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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7. 점령당한 황궁 (127/151)

127. 점령당한 황궁2022.03.20.

16549698639395.jpg“대신관! 신성한 황궁에서 이런 짓을 벌이다니! 우리 황실기사단은 반역자를 결코 용서하지 않겠다!”

16549698639395.jpg“폐하! 괜찮으신가요?”

황궁의 이변을 알고 달려온 황실기사단과 외출했다가 막 돌아온 케일럽이 도착했다.

16549698639395.jpg“기사들과 케일럽 님이 오셨어요!”

16549698639395.jpg“이제 우린 살았어!”

궁인들은 몹시 기뻐했으나 그 기쁨은 오래가지 못했다. 믿을 수 없게도, 제국에서 가장 강한 자들만이 모였다는 황실기사단은 성기사단의 성력 앞에 무참히 쓰러지고 말았다. 케일럽 역시 마찬가지였다.

16549698639418.jpg“크윽!”

16549698639423.jpg“천 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천재라더니, 과연 그 나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의 마력이로군요.”

대신관은 우아한 미소를 지으며 무릎 꿇은 케일럽을 내려다보았다. 케일럽이 제압당하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는 순식간에 자랑스러운 마법의 힘을 잃은 채 성력의 창살에 갇힌 꼴이 되어버렸다.

16549698639423.jpg“이대로 신의 곁으로 보내기에는 아까운 힘이네요. 그 힘을 신을 위해 쓴다면 큰 도움이 될 터인데.”

16549698639418.jpg“어디서 개수작을……! 신인지 나발인지 그런 거 관심 없어! 내 충성의 대상은 오로지 한 분뿐이야!”

케일럽이 이를 부득부득 갈며 소리쳤다.

16549698639423.jpg“한 분. 그렇죠.”

대신관은 그제서야 기억이 났다는 듯 로벨리아를 돌아보았다. 그녀를 모욕하려는 의도가 다분한 태도였다.

16549698639423.jpg“황후 폐하. 이제 이곳에 남은 이는 아무런 무력도 가지고 있지 않은 당신뿐이군요. 실로 다행인 일입니다. 마지막으로 남은 이가 소드마스터이자 제국에서 제일 강한 이로 불리는 황제가 아니라서. 역시 이것도 신의 뜻이 아니겠습니까.”

대신관이 조롱의 말을 던졌으나 로벨리아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그저 입술을 짓씹으며 상대를 노려볼 뿐이었다. 대신관은 그들을 둘러싸고 지켜보고 있는 사람들을 향해 선언하듯 말했다.

16549698639423.jpg“황궁의 여러분. 보시다시피 황궁은 저에게 점령되었습니다. 황제는 사라졌고 마법 신동과 황실기사단은 신의 발 앞에 무참히 무릎 꿇었기에, 여러분을 지킬 수 있는 이라고는 무력한 황후뿐이로군요.”

그는 눈꼬리를 휘어 웃으며 검지를 들어 올렸다. 희고 거미처럼 긴 손가락이었다.

16549698639423.jpg“여러분께 선택할 기회를 드리겠습니다. 신의 앞에 무릎 꿇을 것이냐, 아니면 무너진 황가에 충성을 바치고 무의미한 최후를 맞을 것이냐. 고민할 시간은 많지 않으니, 지금 당장 선택하도록 하세요.”

그를 둘러싸고 있던 궁인들은 창백한 얼굴로 서로의 눈치를 살폈다. 하지만, 결국 한두 명이 무릎을 꿇기 시작하고……. 결국 대부분의 사람들은 대신관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16549698667856.jpg‘그들을 원망할 수는 없어. 대신관의 말대로 나는 무력하니까. 알렉산드로스와 달리 그들을 지켜줄 수 없어. 받아들이는 수밖에.’

로벨리아는 의연히 생각했다. 하지만 모두가 굴복한 것은 아니었다.

16549698639395.jpg“우, 우리가 그런 수작에 넘어갈 거라고 생각했다면 오산이야!”

16549698639395.jpg“그래! 우리는 평생을 황후 폐하께 바치기로 결심한 몸. 당신 같은 인간에게 넘어가느니, 마지막까지 폐하의 곁에 있을 거야!”

로벨리아의 시녀들, 케일럽, 알렉산드로스의 비서관, 황실기사단 등 일부는 대신관에게 무릎 꿇지 않고 그에게 맞서는 것을 선택했다.

16549698639423.jpg“황궁에는 예상보다 어리석은 이들이 많군요. 하지만 큰 상관은 없지요.”

대신관은 성기사들을 향해 손짓했다.

16549698639423.jpg“저들을 감옥에 가두도록 하세요. 황후도 함께.”

