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5. 알렉산드로스의 목적2022.03.13.
드디어 기다렸던 그때가 다가왔다.
“성국 원로회의 이름으로, 요세프 카프카 리히트만에게 성직 박탈과 성국재판에 회부될 것을 명한다.”
성국에서 파견한 집행신관들이 수도에 도착한 것이다. 그들은 엄숙한 태도로 원로회의 결정을 선포했다. 전 대륙의 정신적, 종교적 구심점, 제국의 황제조차 함부로 대할 수 없는 위대한 신의 사도, 성국의 국가원수였던 대신관은 한순간에 평범한 민간인으로 전락했다.
“명 받들겠습니다.”
비참한 처지에도 불구하고 죄인은 담담하고 겸허한 태도로 불명예 파직을 받아들였다. 이 모습을 지켜보는 사람들 중에는 나와 알렉산드로스 역시 있었다. 나는 그에게만 들릴 정도로 작은 소리로 속삭였다.
“성국재판에 회부된다면, 파면 외에도 또 다른 벌을 받게 되나요?”
“그렇지. 이제까지의 성국재판의 전례를 참고한다면, 그의 업적을 감안해 선처한다고 해도 중형을 피하기는 어려울 거야.”
작은 소리로 대답해준 알렉산드로스는 한 발짝 성큼 나섰다.
“성국에서 제국의 수도까지, 먼 길 오시느라 수고가 많으셨소. 집행신관 여러분을 위한 연회를 준비하였으니 편히 쉬고 가시길 바라오.”
“성은에 감사드립니다. 성국에서는 죄인의 처벌권을 인도해주신 카스티야 황제의 배려에 큰 감사를 표합니다.”
“죄인이라곤 해도 성국의 국가 원수였던 자였으니 당연한 일이지. 그건 그렇고, 먼 여로로 인하여 여독이 쌓였을 텐데 며칠간 황궁에서 휴식한 뒤 돌아가시는 건 어떻겠소? 내 손님들이 황궁에서 지내는 동안 어떠한 불편함도 없을 것을 약속하지.”
“제안에 무척 감사드립니다만, 그러기는 어려울 것으로 아룁니다. 죄인을 최대한 빨리 송환해 데려오라는 원로회의 명이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어쩔 수 없군. 우선 오늘은 푹 쉬고, 내일 출발하는 거로 알겠소.”
“이해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알렉산드로스와 집행신관의 대화는 잘 통했고, 금방 합의점을 찾아 빠르게 마무리되었다.
‘그런데 이상하네. 이전에 알렉산드로스는 대신관을 하루빨리 쫓아내고 싶어하지 않았던가?’
나는 아직도 기억하고 있었다. 이전의 무도회에서 알렉산드로스가 외교 문제가 될 것도 감수하고 대신관에게 빨리 제국을 떠날 것을 요구한 일을.
‘그렇게까지 한 걸 보면 알렉산드로스는 대신관을 무척 싫어하고, 위험한 인물로 생각하고 있는 듯했는데……. 며칠 더 있다 가라고 하다니 신기하네.’
물론 단순히 예의상의 빈말 같은 걸 수도 있지만……. 나에게는 걸리는 것이 하나 더 있었다.
“황제 폐하와 성국 간의 대화가 호의적이로군요.”
“전 대신관이 큰 문제를 일으키기는 했지만, 그래도 성국이 빠르게 대처해준 덕에 이번 일이 제국과 성국 사이의 외교적 문제로 번지지는 않겠어요. 다행이네요.”
알렉산드로스와 집행신관 사이의 대화를 보고 구경하던 사람들은 다들 안도하는 듯했다.
‘모두들 알렉산드로스와 집행신관이 서로에게 호의적이라고 생각하는구나. 하지만……. 나만은 알 수 있어.’
알렉산드로스는 틀림없이 웃고 있었고, 적당한 예의와 배려심 있는 태도를 갖춘 채 대화하고 있었다. 모두들 그가 호의를 품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하지만 이제까지 알렉산드로스의 가장 가까운 곳에 있었던 나만은 알 수 있었다. 그는 집행신관을 경계하고 있었다. 그것도 지독하게.
‘물론 나를 제외한 모든 사람을 언제나 조금은 경계하는 사람이긴 하지만……. 집행신관을 대하는 태도는 그 정도가 아니야. 대신관과 비슷한 수준으로 그를 경계하고 탐색하고 있어.’
