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3. 알렉산드로스의 작은 선물 (123/151)

123. 알렉산드로스의 작은 선물2022.03.06.

그 눈을 마주하는 것은 너무나 심장이 뛰는 일이었다. 특히나 그에 대한 나의 감정을 자각한 지금에는 더더욱.

16549698012645.jpg“……그, 그래요. 알고 말고요.”

그의 그 뜨겁고 매혹적인 눈빛 앞에 서는 것은, 입술을 겹치는 것만큼이나 야릇한 일이었기에 나는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시선을 피했다.

16549698012645.jpg“요즘 바쁘신 일이 야만인과 관련된 사건 때문이라고 그랬죠? 정확히 어떤 일인지 여쭤봐도 될까요?”

그렇게 질문한 것은, 정말로 궁금한 것도 있었지만 화제를 돌리기 위한 의도도 조금 있었다. 알렉산드로스는 한 번 더, 그리고 더 오래 내 손등 위에 입술을 누르고는 대답했다.

16549698012657.jpg“야만인들이 국경 지역에서 살육을 벌이는 일이 반복되고 있어.”

16549698012645.jpg“사, 살육이요?”

16549698012657.jpg“그래. 국경 마을의 거주민들을 무차별적으로 학살하지.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가장 어리고 작은 아이까지도. 그런 끔찍한 일을 국경수호대에게 진압될 때까지 멈추지 않아. 이런 일이 이 년 전쯤부터 시작되었는데, 최근 이상할 정도로 빈번히 일어나더군.”

상상외로 잔혹한 이야기에 나는 두근거렸던 가슴이 싸늘하게 식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16549698012657.jpg“그런데 이상한 것은 그 과정에서 민가의 약탈은 조금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점이야. 보통 야만인으로 인한 범죄는 식량과 재산을 빼앗기 위함인데, 이상한 일이지. 이런 동기를 알 수 없는 잔혹한 행위를 벌이는 야만인 무리가 한둘도 아닌 수십 개는 된다는 것이 의문이야.”

그렇게 말한 알렉산드로스는 잠시 고민에 빠진 듯한 얼굴을 했다. 하지만 곧 내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는지 괜찮다는 듯 웃어 보였다.

16549698012657.jpg“내가 지나친 이야기를 했군.”

16549698012645.jpg“아니에요. 저를 믿고 말해주셔서 기뻐요. 그런 일이 자주 일어난다면, 국경 지역에서 사는 사람들의 걱정과 두려움이 크겠네요.”

16549698012657.jpg“맞아. 국경 지역 거주민들의 이주율도 높아졌고, 빨리 문제를 해결해달라는 영주들의 아우성도 이만저만이 아니야.”

16549698012645.jpg“하지만 야만인들이라면 특정 국가에 소속되어 있는 이들도 아니니 국가 원수와 해결할 수도 없고, 많이 곤란하시겠어요.”

16549698012657.jpg“역시 그대는 내 상황을 잘 이해해주는군.”

알렉산드로스는 나를 안심시키려는 듯, 내 이마 위에 부드럽게 입을 맞추었다.

16549698012657.jpg“하지만 그런 일을 해결하는 것이 바로 나의 일이지. 그러니 그대는 너무 걱정하지 않아도 좋아. 하루빨리 해결할 터이니. 그대를 더 오래 보기 위해서라도 말이야.”

그의 다정함은 이야기를 듣고 착잡해진 나의 마음을 부드럽게 매만져주는 듯했다. 한결 가벼워진 입꼬리가 떠올랐다.

16549698012645.jpg“절 보기 위해서가 아니라, 두렵고 불안한 국경 지역 사람들을 위해서 노력하셔야죠.”

16549698012657.jpg“둘 다 나의 소중한 동기지. 아, 오늘 황후궁에서 티파티를 열 예정이라고 했었지? 그때에 맞춰 작은 선물을 준비해두었으니 마음에 들었으면 좋겠군.”

16549698042403.jpg

  *** 오늘의 티파티는 수도 사교계에 큰 파란을 일으킨 라이트 자작부인의 고발 사건 이후 첫 사교행사 자리였다. 그렇기에 나는 부담을 줄이기 위해 제일 가까운 이들을 모아서 작은 자리를 마련했다. 사실상 친목회나 다름이 없었다.

16549698042406.jpg“황후 폐하, 그간 얼마나 마음고생이 심하셨을까요? 정말 고생이 많으셨어요.”

16549698012645.jpg“잉그램 부인, 위로편지와 선물은 잘 받았어요. 신경 써주어 정말 고맙고 위로가 되었답니다.”

