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 대신관의 자백2022.02.24.
알렉산드로스는 서류더미 한 뭉치를 자작부인의 면전에 뿌렸다.
“하지만 그 이후로도 그대는 반성하지 않더군. 내가 황후를 사랑한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그대가 황후를 공공연히 모독하고 헛소문까지 퍼뜨리고 다닌다는 증언은 아주 쉽게 구할 수 있었다.”
그렇게 말하는 그의 금빛 눈동자에 차가운 불꽃이 튀었다.
“그걸 알고 있나, 자작부인? 황제의 즉위 직후에는 처리할 일이 무척 많다. 스토커 귀족영애 따위보다 훨씬 중요한 일들이지.”
그의 두 눈에 일렁이는 불꽃은 그곳에 있는 모두가 깨달을 정도로 선명했다.
“하지만, 그대가 투기심에 눈이 멀어 황후를 모욕하고 이렇게까지 고통을 겪게 만들 줄 내 진작 알았더라면…….”
그 어마어마한 위압감. 지극히 낮게 깔린 목소리. 그 자리에 있는 누구도, 그가 그렇게까지 화를 내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나는 기필코 그대를 죽였을 것이다. 설령 내가 폭군으로 불리는 이유를 하나 더 늘리게 된다고 해도 말이지.”
한참 전부터 숨이 막히는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던 자작부인은 그에게 애원조차 하지 못했다. 알렉산드로스의 맹수와 같은 위압감은 심약한 귀부인이 버텨낼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헉…… 어흐, 흑! 사, 살려……. 제, 바, 살려주세…….”
목이 졸린 소리만을 간헐적으로 내뱉던 자작부인은, 결국 그 자리에서 혼절하고 말았다.
“…….”
자작부인이 기절한 뒤, 홀에는 온통 고요만이 가득했다. 그 누구도 감히 그의 앞에서 함부로 입을 열 생각을 하지 못했다. 그 적막을 깬 것은 바로 알렉산드로스였다. 그는 기자와 관중들을 향해 몸을 돌리며 말했다.
“바로 다음으로 넘어가지. 대신관이 이번 일에 밀접하게 얽혀 있다는 사실에 대한 증거다.”
“그런 게 대체 어디…….”
대신관이 항의하듯 말했으나, 알렉산드로스는 그의 말을 냉정하게 잘라버렸다.
“이 자리에 있는 이들은 모두 들어보았겠지. ‘예언기록은 위조할 수 없다’는 말을 말이다.”
그의 말에 모두가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은 자작부인의 첫 기자회견부터 시작하여, 몇 번이나 언급되었던 정보였다. 이 자리에 올 정도로 이번 사건에 관심 있는 사람이 그것을 모를 수는 없었다.
“그래. 모두가 들어보았겠지. 하지만 나의 조사 결과, 그것은 사실과 다르다.”
“뭐라고요?!”
“예언기록이…… 위조가 가능하다는 말입니까?!”
“그것이 사실이라면……. 사건의 판도가 완전히 바뀔지도!”
이 충격적인 발언에 고요하던 장내가 술렁이기 시작했다.
“모두 주목하도록. 성국에서 예언을 받는 이는 ‘퓌티아’라고 불리는 예언 전문 신관이다. 그리고 고위신관이 퓌티아가 내린 예언의 내용을 받아적지. 이 과정에서 예언내용의 날조가 가능한 것이다.”
모두의 관심과 주목이 알렉산드로스의 입술로 쏠렸다. 그는 모두의 관심이 극도로 높아져 있을 때를 노려 말을 이었다.
“게다가……. 성국 내의 기록을 살펴보니, 황후가 빙의자라는 예언을 받은 날의 기록자가 바로 대신관이더군.”
“이럴 수가!”
“설마 대신관님께서!”
그 말의 파장은 엄청났다. 미친 듯이 술렁이는 사람들 사이에서, 대신관이 손을 들어 그들의 입을 막았다.
“하지만 그것은 그럴 수도 있다는 가능성뿐 아닙니까. 제가 예언기록을 날조했다는 물증은 있습니까?”
그의 말에 알렉산드로스는 피식 웃었다. 노골적인 비웃음이었다.
“내가 누구지? 대신관. 그런 것이 없다면 처음부터 입을 열지 않았을 것이다.”
“뭐…… 라고요?”