하나 나로서는 그 이유를 알 수 없었다. 내가 알기로 알렉산드로스와 저 신관이 만난 것은 오늘이 처음이었으니까. 상대도 알렉산드로스를 경계하고 있는지 역시 알기 쉽지 않았다. 알렉산드로스와 달리 그는 내게 익숙한 사람이 아닌 데다가, 그 역시 감정을 숨기는 데 아주 능한 사람으로 보였다.
‘알렉산드로스는 성국 자체를 의심하고 있는 건가?’
만일 그렇다면 그 이유는 뭘까? 단순히 그의 과거, 친부와 얽힌 원한 때문에? 지금의 나로서는 알아낼 수 있는 것이 없었다. 나는 기회가 되면 그에게 사실을 듣기로 마음먹었다.
*** 집행신관들을 위한 성대한 연회가 치러진 그날 밤. 중앙궁, 황제의 집무실. 책상 위에는 지도와 온갖 서류가 난잡하게 펼쳐져 있고, 그것을 주의 깊게 보는 사람이 있었다. 촛불만이 밝혀진 어둠 속에서 알렉산드로스는 등잔 같은 눈을 빛냈다.
“이대로라면 대신관은 내일 아침 떠난다. 이제 단 하룻밤밖에는 남지 않았어.”
그가 나직하게 읊조렸다.
“그의 악행을 밝힐 시간…… 아니, 나의 ‘목적’을 달성할 시간이.”
대신관의 악행. 알렉산드로스의 ‘목적’. 알렉산드로스의 일생을 걸고 조사한 그 모든 내용들이 지금 책상 위에 펼쳐져 있었다. 책상 위에 펼쳐진 지도에는 제국의 국경지역을 중심으로 수십 개의 붉은 표시가 되어 있었다. 그것은 야만족들이 잔혹한 사건을 일으킨 장소를 표시한 것이었다.
‘각각의 사건으로 생겨난 성력이 모이는 중심, 그 중심을 몇 번을 계산해도 찾을 수가 없군.’
그는 야만족 사건으로 생겨난 힘이 모이는 곳을 계산하고 있었지만, 그 결과값을 도출해내기에는 단 한 개의 단서가 부족했기에 난항을 겪고 있었다.
‘그 단서만 있으면 대신관이 노리는 장소가 어디인지 미리 알아낼 수 있을 터인데.’
주변에 흩어진 수백 장의 서류는 낱장마다 깨알 같은 글씨와 그림으로 가득했는데, 그 내용은 지극히 끔찍한 범죄와 실험을 묘사하고 있었다. 보통 사람들의 상상력을 아득히 뛰어넘는 악의. 인간은 물론이고 신의 존엄성마저 모독하는 듯한 잔혹성. 그 모든 것이 대신관이라는 한 사람의 머리에서 나왔다고는 믿기 어려울 정도였다. 만약 이 잔학한 범죄들을 전부 구상해낸 것이 그라면, 그는 이미 인간의 범주를 아득히 뛰어넘은 존재일 것이다.
‘대신관. 오로지 그를 막기 위해 나는 일생을 바쳐왔다. 오늘이 아니면 이제 기회는 없어.’
알렉산드로스의 평생에 걸친 과업. 그것은 바로 대신관을 막는 일이었다.
‘대신관과 손을 잡은 성국은 그를 감출 테고, 그럼 대신관은 나의 감시를 벗어나 자신의 목적을 수행하겠지……. 그래, 이 세계에 외신(外神)을 강림시키는 일을!’
외신(外神). 그것은 성국이 신으로 모시는 유일신과는 다른 존재였다. 이 세계와는 완전히 다른 세계, 다른 차원에 존재하는 악신(惡神)인 것이다. 만일 그 신을 이 세계에 강림시킨다면, 굶주린 외신은 이 세계의 모든 것을 집어삼켜 자신의 힘의 일부로 만들어 버리리라. 즉 알렉산드로스의 대의란 바로 대신관이 위험한 외신을 이 세계에 강림시키는 것을 막는 일이었던 것이다. 알렉산드로스 역시 처음부터 그 사실을 알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종교에 미쳐서 정무와 가족을 내버린 친부에게 복수하고, 황위에 오른 뒤 성국을 경계하고 뒷조사를 할 때만 해도 그저 개인적인 원한에 의해 움직였을 뿐이었다. 그러나 그 끝에, 대신관의 목적이 이 세계의 멸망에 있다는 것을 알았을 때……. 또한 자신의 친부가 종교에 빠져들었던 일도 대신관의 음모의 일부였으며, 자신의 반란으로 제국을 손아귀에 넣으려는 대신관의 음모가 한 번 실패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알렉산드로스는 깨닫고 만 것이다. 자신이 앞으로 필생을 걸어야 할 일이 무엇인지에 대하여.
