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2. 대신관에게 내릴 처벌2022.03.03.
로벨리아는 머리가 아득해지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알렉산드로스의 잘못이라고는 할 수 없었으니, 누구를 탓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서 암호학자에게 맡겼나요?”
“그래. 그 직후, 그대가 돌아온 걸로 인해 일기장에 대해 까맣게 잊고 있었는데 바로 얼마 전에 해석 작업이 끝났다는 연락이 왔어.”
“그 내용을…… 봤나요?”
로벨리아가 두근거리는 가슴을 애써 숨기며 물었다. 하지만 그가 그 일기 내용을 봤을 가능성은 낮다는 걸 그녀 역시 알고 있었다. 그가 그 내용을 봤다면, 자신이 빙의자라는 사실을 바로 알게 되었을 테니까. 그리고 알렉산드로스는 그녀 예상대로의 대답을 했다.
“아니. 나는 그 내용을 읽지 않았어. 그대가 죽은 줄 알았던 때라면 모를까, 지금은 살아 있다는 걸 알고 있으니까.”
로벨리아는 안도의 한숨을 삼켰다.
‘만일 그가 그 내용을 읽었다면……. 정말 큰일이 벌어졌을 거야.’
그것을 생각만 해도 전신의 피가 마르는 것 같았다. 자신의 비밀을 그에게 언젠가는 꼭 알려줄 생각이었지만, 그것은 자신과 그의 마음의 준비가 된 이후여야 했다. 이렇게 준비되지 않은 상황에서 갑자기 알게 되는 것은 원치 않았다.
“어쨌든, 그 일기장을 이대로 계속 말없이 가지고 있는 것도 예의가 아닌 듯해서……. 그대에게 사실대로 말하고 돌려주고 싶었던 거야. 말없이 가져가서 미안하게 되었어, 로벨리아.”
“아니에요. 제가 죽은 줄 아셨고, 또 그렇게 된 데에는 제 책임도 있으니까요.”
로벨리아는 진심을 담아 말했다. 그때, 어떤 불안감이 그녀의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잠깐, 그럼 번역 작업을 한 암호학자는 제 일기의 내용을 알고 있겠네요?”
“그 점은 걱정하지 않아도 돼. 나도 그대의 사생활은 최우선으로 보호할 대상이라고 생각하거든. 우선 암호학자가 아무에게도 그 내용을 유출하지 않은 것을 확인했고, 작업 종료 후 본인의 동의하에 그의 거주지를 타 대륙의 외국으로 옮겼어. 황후의 사생활이 얼마나 중요한 건지 이해해주었기에 가능했던 일이었지. 그러니 그대의 일기장 내용의 유출은 조금도 걱정하지 않아도 돼.”
그제서야 로벨리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빈틈이 없는 남자구나. 나보다도 훨씬 이후의 수까지 내다보고 있어.’
하지만, 여전히 일기의 존재는 걱정이 됐다. 제국어로 번역이 된 이상 그 누구라도 손에 넣으면 그 내용을 확인할 수 있다는 것이니까.
‘역시 불에 태워서 없애버리는 것이 좋을까? 아니면…….’
그러나……. 로벨리아는 자신이 그것을 원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고 깜짝 놀랐다. 알렉산드로스에 대한 죄책감, 그에게 모든 것을 알려주고 싶은 마음이 그것을 막고 있었다.
‘그 일기장에는 내가 했던 생각, 느꼈던 것이 아주 소상히 쓰여 있기 때문에 그에게 내 모든 비밀을 밝히기 위해서는 그 일기장을 보여주는 것이 제일 좋은 방법이야.’
결국 고민하던 로벨리아는 이렇게 말했다.
“일기장의 해석본을 없애지는 않겠어요. 대신, 이렇게 하기로 해요. 그것을 열쇠를 사용하는 금고에 넣고, 열쇠를 반으로 자르는 거예요. 그리고 한 조각은 제가, 다른 한 조각은 당신이 가지는 거죠. 그렇게 하면 우리 둘 모두의 합의가 있을 때 해석본을 꺼내 볼 수 있어요.”
“하지만 어째서 그래야 하지?”
알렉산드로스의 의문은 타당했다. 보통의 경우, 자신의 일기장을 다른 사람에게 보여줄 것을 전제로 하지 않으니까. 설령 배우자라고 해도. 로벨리아는 주저하다가 대답했다.
