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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 로벨리아의 일기장 (121/151)

121. 로벨리아의 일기장2022.0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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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로벨리아가 의아해하자, 곧 궁인들이 편지가 한가득 담긴 바구니를 가져왔다.

16549697648452.jpg“어머!”

16549697648452.jpg“항의의 편지도 많지만, 그만큼이나 응원의 편지도 많습니다. 특히 평민들, 그리고 젊은 여성들이 황후 폐하를 지지하는 내용의 편지를 많이 보냈습니다.”

심지어 바구니 한 개가 끝이 아니었다. 편지와 선물이 가득 담긴 바구니를 든 궁인이 줄줄이 방으로 들어왔다.

16549697648452.jpg“항의의 내용이 담긴 편지와 지지와 응원의 편지를 구분해두었습니다. 응원의 편지는 총 열일곱 바구니입니다.”

16549697648452.jpg“열일곱 바구니라니!”

로벨리아를 지지하는 사람들이 있었다는 소식에, 시녀들은 자기 일처럼 기뻐했다. 로벨리아는 집히는 편지를 하나 꺼내어 뜯어보았다. 편지지의 질은 좋지 못했지만, 한 글자 한 글자 정성스럽게 썼다는 것이 느껴졌다. 「안녕하십니까, 황후 폐하. 저는 센추리 가 17번지에 거주 중인 멜리나 윈터스입니다. 글자를 몰라 큰아들에게 부탁해 편지를 작성한 점 양해 부탁드립니다. 황후 폐하의 이름을 딴 기금 덕분에 부족한 집안 사정에도 큰아들을 공부시킬 수 있었습니다. 저희 큰아들은 얼마 전에 시청 직원으로 취직하였습니다. (중략) 황후 폐하를 음해하는 이들이 있다는 소식에 저희 가족은 분개를 금할 수 없었습니다. 저희는 황후 폐하께서 그러실 분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삶에서, 생활에서 그 사실을 체감하였으니까요. 모두가 폐하께 등을 돌릴 지라도, 저희는 그 어느 때라도 황후 폐하를 믿고, 충성을 바칠 것입니다…….」 로벨리아는 편지 몇 장을 더 뜯어보았다. 한 장 한 장, 모든 편지가 그녀에 대한 강한 믿음과 존경, 걱정으로 가득했다. 그들은 이번 일로 로벨리아가 상처받거나 무너지지 않기를, 이 작은 응원에 힘을 얻기를 바라고 있었다.

16549697648476.jpg‘몰랐어. 아니, 상상도 못 했어. 나를 믿고 응원해주는 사람이 이렇게나 많았다니…….’

한 사람 한 사람의 따뜻한 사연, 소중한 마음들. 그것들은 신문으로는 결코 알 수 없는 것들이었다. 편지를 읽어나가던 로벨리아는 가슴속이 난로를 켠 듯 따스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저도 모르게 눈가에 고인 눈물이 투둑, 소리를 내며 편지지 위로 떨어졌다. 그런 그녀의 모습을 본 시녀들과 케일럽은 깜짝 놀랐다. 로벨리아가 그들의 앞에서 눈물을 흘린 것은 처음이었으니까.

16549697648452.jpg“어머! 폐하……!”

16549697648485.jpg“괘, 괜찮으신가요? 누가 편지에 안 좋은 말이라도 써놓았던가요?”

케일럽의 걱정스러운 질문에 로벨리아는 고개를 저었다.

16549697648476.jpg“아니야. 그런 게 아니고……. 이제 와서 말이지만, 그 시간 동안 나는 계속 외로워했는데 그럴 필요가 없었구나, 싶어서.”

로벨리아는 씁쓸하게 웃었다.

16549697648476.jpg“더 상처받고 싶지 않아서 황후궁에서 나가지 않고, 외부의 연락도 최대한 받지 않았어. 외부에는 전부 날 비난하는 사람뿐인 줄 알았거든. 하지만, 내 곁에 이렇게나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니……. 신문으로만 외부의 소식을 확인하던 그때에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어.”

16549697648452.jpg“폐하, 외로우셨어요?”

16549697648452.jpg“저희가 있잖아요!”

시녀들은 눈이 글썽글썽해지더니 로벨리아에게 우르르 안겼다.

16549697648452.jpg“저희도 알아요, 저희가 더 혼란스러워하거나 상처받지 않도록 일부러 더 의연하게 행동하신 거. 그래도 이제는 저희를 믿고, 저희에게 의지해주셨으면 좋겠어요.”

16549697648452.jpg“맞아요. 저희도 다 성인인걸요.”

16549697648452.jpg“가장 어린 막내도 얼마 전에 성인식을 치렀죠.”

16549697648476.jpg“너희를 서운하게 했다면 미안하구나. 그래, 앞으론 너희에게 좀 더 의지하고 내 마음을 터놓도록 할게.”

16549697648452.jpg“약속이에요, 폐하.”