16549698042406.jpg“뭘요, 그렇게밖에 도와드릴 수 없어서 정말 아쉬웠는데 그러셨다니 다행이에요.”

16549698042406.jpg“대신관도 파직을 면치 못할 것이고, 라이트 자작부인 역시 황족모독죄로 큰 처벌을 받게 되었다고 들었어요. 하지만 두 사람 모두 목숨보다 소중한 명예가 바닥까지 떨어졌으니 그게 더 큰 벌이겠죠. 정말 쌤통이네요.”

클레먼스 자작부인의 말에 귀부인들이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16549698042406.jpg“감히 황후 폐하를 음해하다니! 두 사람 모두 다시는 재기할 수 없었으면 좋겠어요.”

16549698042406.jpg“분명 그럴 거예요. 이번 일이 이만저만 큰일이었어야 말이죠.”

귀부인들이 대신관과 라이트 부인의 흉을 보던 그때.

16549698042406.jpg“송구합니다, 황후 폐하. 황제 폐하께서 보내신 선물이 도착하였다고 합니다. 혹시 들여와도 괜찮을런지요?”

나보다도 섬세한 그이니만큼 굳이 선물이 도착하는 시점을 티파티 도중으로 잡은 것은 분명 이유가 있을 것이었다.

16549698012645.jpg‘아마 귀부인들 앞에서 내 면을 살려주려고 그러는 것이려나.’

어떤 것이건 간에, 그의 행동에 이유가 있을 거라고 생각한 나는 바로 선물을 들여오도록 했다.

16549698012645.jpg“들여오렴.”

내 허락에 궁인은 응접실을 떠나더니 무언가를 들고 다시 돌아왔다. 그가 든 것은 바로 꽃이었다. 크고 붉고 화려한 꽃. 한데, 그는 혼자가 아니었다. 그의 뒤로 궁인들이 줄줄이 사탕처럼 끊임없이 들어왔다. 그들 모두가 같은 꽃을 들고 있었다. 궁인들은 붉은 꽃을 응접실 내부 이곳저곳에 장식했다. 미리 꽃을 둘 장소를 정해두기라도 한 듯, 조금의 주저함도 없는 행동이었다. 그렇게 응접실은 수천 송이의 꽃으로 가득 찼다. 마치 실내가 꽃밭이 되기라도 한 것 같았다.

16549698042406.jpg“어머! 너무나 아름다워요.”

16549698042406.jpg“이 겨울에 생화를 구하기 쉽지 않으셨을 텐데, 역시 황제 폐하는 로맨티스트시네요.”

16549698042406.jpg“황제 폐하께서 황후 폐하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알겠어요.”

귀부인들이 호들갑을 떨어댔다. 나 역시 상상 이상으로 호화롭고 아름다운 광경에 얼떨떨해졌다. 시각적으로도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공기 중에도 싱그럽고 달콤한 향이 차올라 응접실에는 훨씬 낭만적인 분위기가 감돌았다.

16549698042406.jpg“황제 폐하께서 보내신 카드입니다.”

모든 궁인들이 꽃을 두고 가고, 마지막으로 남은 한 명은 공손한 태도로 카드를 주고는 응접실을 떠났다. 나는 두근거리는 가슴을 누른 채 카드를 읽어보았다. 「그대가 값비싼 선물을 그리 선호하지 않는 것 같아서 이번에는 꽃을 준비해 보았어. 윌렌티아는 겨울에 눈 속에서 피어나는 붉은 꽃으로, 고난 속에서도 아름답게 피어나는 의지를 상징하지. 언제나 그대의 곁에 있고 싶지만, 그러지 못해 미안해. 하지만 언제나 그대만을 생각하고 있다는 사실을 부디 알아주기를.」 카드에 적힌 유려한 글자를 읽어 내려가는 동안 내 입꼬리는 절로 호를 그렸다. 방 안을 가득 채운 꽃, 그리고 하나하나 고민해서 골라낸 것이 분명한 단어들. 이 모든 것들이 내 가슴속을 얼마나 따스하게 만드는지 그는 과연 알까?

16549698069924.jpg

16549698042406.jpg“어머, 황후 폐하. 눈가에 눈물이…….”

16549698012645.jpg“아니에요. 그냥 눈에 뭐가 들어가서.”

나는 수줍게 웃으며 눈가를 손수건으로 찍었다.

16549698042406.jpg“황후 폐하도 참, 수줍음이 많으시다니까.”

16549698042406.jpg“감동할 만한 일이에요. 저희 남편이 제게 이런 이벤트를 해준다면 저는 매일 남편을 업고 출퇴근시켜줄 수도 있어요.”

귀부인들의 다정한 말을 들으며 나는 푸스스 웃었다.