언제나 평온하던 대신관의 얼굴에 처음으로 금이 갔다. 그런 그를 조소하며, 알렉산드로스가 마저 말했다.
“예언의 과정을 설명하도록 하지. 퓌티아가 예언을 내리면 속기 전문 신관이 그 옆에서 초초(初草)를 적는다. 그리고 고위신관은 초초를 기반으로 정식 예언기록을 작성한 뒤, 초초본의 잉크를 물에 씻어버리고 신성력의 기록도 중화시켜 지운다.”
“황제 폐하께서는 그런 것까지 대체 어떻게……!”
경악하는 사람들 앞에서, 알렉산드로스는 태연하게 말을 이었다.
“그리고 나는 해당 날짜의 초초본을 손에 넣었다. 그리고 중화시켜 지웠던 신성력의 기록을 현재 복구하였고, 초초본과 예언기록의 내용이 서로 다름을 확인했지.”
이쯤 되니, 이 자리의 모두가 그의 이어지는 말을 예상할 수 있었다. 알렉산드로스는 그 예상에 못을 박듯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그리고 모두가 예상했다시피, 초초본에는 황후에 대한 언급이 없다. 그녀가 빙의자라는 내용은커녕, 그 어떠한 내용도.”
그렇게 말하는 그의 태도는 당당했고, 그 어떠한 주저함도 없었다. 그는 승리감이 담긴 시선을 대신관을 향해 던졌다. 지금까지 줄곧 태연했던 대신관은……. 처음으로 짙은 분노로 얼굴을 물들이고 있었다.
“그걸…… 대체 어떻게 손에 넣은 거지? 겨우 하루 반 만에 성국까지 다녀왔다고?”
“내가 직접 다녀오거나 누구를 보낸 것이 아니야. 그대가 제국 황실에 수많은 세작들을 끼워 넣었듯, 나 역시 성국에 무수한 수의 세작들을 침투시킨 상태지. 그 정도도 예상하지 못했다니 의외로 순진한 구석이 있군그래, 대신관.”
그들의 대화를 유심히 듣고 있던 로벨리아는 크게 놀랐다. 국가와 국가 간에 세작을 주고받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심지어는 우호국이라 해도 그러했다. 그런 걸 모를 그녀가 아니었다.
‘하지만 그렇다곤 해도……. 이렇게 공개적인 곳에서 국가 원수끼리 대놓고 할 말은 아니지!’
로벨리아는 깨달았다.
‘알렉산드로스는 지금……. 성국과의 관계가 완전히 파탄나는 것을 감수하고 저렇게 말하고 있는 거야!’
그녀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알렉산드로스를 올려다보았다. 그는 그녀의 시선을 느낀 듯, 그녀를 향해 안심하라는 듯 미소 지었다. 그 생각을 로벨리아만 한 건 아닌 것 같았다. 대신관은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말했다.
“그 말은…… 성국과 전쟁이라도 치루겠다는 건가요?”
알렉산드로스는 로벨리아를 품에 좀 더 단단히 끌어당긴 뒤 말했다.
“나의, 그리고 이 제국의 황후에게, 대신관이라는 자가 이런 크나큰 모욕을 가한다면. 심지어 그 사실을 인정하지 않기까지 한다면, 전쟁보다 더한 것이라도 기꺼이 감수하도록 하지.”
그것은 다시는 자신의 여인을 건드리지 말라는 뜻의 경고였다. 한편으로는 위협이기도 했다. 지금 당장 자신이 한 일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전쟁이라도 치룰 각오를 하라는 위협. 알렉산드로스와 대신관은 서로를 노려보았다. 두 쌍의 눈동자 사이에서 벼락과 같은 불꽃이 튀었다. 하지만, 결국 물러난 측은…….
“적진 한복판에 제 발로 들어온 제가 어리석었군요.”
대신관은 이제껏 보인 적 없을 정도로 냉소적인 어투로 말했다. 그는 모두의 앞으로 나와서 말했다.
“저, 요세프 카프카 리히트만은 신의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사도, 성국의 대신관이자 신정통합원수로서 모든 혐의를 인정합니다.”
그렇게 말하는 그의 얼굴은 이 충격적인 범죄를 자백하는 이로는 보이지 않을 정도로 태연해, 차라리 일상적인 안부를 묻는 모습에 더 가까워 보일 정도였다.