“그 일기에는……. 당신에게 꼭 알려주고 싶고, 말해주고 싶었던 내용이 적혀 있거든요. 지금 당장은 아니어도 나중에 언젠가는 당신이 읽어주었으면 해요.”
알렉산드로스가 이상하게 여기거나 미심쩍게 보지는 않을까 걱정했지만, 그는 진지한 태도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대가 그렇게 말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겠지. 그래, 그럼 그대의 말대로 하지.”
‘내가 하는 말은 언제나 진지하게 들어주고, 늘 믿어주는구나.’
그 사실이 너무나 기뻐서 로벨리아는 저도 모르게 미소 지었다. 그녀는 드물게도 먼저 그에게 다가가, 그의 목을 끌어안고는 속삭였다.
“고마워요. 이상할 수도 있는 말을 진지하게 들어줘서.”
그녀가 먼저 다가와 안기는 일은 적었기에, 긴장했는지 그의 몸이 단단해지는 것이 느껴졌다. 알렉산드로스는 잠시 움직이지 않더니, 곧 그녀를 그대로 자신의 몸에 파묻듯 끌어안았다.
“꺅!”
그는 열기가 느껴지는 목소리로 로벨리아의 귓가에 속삭였다.
“로벨리아, 기억해. 내가 그대에게 하는 일은 전부 아무것도 아니야. 그대가 내 곁을 선택했다는 기적에 비하면.”
로벨리아는 그의 품에 얼굴을 묻은 채 뛰는 심장을 진정시키려 애썼다. 하지만 어찌해도 심장은 도무지 진정이 되지 않았다. 그녀를 감싼 그의 박동이 너무나 세차게 뛰고 있는 상황에서는, 그녀의 심장 박동 역시 점점 빨라지기만 했다.
‘그가, 그의 마음이 이렇게나 소중하게 느껴질 줄이야.’
로벨리아는 느리게 눈을 감으며 생각했다.
‘나, 정말로 그를 사랑하고 있구나.’
이제는 돌이킬 수 없는 그 감정을 절실히 느끼며 로벨리아는 그의 품에 몸을 기댔다. 한때는 원래의 세계로 돌아가고 싶어 했다는 것이 아득하게 여겨질 정도로, 그를 만난 것이 선물처럼 느껴졌다.
*** 이번 사건으로 제국의 황실은 성국에 공식적인 항의를 표했다. 그리고 성국 역시 그에 빠르게 반응했다. 라이트 자작부인이 첫 기자회견을 했을 때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기민한 대처였다. 「이번 사건은 대신관의 독자적인 범행이며, 성국은 그에 동의하거나 협력하지 않았음을 밝힘. 또한, 성국의 원로회는 대신관의 비행을 결코 좌시하지 않을 것이며, 엄벌을 내릴 것을 제국 황실에 약속함. 현재 원로회는 처벌의 자세한 내용을 정하기 위해 논의 중에 있음.」 다른 누구도 아닌 대신관인데도 불구하고 엄격하고 냉정한 대처였다. 황실의 입장에서 나쁠 것은 없었다. 또한, 대신관 역시 공식적으로 사죄의 뜻을 표했다.
“어리석은 판단과 악심(惡心)으로 인한 저의 범행에 막대한 책임감을 느낍니다. 모든 책임을 지기 위해, 바로 성국으로 귀국하여 대신관 자리에서 사퇴하도록 하겠습니다.”
하나 알렉산드로스는 이것에 동의하지 않았다.
“제국과 황실을 대표하여, 나 알렉산드로스 2세는 대신관의 사퇴가 아닌 불명예 파면을 원한다. 그리고, 원로회가 처벌의 내용을 확정하기 전에는 귀국을 허락하지 않겠다. 이대로 계속 황궁에서 자숙하고 있도록.”
제국에서 성국으로 가는 길에 대신관이 도망치거나 다른 뒷수작을 꾸밀지도 모른다는 판단에서 한 말이었다. 그의 요구가 정당하다고 생각했는지, 대신관은 담담히 그것을 받아들였다.
“알겠습니다. 그럼 성국에서 신관들을 보내오기 전에는 이대로 황궁에서 지내도록 하겠습니다.”
모든 것이 해결된 것처럼 보였지만, 황궁에는 이 결말에 납득하지 못하는 사람이 딱 두 명 있었다. ***
“대신관님! 이제 어떻게 해요!”
