 고개를 숙였다.
“심기를 거스르게 해드려 죄송합니다. 노인네의 혼잣말이었습니다.”
“아니에요. 그런 말을 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죠. 더군다나 비서관은 그이의 가장 가까운 사람 중 하나였잖아요.”
알렉산드로스에게 듣기로는, 로버트는 그가 보잘것없는 황자였던 시절부터 가장 가까운 곳에서 충성을 바쳐왔다고 했다. 공적인 영역, 사적인 영역 모두에서. 정이 들 대로 들 수밖에는 없었을 것이다.
‘말하자면 알렉산드로스의 아버지답지 못한 친부보다도 더 아버지에 가까운 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지.’
그렇기에 나는 그의 알렉산드로스에 대한 감정을 존중했다. 아들 같은 사람이 갑자기 사라져서 그 역시 무척 두렵고 괴로울 것이다. 내 말에 로버트는 황송한 듯 대답했다.
“아닙니다. 제가 어찌 감히……. 황제 폐하께서 가장 사랑하신 분도, 가장 가까운 곳에 두신 분도 황후 폐하이십니다. 그러니 제가 감히 황후 폐하의 앞에서 그런 내색을 하는 것은 불경한 일이지요. 송구합니다.”
“물론 황제 폐하는 제게도 무척 소중한 분이고, 그렇기에 저도 무척 두렵고 걱정이 돼요. 하지만 그렇다고 비서관이 황제 폐하께 소중한 이가 아닌 것은 아니에요. 소중한 사람이 사라졌으니, 두려움과 불안을 느끼는 건 당연하지요. 억지로 숨길 필요 없어요.”
내 말에 로버트의 눈은 놀란 듯이 커졌다.
“황후 폐하……. 이런 상황에서도 어찌……. 저 같은 아랫것을 이리도 걱정하고 위해주시다니…….”
“그런 식으로 말하지 마세요. 힘든 사람끼리 서로 힘이 되어주는 것일 뿐인걸요.”
“이렇게 황송할 데가……. 그런 분이라고 소문은 많이 들었지만, 이렇게 제가 직접 겪게 될 줄이야…….”
노인의 주름진 눈가에 물기가 어렸다. 그는 손수건으로 눈가를 찍어내기 시작했다.
“송구하지만……. 사실은 그렇습니다. 너무나 걱정되고, 두렵습니다. 그분께서 다시는 돌아오지 못하실까 봐. 그분의 용안을 뵙는 것이 몇 시간 전이 마지막이 될까 봐……. 이렇게나 무력감을 느낀 것은 너무나 오랜만입니다.”
“저도 그래요. 그분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으로서 너무 두렵고 괴로워요.”
나는 로버트에게만 들릴 정도로 목소리를 낮추었다.
“사실은……. 사라지기 전, 그이가 저에게 남긴 말이 있어요. 그분은 대신관의 행동을 예상하고, 저에게 대처방법을 알려주셨죠.”
“예?! 그분께서 어떤 말씀을 하셨습니까?”
“지금은 알려드릴 수가 없어요. 미안해요. 이것은 비서관을 믿지 못해서가 아니에요.”
“아, 아닙니다. 제 생각이 짧았습니다. 너무나 놀랍고 반가워서 그만…….”
그렇게 말하는 로버트의 안색은 눈에 띄게 밝아져 있었다. 수심과 절망만이 가득했던 아까와는 확연히 다른 모습이었다. 나는 그런 그를 보며 미소 지었다.
“그러니 우리 희망을 잃지 않도록 해요. 저는 그이를 믿고, 이곳에서 제가 할 수 있는 일을 최대한 해나갈 생각이니까요.”
“알겠습니다. 행여 도움이 필요하시다면 언제든지 맡겨주십시오. 이 늙은이, 황후 폐하의 말씀이라면 목숨을 걸고서라도 따르겠습니다.”
‘의욕과 희망으로 가득해졌네. 정말 다행이야.’
나는 여우를 쓰다듬으며 생각했다. 황후궁 사람들을 피신시키기 전후의 그 짧은 순간, 알렉산드로스와 나는 이런 대화를 나누었다.
“황후궁을 공격하려는 것을 보면 알겠지만, 대신관은 황실을 장악하려는 야욕으로 가득 차 있어.”
알렉산드로스는 나의 손을 잡고 진중한 얼굴로 말했다.
