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4. 아이샤의 꿍꿍이2022.03.10.
아이샤는 머리가 터지도록 고민했다. 노력의 일환으로, 로벨리아의 주변인들을 매수해 무언가라도 얻어내 보려 하였으나 그런 시도는 전부 실패하고 말았다.
“저를 어떻게 생각하시는 건가요? 저는 그저 그분의 시녀일 뿐이지만, 모든 인생을 그분께 바치기로 결심한 몸입니다. 고작 이런 얕은 수작에 넘어갈 거라고 생각하셨다니 모욕적이군요!”
‘케일럽도 그렇고, 시녀들도 그렇고 하나같이 로벨리아, 로벨리아. 그년이 대체 뭐라고 그렇게까지 난리인건데.’
어둠 속에서 신경질적으로 손톱을 물어뜯던 아이샤는 창문을 두들기는 소리에 놀라 몸을 일으켰다. 창을 열어보니 작은 파랑새 한 마리가 포르르 날아 그녀의 손에 앉았다. 파랑새의 발목에는 작은 쪽지가 묶여 있었다.
‘황후궁에 궁인으로 투입했던 수하의 보고로군. 뭔가 쓸모 있는 정보를 알아낸 것이라면 좋을 텐데.’
쪽지를 펼쳐본 아이샤의 얼굴에…… 물감이 번지듯 미소가 번졌다.
“이거다!”
*** 수하의 보고에 적혀 있던 것은 로벨리아의 시녀들 중 한 명이 케일럽을 마음에 품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레네라는 이름의 시녀는 케일럽에게 분명한 연심을 품고 있었다. 하지만 케일럽은 로벨리아를 연모하고 다른 여인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기에 이레네는 어찌하지 못하고 그저 감정을 삭이고 있다고 했다. 아이샤는 마법사를 고용하여 스스로에게 폴리모프 마법을 걸었다. 사람마다 각자의 기운이 있어, 마력이나 신성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에게 겉모습을 바꾸는 마법은 통하지 않는다. 하지만 지금 속여야 할 상대는 마력이나 신성력을 가진 사람이 아닌 한낱 귀족 영애일 뿐이었다.
‘폴리모프 마법만으로도 귀족 여자애 하나 속이는 것 정돈 일도 아니지.’
아이샤는 마법으로 케일럽의 모습과 목소리를 흉내내어 이레네에게 접근했다. 이레네가 건물 밖을 걷고 있는 것을 확인한 뒤, 2층 창밖으로 손을 터는 척하다가 손수건을 떨어뜨렸다. 서류를 들여다보며 길을 걷던 이레네는 눈앞에 하얀색의 무언가가 떨어지는 것을 보고 시선을 올렸다. 그녀의 시선 끝에 케일럽의 곤란해 보이는 얼굴이 있었다.
“아, 이레네 씨.”
“어머, 케일럽……. 잠깐만 기다리세요. 제가 곧 가져다 드릴게요.”
아이샤가 뭐라고 말하기도 전에 이레네는 냉큼 손수건을 집어 들고 황후궁 건물의 계단을 올랐다.
‘진짜 케일럽이라면 마법을 쓸 수 있어서 이런 걸 도와줄 필요는 없을 텐데. 좋아하는 남자에게 어떻게든 도움이 되고 싶은 것이겠지. 처량하네.’
오래지 않아 이레네는 아이샤의 앞에 나타났다.
“케일럽, 손수건 여기 있어요.”
마법의 효능은 뛰어났고, 지금 아이샤의 모습은 육안으로는 케일럽과 전혀 구분할 수 없을 정도였다. 그러니 이레네가 이상하게 여기지 않는 것도 당연했다. 아이샤는 손수건을 받으며 이레네를 향해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정말 고마워요, 이레네 씨. 저를 위해 2층까지 올라와 주시다니.”
실수인 척 손과 손이 슬쩍 스치자, 이레네는 얼굴을 붉히며 어쩔 줄 몰라 했다.
“아, 아니에요, 당연히 해야 할 일인걸요…….”
평소 케일럽은 시녀들에게 예의상의 친절은 보여도, 사적으로 가까워질 여지는 조금도 주지 않았다. 심지어 시녀들에게 사적인 도움을 받은 적도 한 번도 없었다. 그는 다리가 불편하긴 해도 천재적인 머리를 가진 6서클의 마법사였으니까. 그런 그가 처음으로 도움을 받고, 고맙다고 인사하며 웃어주기까지 했다. 이레네는 그것만으로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것 같았다.
“당연하지 않아요. 나중에 사례할게요.”
“어머, 그, 그럴 필요까지는…….”
마법의 힘은 물론이고, 아이샤의 연기 역시 뛰어났다. 그녀는 케일럽의 웃는 얼굴과 말투, 어조, 습관을 상당히 그럴싸하게 흉내 냈다.