16549698012645.jpg‘나의 매일을 이토록 두근거리고 설레게 만들어줄 사람이 세상에 또 있을까.’

다른 사람이 아닌 그를 사랑하는 일은 예정에 없었던 일이라 나를 당황스럽게 만들기도 했지만……. 하지만, 무척이나 다행스럽고, 또 행복한 일이었다.

16549698012645.jpg‘나도 그의 매일을 이렇게 행복하게 만들어주고 싶어.’

그런 작은 야망이 마음속에서 고개를 들었다.

16549698012645.jpg‘내가 그럴 수 있을까? 아니, 그렇게 해야지. 그렇게 되도록 노력해야지.’

카드를 소중히 손에 쥔 채, 나는 그런 작은 꿈을 가슴 속에 품었다. ***

16549698097497.jpg‘내가 그걸 정말 할 수 있을까?’

아이샤는 어두운 방 안에서 생각했다.

16549698097497.jpg‘대신관의 계획대로, 내가 정말 해낼 수 있을까?’

대신관의 계획. 그것을 생각만 해도 입안이 바짝바짝 마르고, 손 안에 땀이 차는 듯했다. 어두운 방 안에서 빛나는 두 눈을 부릅뜨고 있던 아이샤는, 결국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며 신음을 토했다.

16549698097497.jpg“안 돼……. 역시 난 하고 싶지 않아.”

아무리 생각해도 그것은 너무 무모하고, 위험한 일이었다. 아이샤는 까득 소리가 나도록 손톱을 깨물며 생각했다.

16549698097497.jpg‘실패할 가능성도 크고, 무엇보다 실패했을 때의 리스크가 너무 커. 만약 그 일을 실패한다면 나는 정말 모든 것을 잃고 말 거야.’

솔직히 말해서……. 아이샤로서는, 지금 이대로도 나쁘지 않았다. 이대로 아무 일도 하지 않는다면 분명 대신관은 파면당할 것이다. 파면보다도 더 큰 벌을 받게 될 수도 있었다.

16549698097497.jpg‘하지만……. 적어도 나에게 더 큰 해는 없을 거야. 대신관만 입 다물어 준다면, 나는 이대로 계속 황비로 살 수 있을 테지.’

비록 이름뿐인, 유명무실한 황비라고 해도 말이다. 아이샤가 생각하기에 지금의 그녀의 상황은 비참하기 짝이 없었다. 황후의 도망 사건 이후, 알렉산드로스는 아이샤가 황후의 암살교사범이라는 심증을 굳혔는지 그녀에게 냉랭했다. 심지어 그 사건 직후에는 이런 말까지 했다.  

16549698012657.jpg“국교의 규율상 이혼이 불가능하고, 네가 암살교사범이라는 물증이 없기 때문에 너를 그 자리에 놔두는 것일 뿐이다. 나는 너를 영원히 용서하지 않을 터이니, 내게서 물질적 지원이 아닌 남편으로서의 온정은 기대하지 말거라.”

  도무지 납득할 수가 없었다.  

16549698097497.jpg“이게 뭐야……. 이건, ‘원래의 운명’대로라면 로벨리아의 결말이 되었어야 할 상황이잖아.”

  알렉산드로스의 말을 들은 그날 밤, 아이샤는 피가 흐르도록 손톱을 물어뜯었다. 밤이 하얗게 새도록, 하얀 이불보가 피범벅이 되도록, 아이샤는 치를 떨며 잠들지 못했다.  

16549698097497.jpg“대체 어째서 그년과 내 미래가 바뀐 거지?”

  너무나 절망적이었다. 자신의 것이었어야 할 모든 것을 그 증오스러운 여자에게 빼앗겼다. 그 여자의 것이었어야 할 외로움과 비참함은 온전한 자신의 것이 되었다. 하지만 시간 앞에서 감정은 마모된다. 아이샤는 결국 적응했고, 새로운 운명을 받아들였다.

16549698097497.jpg‘적어도 금전적 지원은 끊지 않는다니까 다행이지. 남부러울 것 없는 황족의 삶은 계속 이어질 테니까. 적어도 나는 그 멍청한 여자처럼 추위에 병들어 죽지는 않을 거 아니야.’

하지만……. 이대로라면 결국 대신관은 자신의 책략을 실행하고 말 것이다. 그렇게 되면, 적응이고 뭐고 모든 것이 끝이었다. 아이샤는 지금보다도 더욱 비참한 나락에 빠지고 말리라.

16549698097497.jpg‘내가 그를 멈출 방법은 없을까? 말로 해서 통할 리가 없고. 내가 뭔가 해서 보여준다면 대신관도 납득하지 않을까?’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