“만일 내게 어떤 일이 생긴다면, 이것을 사용하도록 해.”
“이게 뭐죠?”
“신호를 보내는 마도구야. 이걸로 우군에게 신호를 준 뒤, 지금부터 내가 말하는 곳으로 가. 최대한 많은 협력자들을 찾아서 데려가도록 해. 한 명 한 명이 큰 힘이 될 터이니.”
‘소지품 검사는 받았지만, 방심한 탓인지 여인의 속옷 안까지는 확인하지 않아서 다행이야.’
나는 혹시 몰라 마도구를 거들 안쪽에 넣어두고 있었고, 덕분에 소지품 검사에서도 들키지 않을 수 있었다. 여우의 푹신한 털을 매만지며, 나는 철창 밖의 낌새를 끊임없이 관찰했다.
‘승리에 취한 것인지, 경계하는 인원은 많지 않아. 알렉산드로스도 사라졌고, 무력을 가진 사람은 전부 제압했다고 생각했으니 그렇겠지.’
“오늘 밤에는 작전의 성공을 축하하는 연회를 열어주신다고 하더군. 경비를 서는 인원은 음주는 불가능하겠지만…….”
“아주 조금 마시면 안 들키지 않을까? 딱 한 잔만 하자고.”
“거참, 이러면 안 되는데…….”
성기사들이 저들끼리 시시덕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저들이 가장 지치고 방심했을 때, 그때를 노리자. 기회는 단 한 번뿐이야.’
그렇게 생각하며 나는 남몰래 이를 악물었다.
‘대신관, 그 인간의 마음대로 되도록 내버려 두지 않겠어.’
***
“이곳은 정말로 탈출구라곤 없군.”
한편, 황후궁과 함께 다른 세계로 빨려 들어간 알렉산드로스는 탈출구를 찾고 있었다. 그러나 그곳은 덩그러니 놓여 있는 황후궁 외에는 검은 어둠뿐으로, 그야말로 무(無)만이 존재하는 곳이었다. 그러니 탈출구 역시 있을 턱이 없었다. 한참을 탐색에 몰두하던 알렉산드로스는 결국 한숨을 쉬며 계단에 걸터앉았다.
‘한 번에 절명시키는 것이 아니라, 이런 곳에 사람을 보내 말려 죽이려 하다니 악취미로군. 이런 끔찍한 곳에 온 것이 그녀가 아니라서 그나마 다행이라 해야 할지.’
잠시 휴식을 취하며 끝없이 이어지는 어둠을 응시하던 그의 눈에 이상한 것이 들어왔다. 가까이 가서 확인해보니, 그것은 사람의 잘린 팔이었다. 귀여운 잠옷 소매는 검붉은 피로 물들어 있어 더욱 흉물스러웠다.
‘황비의 것인가. 그녀가 나를 밀쳐낼 때 함께 이곳으로 오게 되었나 보군.’
전쟁터에서는 더욱 끔찍한 꼴도 밥 먹듯이 보았기에 보기에 괴로울 정도는 아니었으나, 그렇다고 유쾌한 풍경도 아니었다. 그때였다.
‘음? 이건…….’
잠옷 소매 안쪽으로 작은 주머니가 삐져나와 있었다. 알렉산드로스는 그것을 꺼내어 열어보았다. 그 안에 있는 것은, 이런 곳에서 볼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한 물건이었다.
‘이것은……. 열쇠의 반쪽이 아닌가?’
틀림없었다. 그것은 로벨리아와 나누어 가지기로 한 금고 열쇠였다.
‘이걸 왜 황비가 가지고 있는 거지?’
알렉산드로스는 그 이유를 쉽게 추측할 수 있었다. 금고 안에 든 것이 로벨리아의 약점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고, 그 안에 든 것을 훔치려고 로벨리아의 열쇠를 훔친 것이리라.
‘로벨리아의 것을 훔치는 건 쉬워도 내가 가진 것을 훔치는 건 쉽지 않기에 이것만 가지고 있었던 것이겠지. 안 봐도 뻔하군.’
알렉산드로스는 옷 안쪽으로 걸치고 있던 열쇠 목걸이를 꺼냈다. 두 개의 조각을 이어붙이니, 그것은 언제 반으로 나뉘었냐는 양 온전한 하나의 열쇠가 되었다. 열쇠를 매만지고 있자니 로벨리아에 대한 그리움만이 더욱 짙어졌다.