“저는 황후 폐하를 모함하기 위하여 고위신관으로서의 권위를 악용하여 신성한 예언기록을 조작하였으며, 라이트 자작부인과 공조하여 이번 일을 꾸몄습니다. 자작부인으로 하여금 빙의자를 가장하도록 종용했으며, 황후 폐하에 대한 거짓 사실을 꾸며내어 퍼뜨렸습니다. 물의를 일으킨 것에 양국의 국민 여러분과 제국의 황제, 황후 폐하께 사죄드립니다. 또한, 황후 폐하께서 빙의자라는 것은 사실이 아니라는 것도 알려드립니다.”
*** 대신관의 자백이 일으킨 파장은 어마어마했다.
“호외요, 호외! 성국의 대신관이 황후 폐하를 빙의자로 모함하려 했던 사실을 자백했습니다!”
“성국의 원수인 대신관의 범죄 행위로 성국과 제국 간의 외교 관계가 완전히 뒤바뀔 것으로 예상되는데요. 관련 특집 기사를 ‘뉴트럴 트리뷴’에서 확인하십시오!”
각종 신문들은 특집 기사와 호외를 발간했으며, 관련 기사를 싣는 족족 날개 돋친 듯이 팔려나갔다.
“정말 충격이군. 대신관님께서 그런 짓을 벌이다니…….”
“정말 존경하던 분이었는데.”
“대신관님도 결국 변한 거야. 권력은 그 어떤 사람이라도 변하게 만들지.”
지난 이틀간 온 수도를 혼란케 했던 모든 이슈의 배후에 대신관이 있었던 것으로 알려지자, 사람들은 소리 높여 그를 비난했다. 대신관은 모든 사람들에게 널리 존경받던 자였기에 시민들이 느낀 배신감은 더더욱 컸다.
“감히 황후 폐하를 모독하기 위해 이런 짓을 꾸미다니! 우리 제국과 황실을 얕잡아본 게 분명하오!”
“제국인들의 저력을 보여줍시다. 오만한 대신관에게 본때를 보여줍시다!”
“대신관이 묵고 있는 귀빈궁으로 항의하러 갑시다!”
“나는 처음부터 대신관이 수상했다니까. 황후 폐하께서 그러실 리가 없다고 굳게 믿고 있었지.”
자작부인의 동기, 공작이 있었음을 증명하는 물증, 대신관의 자백까지 모든 것이 밝혀졌으니 더 이상 로벨리아를 의심하거나 비난하는 사람은 없었다. 이제는 아무도 그녀가 빙의자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 아무도.
“정말 다행이에요, 황후 폐하!”
“진실은 언젠가 밝혀지는 법이죠. 황후 폐하께서는 무고하셨으니 당연한 일이에요!”
시녀들은 진심으로 기뻐했지만, 로벨리아는 옅은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그래, 그렇구나.”
“폐하께서는 기쁘지 않으신가요? 저희는 이렇게나 기쁜데…….”
시녀들이 의아한 듯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묻자, 케일럽이 끼어들었다.
“황후 폐하께서는 여론에 회의감을 느끼고 계신 걸 거예요. 그렇게나 매섭게 황후 폐하를 비난했으면서, 그것이 사실이 아닌 것이 밝혀져도 아무도 책임지지 않죠.”
“아아…….”
“사람들은 참 너무해요. 어떻게 그렇게 손바닥 뒤집듯이 의견을 바꿀 수가 있는지…….”
케일럽의 영리한 말에 로벨리아는 감탄했다. 그의 말도 맞았다. 로벨리아가 가라앉아 있는 데에는 그런 이유도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똑똑한 케일럽조차 모르는 사실이 있지.’
로벨리아는 무거운 마음으로 생각했다.
‘그건 바로……. 내가 진짜 빙의자라는 사실이야.’
결국 그녀는 모두의 비난을 피하기 위해 모든 사람들에게, 특히 알렉산드로스에게 다시 한번 거짓말을 한 셈이었다.
‘언제까지 이렇게 거짓말을 하면서 살아야 할까? 특히, 다른 사람이라면 모를까 그에게는……. 그에게만큼은 더 이상 거짓말하고 싶지 않아.’
그때였다. 한 궁인이 그녀에게 찾아왔다.
“황후 폐하. 그동안 외부의 연락을 전혀 받지 않겠다고 하셔서 전해드리지 못했습니다만……. 이제 그동안 쌓였던 편지와 선물을 전해드려도 될까요?”
“응? 편지와 선물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