“그건 그렇고 폐하께서는 요즘 어떻게 지내시나요?”
“네? 그건……. 케일럽도 언제나 황후 폐하와 함께 있지 않나요?”
“물론 폐하의 호위기사니까 그렇긴 한데, 같은 여인인 이레네 씨가 아무래도 남자인 제가 모르는 것도 더 잘 아실 것 같아서요.”
의심스러울 수도 있는 질문이었지만, 이미 이레네의 마음을 한 번 흔들어놓은 탓인지 그녀는 깊게 생각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케일럽을 한 번 더 웃게 하고 싶었던 모양인지, 이레네는 어떻게든 흥미로울 만한 이야기를 떠올려냈다.
“그건…… 그렇긴 해요. 폐하의 열쇠 목걸이 같은 건 남자분은 모르실 만하죠.”
“열쇠 목걸이라고요?”
“네. 열쇠를 반으로 잘라서 만든 목걸이인데, 보통 옷 속에 하고 다니셔서 평소에는 잘 보이지 않아요.”
“어떤 열쇠인가요?”
“금고의 열쇠라고 들었어요. 폐하의 일기를 넣은 금고인데, 열쇠의 나머지 반쪽은 황제 폐하께서 가지고 계시대요. 나중에 열쇠를 맞춰서 함께 일기를 꺼내 보실 예정이라나요.”
아이샤로서는 귀가 번쩍 뜨이는 이야기가 아닐 수 없었다.
‘금고에 넣을 정도로 중요한 것이라면……. 로벨리아의 빙의 사실이 적혀 있는 일기로구나!’
“폐하의 일기를 두 분이 함께 보신다니 특이하네요.”
“연애 일기 같은 거 아닐까요? 지금의 생각을 10년 뒤에 꺼내 본다든가. 정말 낭만적이에요. 부럽다…….”
창밖을 내다보는 이레네의 눈동자에 짙은 감정이 맺혔다.
‘이만하면 이 시녀에게서 얻어낼 건 다 얻어낸 것 같네.’
그렇게 생각한 아이샤는 다시 한번 다정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알려주셔서 고마워요. 정말 흥미로운 이야기였네요. 아, 저는 볼일이 있어서 이만 가볼게요.”
“사, 살펴 가세요! 다음에 봐요!”
이레네의 배웅을 받으며, 아이샤는 절뚝이는 걸음을 흉내 내 자리를 떴다.
‘그 일기만 있으면 로벨리아를 한 방 먹일 수 있겠어.’
아이샤는 생각했다.
‘지난번 로벨리아가 빙의자라는 사실을 폭로하는 계획은 불발되긴 했지만, 그것은 이쪽의 물증이 조작한 것 밖에는 없기 때문이었지. 제대로 된 물증만 있으면 이번에야말로 로벨리아가 빙의자라는 사실을 모두에게 납득시킬 수 있을지도 몰라.’
로벨리아가 직접 자신의 손으로 쓴 일기는 라이트 부인을 이용해 급조한 물증과는 질적으로 완전히 다른 것이었다. 로벨리아가 일기에 자신이 빙의자라는 사실과 관련된 심경을 자세히 적어두었다면, 그리고 그 일기의 내용을 만천하에 까발릴 수만 있다면……. 그때는 그 여우 같은 여자도 도저히 도망칠 수 없으리라.
‘그럼 그 여자를 비난하는 여론도 다시 일어나겠지. 그 여자의 명예가 실추되면 대조적으로 내 명예는 회복될 것이고, 대신관도 만족시킬 수 있을지도 몰라.’
그렇게 생각한 아이샤는 일기를 손에 넣기로 마음먹었다. 먼저 마법사와 도둑을 고용하여 금고를 따보려고 시도했다. 황비인 자신의 신분을 이용하자 알렉산드로스의 집무실에 있는 금고로 접근하는 건 어렵지 않았지만, 마법사와 도둑의 능력으로도 금고는 열리지 않았다.
“몇 겹의 마법과 장치가 되어 있어서 이런 방식으로는 열 수가 없습니다.”
“열쇠가 반드시 필요할 것 같은데요.”
‘뭐, 예상은 했어. 그렇게 중요한 물건을 넣어둔 금고인데 어련하겠어.’
금고 안에 든 것을 훔치려면 완전한 열쇠가 필요한 것은 기정사실인 것 같았다. *** 아이샤에게는 황후궁 하녀로 투입한 지 오래되어 황후의 신뢰를 쌓은 수하가 있었다. 손기술이 대단히 좋은 자로, 소매치기 정도는 순식간에 해내는 자였다.
“황후 폐하, 오늘도 단장을 해드리겠습니다.”