‘가만. 이렇게 열쇠가 하나로 모인 김에, 그녀의 일기를 꺼내어 본다면…….’
보안을 위해 금고가 중앙궁 집무실에 있다는 가짜 정보를 퍼뜨려두었지만, 사실 집무실에 있는 금고는 가짜였다. 진짜 금고는 로벨리아의 침실에 숨겨져 있었다. 그 사실을 아는 사람은 알렉산드로스와 로벨리아, 단 두 사람뿐이었다.
‘대신관이 집요하게 로벨리아를 노린 데에는 이유가 있을 테고, 아마 그 해답이 일기에 있겠지. 그것이 이곳에서 빠져나갈 힌트가 되어줄지도 몰라.’
하지만 갈등이 되는 것이 사실이었다.
‘그 금고를 여는 것은 그녀와 함께하기로 약속했지. 아무리 위기 상황이라고 해도 그 약속을 멋대로 깨버리는 것이 옳은 일인가?’
한참을 고민하던 알렉산드로스는 결국 결론을 내렸다.
‘위기 상황이니 한 개의 정보도 아쉬운 판이다. 이곳을 빠져나가기 위해 최대한 많은 것을 조사해둘 필요가 있어.’
알렉산드로스는 생각했다.
‘지금 저쪽에서는 내가 없는 사이에 대신관이 어떤 짓을 벌였을지 모른다. 그녀를 지키기 위해서라도, 한시라도 빨리 돌아가야 해. 약속을 깬 것에 대해 사과하는 것도 결국 내가 돌아가야만 할 수 있는 것이니.’
결국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황후궁의 내부로 향했다. 한 손에는 온전한 열쇠를 움켜쥔 채. 알렉산드로스는 곧장 로벨리아의 침실에 들어가, 숨겨진 금고를 찾았다. 그것은 책이 빼곡히 꽂힌 책장에 책의 모습으로 위장되어있었다. 마지막까지 갈등하던 그는, 결국 열쇠구멍에 열쇠를 꽂아 돌리곤 그 안에 든 노트를 꺼냈다.
‘이로써 그녀가 숨기고 있는 비밀을 알게 되겠군.’
알렉산드로스는 깊은 숨을 내쉰 뒤, 일기를 펼쳤다. *** 밤이 깊은 시각.
“케일럽, 케일럽. 자고 있니? 일어나보렴.”
누군가의 손길에 케일럽은 무릎에 파묻고 있던 고개를 들었다.
“폐하…….”
시야 가득 로벨리아의 얼굴이 들어오자, 케일럽은 금방이라도 울고 싶은 기분이 되었다. 어느 때고 그녀에게 도움이 되고 싶었는데. 자신의 마법이 그녀에게 도움이 된다는 사실은 그의 몇 안 되는 자랑거리였는데. 그렇게나 무참하게 패배한 뒤, 그는 도저히 로벨리아를 볼 면목이 없게 되었다.
“죄송해요, 폐하. 제가 아무런 도움이 못 돼서……. 제가 폐하를 구해드려야 하는데…….”
“얘는,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니? 나는 너를 탓하려고 깨운 것이 아니야.”
로벨리아는 케일럽을 진정시키며 속삭였다.
“지금 이럴 때가 아니야. 성기사들이 전부 방심한 지금이 기회야.”
그녀의 말에 케일럽은 창살 너머를 보았다. 아닌 게 아니라, 승리와 술에 취한 성기사들은 여기저기 늘어져 있었다. 게다가 그 숫자도 낮에 비해 확연히 적었다.
“정말 그렇네요. 하지만 어떻게 하죠? 저는 이것 때문에 마법을 못 쓰고……. 다른 기사분들도 마찬가지일 텐데.”
그의 말에 로벨리아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그녀는 한 손으로는 입술 위에 검지를 댄 채, 다른 한 손으로 어떤 물건을 꺼내 보였다. 작은 버튼이 달린 그것은 얼핏 보기에 신호를 보내는 물건처럼 보였다. 그런 한편, 옆쪽에는 빛을 뿜어낼 것 같은 작은 램프가 달려 있었다.
“이게 뭐죠? 신호를 보내는 마도구처럼 보이는데…….”
“지금부터 어떻게 쓰는지 보여줄게.”
로벨리아가 어둠 속에서 눈을 빛내며 웃었다.
“손 조심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