대신관이 귀빈궁으로 돌아왔을 때, 그의 방에는 아이샤가 기다리고 있었다. 아이샤는 붉게 부은 눈을 한 채 울먹이며 그에게 달려왔다.
“소식 들었어요. 저, 정말 이대로 돌아가시는 거예요? 대신관님이 파, 파면당하시면……. 그럼 저는 이제 혼자 어떻게 해요!”
그러나 아이샤의 감정적인 반응과 비교해 대신관은 시리도록 냉정할 뿐이었다.
“어리석기 짝이 없군요. 이래서야 신의 뜻을 받드는 신자라고 할 수 있겠나요.”
“저, 저는 그냥…… 너무 걱정이 되어서…….”
“계획은 여전히 진행 중입니다. 그저, 모든 것이 조금 앞당겨졌을 뿐이에요.”
대신관은 힐난의 한숨을 쉬며 자리에 앉았다. 아이샤는 훌쩍이면서도 어찌할 줄 몰라 눈을 데룩데룩 굴렸다. 대신관은 아이샤에게 자신의 계획에 대해서 설명했다.
“아시겠습니까? 그저 과정이 조금 바뀌었을 뿐이니 걱정하지 않아도 좋습니다. 결국 모든 것이 신의 뜻대로 될 테니까요.”
“하, 하지만……. 하지만……. 그건 너무 위험하고, 그, 극단적이잖아요!”
아이샤가 두려워하는 듯한 얼굴로 말했다.
“정말…… 그렇게까지 해야 할까요? 한 번만 다시 생각해주시면 안 될까요?”
“황비님.”
대신관의 차가운 눈동자가 아이샤를 향하자, 그녀는 반사적으로 입을 다물었다.
“마음을 굳게 먹으셔야 합니다. 그 간교한 황후와 황제를 상대할 방법은, 이제 이것밖에는 남지 않았어요. 그것을 곁에서 계속 지켜봐 온 당신이라면 잘 아실 텐데요.”
“…….”
“잘 생각해보시길 바랍니다. 당신이 정해진 운명까지 거스르며 이곳에 온 이유가 무엇인지. 운명을 거스르기로 결심한 그때, 어떤 각오를 다졌는지. 그리고 그분께서는 과연 무엇을 바라실지.”
아이샤의 얼굴은 두려움과 혼란으로 가득 찼으나, 결국 그녀는 대신관을 거스를 수 없었다.
“아…… 알겠…… 어요.”
“좋아요. 그래야 착한 아이지요.”
대신관은 마치 어린애를 어르듯이 말했다.
“‘그 분’께서 오실 때까지 이제 정말로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
“우리는 신의 뜻을 행하는 신의 사도로서, 그분의 앞길을 준비하는 것뿐이에요. 길은 닦고, 그 과정에서 방해가 되는 것이 있다면 치워버리고. 그저 그뿐이지요.”
그렇게 말하는 그의 말투는 도저히 끔찍한 계획을 일컫는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가 말하는 ‘앞길을 준비하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고 있는 아이샤로서는, 그런 여상한 태도가 더더욱 두렵게 느껴져 몸이 떨렸다.
“……그럴게요.”
그렇게 말한 아이샤는 눈을 질끈 감았다. 이 일이, 자신에게도 그가 말하듯 별일 아닌 일처럼 느껴지길 바라며. *** 로벨리아는 알렉산드로스에게 자신의 마음을 전할 기회를 놓친 것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왜냐하면 그들은 같은 궁에서 사는 사이이기 때문이었다. 심지어 여러 가지 이유로 굉장히 자주 만났으며 많은 시간을 함께 보냈다.
‘기회는 또 있으니까. 기왕 말하는 거, 최대한 좋은 때에 그에게 내 마음을 전하고 싶어.’
하지만 그 이후로 기회는 쉽사리 돌아오지 않았다. 그것은 그가 요즘 너무나 바쁘기 때문이었다.
“나도 그대와 보내는 시간이 이렇게나 줄어들었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는군. 하지만 중요한 일만 끝나면 없는 시간이라도 만들어내도록 하지.”
알렉산드로스는 농담기 없는 진지한 태도로 말했다.
“맹세할 수 있어, 로벨리아. 그대와 단둘이 보내는 시간을 누구보다 바라고 있는 건 바로 나일 거야.”
그렇게 말하며 그녀의 손을 끌어당겨 입 맞추는 그의 눈은 들끓는 열정과 해소되지 않는 욕망으로 가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