수하는 로벨리아를 단장해주면서 빼어난 손기술로 로벨리아의 열쇠 목걸이를 풀어냈다. 그리고 미리 준비했던, 진짜와 흡사하게 만든 가짜 열쇠 목걸이를 로벨리아의 목에 걸어주었다. 그렇게 해서 열쇠의 반쪽은 손쉽게 아이샤의 손 안에 들어왔다.
‘좋아, 로벨리아 그 여자의 열쇠를 훔치는 건 간단했어.’
아이샤는 열쇠 반쪽을 손에 쥔 채 생각했다.
‘하지만 문제는……. 알렉산드로스의 열쇠인데.’
소문에 의하면 알렉산드로스 역시 열쇠 반쪽을 목걸이로 만들어 걸고 있다는 것 같았다. 옷 안에 넣어 겉으로 보이지는 않지만, 항상 몸에서 떼어놓지 않아 잘 때조차 늘 가지고 있다고 한다.
‘알렉산드로스는 로벨리아와 달라. 검술로 단련된 아주 예리한 감이 있어서, 아무리 대단한 도둑이라도 목걸이를 풀어가는 것을 틀림없이 눈치챌 거야.’
이 일에는 아주 조심스럽게 접근해야 했다. 만일 실패했다가는, 눈치 빠른 알렉산드로스는 로벨리아의 열쇠 역시 도난당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할 것이고, 그럼 로벨리아의 열쇠가 바뀐 것도 밝혀지리라. 그랬다간 지금까지 해온 모든 노력이 물거품이 되는 것과 다름없었다.
‘대체 어떻게 해야 하지? 어떻게 해야 알렉산드로스의 열쇠를 훔칠 수 있을까?’
아이샤는 머리를 쥐어짰지만 도저히 그 방법을 찾아낼 수 없었다. 시간은 순식간에 흘렀고, 곧 성국에서 대신관에게 내릴 처벌이 정해지는 날짜가 코앞으로 다가왔다. 그 말은 대신관의 계획의 실행일 역시 다가오고 있다는 뜻이었다.
‘안 되겠어. 대신관에게 지금까지 내가 했던 일에 대해 이야기하자. 어쩌면 대신관이라면 좋은 생각을 떠올려낼지도 몰라.’
지금까지 대신관이 그녀를 수도 없이 무시해왔기에, 기왕이면 혼자서 해내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지만……. 이쯤 되니 어쩔 수 없었다. 만일 대신관이 보기에도 이것이 좋은 방도라면, 그는 분명 도움을 주리라.
“황비 전하께서 친히 저를 부르시다니, 드문 일이로군요.”
“아하하, 그게요…….”
아이샤는 지금까지 자신이 했던 일에 대해 설명했다. 로벨리아의 일기와, 금고와 열쇠에 대한 정보를 알아낸 것. 열쇠의 반쪽을 손에 넣은 것. 하지만 나머지 반쪽도 얻을 방법은 요원한 것…….
“……그래서 말인데요, 어떻게 해야 알렉산드로스가 가진 열쇠를 손에 넣을 수 있을까요? 이 일을 성공하면 틀림없이 우리의 계획에도 도움이 될 거예요. 로벨리아의 입지가 줄어들고, 저의 입지가 늘어날 테니까요.”
아이샤가 변명하듯 덧붙였다. 그녀의 말을 다 들을 때까지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던 대신관은 입꼬리를 비틀어 올려 웃었다.
“황비 전하께서는 아무래도, 저의 계획이 그리 마음에 들지 않으신 모양이로군요.”
“네? 아, 아니. 그게 아니라요. 이것도 하고 그것도 하면 어떨까 싶어서…….”
아이샤의 변명은 들은 척도 하지 않으며 대신관이 말했다.
“귀엽고 우스운 책략이로군요. 하지만 이제 와서 저의 계획은 백지로 하고 그 계획만으로 모든 것을 되돌리기에는 늦었습니다. 라이트 자작부인 사건의 반응을 보면 황제의 비이성적인 애정과 집착은 황후가 빙의자라는 것으로 깨어지지 않는 모양이니까요.”
“그, 그렇지만…….”
“그리고 그것 하나로 황비 전하의 제국에서의 입지가 퍼스트레이디만큼 굳어질 리도 없고요. 뭐, 황비 전하 혼자 생각하고 실행한 것 치고는 좋은 시도였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비꼬는 기색이 다분한 말에 아이샤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그녀는 고개를 푹 숙인 채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저의 계획은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이제는 되돌릴 수 없어요.”
“네, 네? 대체 언제부터…….”
아이샤는 숙였던 고개를 쳐들고 당황한 얼굴로 말을 더듬었다. 그런 그녀의 모습을 본 대신관은 나직하게 웃으며 눈꼬리를 휘었다.
“2년 전 정도부터, 라고 해두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