16549697648452.jpg“폐하는 저희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분이세요.”

시녀들이 로벨리아를 꼭 끌어안는 동안 케일럽은 조금 떨어진 곳에 어색하게 서 있었다. 그런 그를 눈치챈 듯, 로벨리아는 다정하게 웃으며 그에게 손을 뻗었다.

16549697648476.jpg“케일럽, 너도.”

16549697648485.jpg“예, 예?”

케일럽은 당황하면서도 내심의 기대를 품고 그녀에게 다가갔다.

16549697648476.jpg“너도 이제 곧 성인이니 끌어안는 것은 실례겠지? 자, 이건 어떻니?”

그렇게 말한 로벨리아는 몸이 닿지 않도록 팔만을 이용해 케일럽의 어깨를 조심스레 안고 토닥여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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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지만 케일럽은 그것만으로도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생각보다 가냘픈 그녀의 팔이, 그 작은 온기가 너무나 큰 상과 같이 느껴져서, 그것만으로도 모든 것을 보상받는 것 같았다.

16549697648485.jpg“……감사해요, 정말 기뻐요.”

케일럽은 모기 소리처럼 웅얼거렸다. 하지만 그것은 유약하고 착한 모습을 흉내 내느라 나온 목소리가 아니었다.

16549697648476.jpg“나야말로 고맙지. 이번 일 역시 케일럽이 도와주지 않았으면 결코 해결하지 못 했을 테니까. 항상 나를 믿고, 곁에 있어주는 것 진심으로 고맙게 생각하고 있단다.”

16549697648485.jpg“폐하…….”

케일럽은 큰 눈에 눈물을 글썽이며 중얼거렸다. 그런데 그때였다.

16549697648452.jpg“귀하신 분께서 찾아왔습니다.”

궁인의 말에 로벨리아는 깜짝 놀랐다. ‘귀하신 분’이라니, 황후의 앞에서 그런 식으로 불릴 만한 사람은 단 한 사람밖에는 없었다.

16549697648476.jpg“모셔 오렴.”

로벨리아는 모든 사람들을 방에서 물리고, 그만을 들여보내도록 했다. 그에게는 하고 싶은 말이 너무나 많았다. 미안함, 고마움, 그에 대한 감정에 대한 새로운 발견, 복잡하고도 강렬한 감정들이 온통 뒤섞여 로벨리아로서도 어디부터 풀어나가야 할지 어려울 정도였다. 문가에서 기다렸던 얼굴이 나타나자, 로벨리아는 그의 이름을 불렀다.

16549697648476.jpg“알렉산드로스.”

너무나 전하고 싶은 것이 많기에, 그 중 어떤 것부터 꺼내야 할지 고민하던 그때…….

16549697704703.jpg“로벨리아, 마음은 좀 괜찮은가?”

16549697648476.jpg“네?”

알렉산드로스의 입에서 나온 너무나 뜻밖의 말에 로벨리아는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는 몇 걸음 만에 그녀를 향해 성큼 다가왔다. 로벨리아의 올려다본 시야 안에서, 그는 그 매서운 눈매에 걱정을 가득 담고 있었다.

16549697704703.jpg“잘 해결되었고 대신관의 만행이 널리 알려져 다행이지만, 그런 걸로 그대의 다친 마음을 낫게 할 수는 없겠지. 나는 그것이 걱정이야, 로벨리아. 나도 없이 홀로 견뎠던 그대의 마음이 얼마나 상처 입었을지.”

그는 한숨을 쉬며 자신의 앞머리를 쓸어넘겼다. 뒤로 넘어갔다가 다시 흐트러지는 앞머리 사이의 금색 눈동자에 죄책감이 가득 담겼다.

16549697704703.jpg“역시 내가 곁에 있었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해서 정말 미안해.”

16549697648476.jpg“아니, 당신이 제게 오지 못한 건 제가 만나지 않으려고 해서잖아요. 당신은 잘못이 없어요, 알렉산드로스.”

16549697704703.jpg“그래도……. 나는 그대에게 항상 미안해, 로벨리아.”

그의 눈이 로벨리아를 향했다. 항상 진심이 아닌 웃음을 담고 있고, 어쩔 때는 무서울 정도로 냉랭하지만, 그녀에게만은 오로지 다정함과 온기만을 담고 있는 그 두 눈.

16549697704703.jpg“이런 일이 없도록 내가 막았어야 했어. 앞으로는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내가 힘쓰도록 하지.”

16549697648476.jpg“…….”

16549697704703.jpg“그 누구도 감히 그대의 명예를 더럽힐 생각도 하지 못하도록. 내 이름과 명예, 메스타포에 걸고 그대를 모든 힘을 다해 지키겠어.”