‘성국에 파고들어, 대신관의 음모를 파훼하는 것. 그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수년간 그 일만을 생각하고 노력하는 동안 소중한 것을 잃기도 했지.’
오로지 대의만을 생각하고 나아가던 알렉산드로스는 많은 것을 잃었다. 냉혹해졌고, 효율만을 추구하게 되었고, 결과적으로 자신은 물론 남마저도 도구로 삼는 인간이 되어버렸다.
‘대의를 위해 내 주변의 사람들을 도구로 삼는다는 것, 그것이 얼마나 모순적이며 어리석은 일이었는지……. 내게 일깨워준 사람이 바로 그녀였다.’
로벨리아. 대의를 위해 스스로 도구가 되었던 그를 사람으로 되돌려준 그녀. 가장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 일깨워준 그녀. 이리도 과중한 위업을 앞에 두고도, 잃었다고 생각하자 한순간 목숨을 포기할 생각마저 들게 했던 그녀…….
‘그녀가 있는 세계를, 그녀를 지키기 위해서라도, 이번 일은 반드시 성공하지 않으면 안 돼.’
그렇게 생각하는 알렉산드로스의 관자놀이에 땀이 배겼다. 땀방울은 턱선을 타고 흘러, 턱 끝에 구슬처럼 맺히다가 마침내 책상 위로 떨어졌다. 알렉산드로스는 책상 위에 떨어진 물방울에게 흘끗 시선을 주었다. 정확히는, 그 물방울에 일순 맺혔다 사라진 상을 본 것이다.
“이 시간에 연락도 없이 손님이 오다니 놀랍군.”
그가 나직한, 하지만 분명한 어조로 읊조렸다.
“안 그래도 슬슬 머리를 식히려고 했는데 잘된 일이야. 상대해줄 터이니 모습을 드러내도록.”
촛불 두어 개만이 빛을 밝히고 있는 어둠 속에서, 알렉산드로스 외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았으나 그는 주저 없이 그런 말을 했다.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러나……. 휙! 어마어마한 속력으로 무언가가 그를 노리고 날아왔다. 탁! 알렉산드로스는 그것을 재빠른 손길로 잡아챘다.
“단검인가. 끝에 약이 발려 있군그래.”
알렉산드로스는 여유롭다 못해 비웃음마저 느껴지는 목소리로 말했다.
“이런 거로는 나를 쓰러뜨릴 수 없어. 나의 수하들이 올 때까지 이대로 무의미한 공방을 주고받고 싶은 것이라면, 어울려주도록 하지.”
그제서야 어둠 속에서 인영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아니, 그들은 바로 성국의 집행신관들이었다. 그들은 방금 연회장에서 호의적인 대화를 주고받았던 이들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냉랭한 살기를 띤 채 알렉산드로스를 둘러쌌다.
“대신관과 원로회, 역시나 전부 한통속이었군.”
“제국의 황제……. 역시나 듣던 대로 위험한 놈이로군.”
집행신관 중 한 명이 책상 위의 지도와 서류들을 향해 턱짓했다.
“우리에 대해 여기까지 파고든 이는 이제까지 한 명도 없었다. 아비처럼 신의 뜻에 따랐더라면 좋았을 것을, 그 영리함으로 명을 단축하다니 안타깝게 되었군.”
“아바마마를 생각하면, 신의 뜻에 따른다고 명이 길어지는 건 아닌 것 같던데. 수명 연장을 위해서라면 그리 도움이 되는 신은 아니로군. 안 그런가?”
알렉산드로스가 피식 웃으며 말하자, 집행신관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무기도 없는 주제에 감히 그런 도발을……. 위대하신 그 분을 조롱한 것을 후회하게 해주마!”
그와 동시에 8명의 신관들이 알렉산드로스를 향해 달려들었다. 알렉산드로스는 재빠르게 팔을 뒤로 뻗어, 등 뒤에 달린 장식용 가검을 빼어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