그렇게 로벨리아와 그녀를 따르는 이들은 황궁 지하감옥에 갇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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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신이 배신한 것조차 대신관의 계획의 일부였다는 사실을 깨달은 아이샤는 충격과 과다출혈로 인해 의식을 잃었다.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때 그녀는 의료조치를 받은 채로 병동에 누워 있었다.

16549698667885.jpg“대…… 대신관…… 님.”

그녀가 말라붙은 입술로 중얼거리자, 조용히 무언가를 읽고 있던 대신관이 고개를 들었다.

16549698639423.jpg“정신을 차렸군요.”

그의 온화한 얼굴이 낯설었다. 단둘이 있을 때는 언제나 그에게 질책만 받았던 아이샤로서는 그가 마지막으로 저런 태도를 보였던 게 언제였는지 가물가물했다.

16549698667885.jpg‘정말로…… 내가 잘했다고 생각하고 있구나.’

자신이 그를 배신했다는 것 따위는 조금도 개의치 않는 것 같았다. 대신관의 극도로 비인간적인 태도에 아이샤는 등골에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16549698667885.jpg“저는…… 이제 어떻게 되는 건가요?”

그는 유려한 입술을 휘어 미소 지었다.

16549698639423.jpg“황비 전하는 의식의 공헌자이십니다. 일찍이 약속드렸던 대가는 확실히 처리할 테니, 아무 걱정도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대가. 그것은 아이샤가 그를 처음 만났을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먼 동방의 소수민족이었던 그녀는 죽지 못해 목숨을 부지할 뿐인 비참한 삶을 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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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런 그녀에게 성국에서 왔다고 자신을 소개한 그 남자는 뱀과 같은 제안을 했다.  

16549698639423.jpg“자신을 진정 사랑해주는 사람들 사이에서, 제국의 별로 추앙받으며, 부귀영화를 누리며 살고 싶지 않으십니까? 저의 제안을 받아들인다면 간단한 일입니다. 당신의 사람을 다루는 능력과, 지금보다 더 잘 살고 싶은 욕망만 있다면.”

  처음에는 그의 제안을 믿을 수 없었지만, 끈질기게 회유해오자 결국 마음이 흔들렸다.  

16549698667885.jpg‘어딜 가든 지금의 삶보다는 나을 거야. 단 한 사람이라도 좋으니까 사랑받고 싶어. 단 하루라도 좋으니까 돈 걱정을 하지 않고 살아보고 싶어.’

  결국 그녀는 대신관의 제안에 응했고, 대륙을 횡단하여 성국으로 향했다.  

16549698667885.jpg“저를 진짜 성녀와 바꿔치기해 제국으로 보내겠다고요?”

16549698639423.jpg“뭘 그리 놀라십니까. 가진 것이라곤 없이 버러지처럼 살던 당신이 제국의 황비가 될 방법이 성녀 흉내 말고 또 어디 있겠습니까. 제가 괜히 대륙의 끝, 소수민족 부족까지 찾아간 줄 아십니까.”

  아이샤는 입술을 깨물었다. 어차피 이것이 정당한 일일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마음을 독하게 먹는 수밖에.  

16549698667885.jpg“저…… 그럼 진짜 성녀는 어떻게 된 건가요?”

  그녀의 말에 대신관은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16549698639423.jpg“만일 ‘진짜 성녀’가 당신만큼 현명했더라면 제가 굳이 대륙의 끝까지 가서 당신을 데려올 필요가 없었을 텐데……. 안타깝게도 그녀는 순진하고 어리석기 짝이 없더군요. 그리고 신의 뜻을 받들기 위해서 순진함은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지요.”

  그는 아이샤를 신전 최심부, 가장 깊은 곳으로 데려갔다. 그곳에서 아이샤가 본 것은…….  

16549698667885.jpg“허어억!”

16549698639423.jpg“그녀의 어리석음 덕에 그대가 이 임무를 맡을 수 있게 된 것이랍니다. 그녀에게 감사의 인사를 하도록 하세요.”

  그곳에 있는 것은……. 투명한 유리관 속을 둥둥 떠다니는 인간의 뇌였다.  

16549698667885.jpg“우웁, 우웨엑!”

  상상도 못 한 끔찍한 광경에 아이샤는 그 자리에서 배 속에 든 것을 게워냈다. 그런 그녀의 옆에서 대신관이 여상한 태도로 설명했다.  

16549698639423.jpg“신의 기술력을 이용해 그녀의 기억을 추출해내고 있답니다. 당신이 배워야 할 정보이니, 착실히 학습하시길 바라요.”

16549698667885.jpg“우윽, 우웩, 아흐, 아흐흑…….”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흐느끼는 아이샤를 내려다보며 대신관이 말했다.  