로벨리아는 너무나 벅차 목이 멜 것 같았다. 자신의 잘못도 아닌 것을 자신의 잘못이라고 하고, 첫마디부터 그녀가 마음의 상처를 입지 않았을까 걱정한다. 그토록 오만하고 계산적이었던 그가 이렇게까지 변하리라고 과거의 자신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16549697648476.jpg‘이게 그의 사랑이고, 사랑의 방식이구나.’

신이 인간을 사랑하는 마음이 이토록 깊고 뜨거울까? 로벨리아로서는 알렉산드로스의 사랑이 얼마나 크고 깊은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가늠하려야 가늠할 수 없는 그 감정의 크기는 로벨리아를 숨 막히게 벅차게 하고, 말랐던 눈물이 다시 고이게 만들었다.

16549697648476.jpg‘그의 마음을 느낄 때마다 내 마음도 점점 커져가는 것을 느껴.’

처음에는 그저 작은 호감일 뿐이었는데……. 그는 누가 봐도 잘생기고 매력적인 남자니까, 딱 그 정도의 감정일 뿐이었는데. 그의 감정이 얼마나 진실되고 진지한지 느낄 때마다, 로벨리아의 마음은 온통 뒤흔들렸다. 그렇게 한 번, 두 번, 몇 번이고 그에게 흔들리는 동안, 그만 저도 모르게 그에게 조금씩 빠져들고 말았다. 한때는 그에게 이런 마음을 품을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던 그녀는, 결국 그에게 완전히 사로잡히고 말았다. 이제 그녀는 그를 두고는 어디로도 갈 수 없었다. 그것은 이제까지와 같은 의무감, 책임감 따위의 이유가 아니었다. 진심으로 그러고 싶지 않았다. 그가 자신을 갈구하고, 탐하고 탐해도 목말라하듯 자신 역시 그에게 목말라하고 있었다. 어느덧 그녀의 삶에 그는 너무나 크게 들어오고 말았다.

16549697648476.jpg‘그는 나를 위해 용기를 냈어. 나의 계속된 거부에도 몇 번이고 자신의 마음을 전했었지.’

로벨리아는 생각했다.

16549697648476.jpg‘그러니 나도 그를 위해 용기를 내어야만 해.’

자신 역시 그를 사랑하게 되었음을 알게 된다면, 그는 어떤 표정을 지을까? 기뻐할까? 세상을 다 가진 것처럼 웃을까? 그녀의 손등에 입 맞추어줄까? 그의 반응을 상상하는 것은 설레면서도 불안한 일이었지만, 로벨리아는 용기를 내어보기로 했다.

16549697704703.jpg“로벨리아, 사실 내가…….”

16549697648476.jpg“저, 사실…….”

그러나 우연의 일치로, 알렉산드로스 역시 동시에 입을 열었다. 심지어 그가 약간 더 빨랐다.

16549697704703.jpg“먼저 말해.”

16549697648476.jpg“아니에요, 당신 먼저 말씀하세요.”

결국 알렉산드로스가 먼저 말문을 떼었다. 로벨리아는 좋은 고백 타이밍을 놓친 것이 아쉬웠지만, 그건 알렉산드로스의 말을 듣고 나서 해도 늦지 않다고 생각했다. 한데, 그가 말한 것은 너무나 충격적인 것이었다.

16549697704703.jpg“로벨리아, 이런 말하면 그대가 어떻게 받아들일지 모르겠지만……. 사실 내가 그대의 일기장을 가지고 있어.”

16549697648476.jpg“네, 뭐라고요?!”

로벨리아는 깜짝 놀라 자신의 입을 가렸다. 어지간한 일에는 잘 놀라지 않는다고 자부하는 그녀였지만, 이것은 ‘어지간한 일’이 아니었다. 그녀의 일기장에는 그녀의 모든 비밀이 담겨 있었다. 처음 빙의되었던 일, 그때의 기분, 이곳에서 적응하기 위한 부단한 노력. 처음에는 그를 싫어했지만, 어쩔 수 없이 조금씩 끌리고 말았던 감정. 그에 대한 죄의식, 미안함. 그 모든 것들.

16549697648476.jpg‘어쩐지 한 권이 없어졌더라니. 하필 이곳에서 도망쳤을 때 사라져서, 외부에서 잃어버린 거라고 생각했는데…….’

하지만 다시 생각해보니 그녀는 일기를 한글로 썼었다. 알렉산드로스가 아무리 똑똑하다고 해도 난생 처음 보는 글자인 한글을 읽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것을 생각하니 로벨리아는 다시 차분해질 수 있었다. 불안감이 아예 사라진 것은 아니었으나, 최대한 침착함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하며 그녀가 되물었다.

16549697648476.jpg“그게 왜 당신 손에 있죠?”

16549697704703.jpg“그대가 죽은 줄 알았을 때, 그대에 대한 그리움을 이기지 못하고 황후궁에 들렀어. 유품을 둘러보던 중, 처음 보는 암호로 쓰여 있는 공책을 발견하고 챙겼지. 암호학자에게 해석을 의뢰하기 위해서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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