16549698639423.jpg“당신은 이제부터 진짜 성녀가 가지고 있던 정보를 공부한 뒤, 성녀로서 제국에 가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각오를 해야 합니다. 제국의 황제는 보통 인간이 아니거든요. 아주 치밀하고 영리하며, 경계심으로 가득하죠. 그대의 그 능력과 미모를 십분 활용해야 할 겁니다.”

16549698667885.jpg“…….”

16549698639423.jpg“물론 그것만으로는 그 영악한 황제를 상대하기 쉽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그대에게 유혹 마법이 담긴 마도구를 드리려 합니다.”

  대신관은 미소 지으며 검지를 입술 위에 대었다.  

16549698639423.jpg“하지만 명심하세요. 이 마법은 이미 사랑에 빠진 자에게는 통하지 않습니다. 그 냉정한 황제가 누구와 사랑에 빠지리라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세상에는 만약이라는 것이 있으니까요.”

16549698667885.jpg‘……그래, 그랬었는데. 로벨리아, 그년 때문에 모든 것이 틀어지고 말았지.’

아이샤는 멍한 눈으로 생각했다.

16549698667885.jpg‘대신관과 나는 모든 수를 다 써서 그 눈엣가시 같은 년을 없애려고 했지. 암살을 사주하고, 원래 세계로 돌려보내려 회유하고……. 하지만 전부 실패했기에, 결국 황후궁째로 다른 세계로 날려버리기로 한 거야. 이번에도 실패해서 로벨리아가 아니라 알렉산드로스가 사라지긴 했지만…….’

그녀의 눈이 몽롱하게 깜빡였다. 짧은 시간 안에 너무 큰 충격을 받고, 피를 너무 많이 흘린 탓일까? 치료를 받았다 해도 전신을 짓누르는 피로감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16549698667885.jpg‘그렇지만 상관은 없나. 이제 모든 것이 끝났으니까. 아무리 그 여우 같은 년이라고 해도 성기사들과 대신관이 황성을 장악한 상황에서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없겠지.’

거기까지 생각한 아이샤는 느리게 눈을 감았다.

16549698667885.jpg‘그래, 모든 게 끝난 거야. 나는 성공했고, 대신관으로부터 대가를 받아 완벽한 인생을 살 거야. 비참한 삶은 이제 끝났어…….’

  *** 한편 그 시각, 감옥에서는…….

16549698734197.jpg“카아악! 캥, 캥캥캥!”

16549698639395.jpg“으아악! 이 짐승 새끼가 미쳤나!”

복도 쪽에서 들려오는 험악한 소리를 듣고, 로벨리아와 몇 명의 시녀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16549698639395.jpg“여우야!”

한 시녀가 간절하게 소리쳤다. 곧이어, 팔이 이빨 자국투성이인 성기사가 미친 듯이 꿈틀대는 자루를 들고 감방 앞으로 왔다.

16549698639395.jpg“이거 광견병 걸린 거 아니야? 내 살다 살다 이렇게 난폭한 여우는 처음 봤다.”

16549698639395.jpg“여우를 괴롭히지 말고 이리 줘요!”

16549698639395.jpg“안 그래도 그럴 생각이었다.”

성기사는 거친 손길로 감방문을 열더니 자루를 던져넣었다. 난폭한 행동에 자루 속에서 깽! 하는 비명이 들렸다.

16549698639395.jpg“두 번은 없어. 또 이런 게 있으면 그 자리에서 죽여서 목도리로 만들어버릴 거야.”

으름장을 놓은 성기사가 떠나자, 시녀들은 자루에 황급히 달려들어 입구를 풀었다.

16549698639395.jpg“여우야! 괜찮니?”

16549698639395.jpg“보고 싶었어!”

입구가 열리자마자 그 안에서 중형견만 한 동물이 튀어나왔다. 그것은 시녀들은 본 척도 하지 않고, 곧장 로벨리아에게 달려가 안겼다.

16549698734197.jpg“애애애애앵, 헥, 헥, 헥, 헥! 끄으으응…….”

16549698639418.jpg“금수 주제에 주인에게 충성을 바치다 감옥에 갇히다니, 조금은 다시 봤네.”

케일럽이 냉소적으로 말했다. 시녀들이나 로벨리아와 달리 그는 두 손을 뒤로 결박당한 상태였데, 그의 두 손에 채워진 것은 마력제어구라는 물건이었다. 그것은 항마력을 가진 금속으로 제작한 것으로, 닿으면 그 어떠한 마법사든 마력을 잃었다. 케일럽뿐만이 아니었다. 황실기사단과 무력을 가졌다고 판단된 이들은 전부 사지가 묶인 상태였다. 그들에 비하면 무력이 없는 것으로 판단되어 손발이 자유로운 로벨리아와 시녀들은 상황이 낫다고 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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