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9. 한 번만이라도 이쪽을 봐 줘2022.02.20.
알렉산드로스의 등장에도 로벨리아는 반가워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당신이…… 여길 어떻게.”
반가워하기는커녕, 창백한 얼굴로 그렇게 중얼거리는 그녀의 모습은 누가 보기에도 이상해 보였다. 알렉산드로스는 그런 그녀를 향해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황후궁에 틀어박혀 나를 만나려 하지 않았을 때부터, 날 만나도 반가워하지 않을 줄은 알았지만, 그런 반응을 직접 보니 조금 상처인걸.”
“…….”
“로벨리아, 로벨리아.”
알렉산드로스가 간절한 애원조로 말했다.
“이쪽을 봐주면 안 되겠나? 한 번만이라도 좋아.”
그의 애달픈 목소리에도 로벨리아는 애써 고개를 돌린 채 그의 시선을 마주하지 않았다.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이죠? 황제…… 폐하께서 지금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의아해진 케일럽이 시녀들에게 다가가서 물었다. 시녀들은 서로의 얼굴을 돌아보곤, 머뭇거리며 입을 열었다.
“사실은…….”
*** 자작부인의 기자회견 뒤, 혼란스럽기 그지없었던 지난 이틀간, 알렉산드로스는 로벨리아를 만나려 하지 않았던 게 아니었다. 오히려 반대였다. 그는 몇 번이고 로벨리아에게 찾아왔고 만남을 청했다.
“그녀가 나를 만나려 하지 않는단 말인가? 대체 왜?”
“그건……. 황공하지만,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그저 지금은 폐하를 만나 뵐 수 없으니 돌아가달라는 말씀만 반복하셨습니다.”
시녀의 말에 알렉산드로스는 앞머리를 거칠게 쓸어넘겼다.
‘역시 자작부인의 그 기자회견이 문제인가. 하지만 이럴 때일수록 대화를 나누어볼 필요가 있을 텐데, 대체 왜.’
“그렇다면 나는 여기서 기다리고 있을 터이니, 그녀가 마음의 준비가 된 뒤 만나도록 하지.”
“그것은 곤란합니다. 황후 폐하께서는 기다리지 말아달라고 하셨습니다.”
“그저 자리에 앉아 있을 뿐이다. 아무런 방해도, 재촉도 하지 않을 것이다.”
“정말 곤란합니다, 폐하. 부디 이러지 말아주십시오.”
시녀는 두 황족 사이에 끼여서 진심으로 곤란한 듯했다. 알렉산드로스는 고심했다. 만일 옛날의 그였다면, 그녀의 의사를 무시하고 억지로라도 그녀를 만나려고 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은 그럴 수 없어. 아니, 그러고 싶지 않아.’
결국 알렉산드로스는 황후궁을 떠날 수밖에는 없었다. 혹여 로벨리아가 외출할 때 만날 수 있을까 봐 황후궁 앞에서 기다려보기도 했지만, 그녀는 황후궁 밖에는 한 발짝도 나가지 않았으므로 결국 그들은 만나지 못했다. 로벨리아가 그렇게까지 알렉산드로스를 만나려 하지 않은 것은, 두렵기 때문이었다.
‘내가 빙의자라는 것, 그리고 그를 오랫동안 속였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알렉산드로스는 대체 어떻게 반응할까.’
자신이 빙의자라는 사실이 기사로 난 지금, 그가 자신에게 어떤 반응을 보일지 상상도 되지 않았다.
‘당연히 화가 나겠지. 배신감을 느끼겠지. 일 년 넘게 아내가 아닌 사람이 아내인 척했던 건데.’
그가 화낼 만한 일이라는 사실엔 공감하면서도, 만약 그가 실낱만큼의 분노라도 보인다면, 단 한 순간이라도 배신감을 드러낸다면……. 로벨리아는 그것을 도저히 견디지 못할 것 같았다.
‘그러니까 모든 일이 해결될 때까지는 그를 만나지 말자. 내가 그를 다시 만나는 것은, 내가 빙의자가 아니라고 알려진 이후가 될 거야.’
물론 그것은 거짓말이었다. 그녀는 빙의자가 맞았으니까. 결국 그를 다시 한번 속이는 일이었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언론과 여론이 한 목소리가 되어 그녀를 비난하고, 악녀라고 매도해도 로벨리아는 오로지 그것만이 두려웠다.
‘다른 사람들은 나를 뭐라고 생각해도 상관없어. 어차피 이혼당하려고 악녀인 척도 했었던 나인걸. 그까짓 모욕, 비난, 다 견딜 수 있어. 하지만…… 오로지 그에게만큼은.’
어째서일까? 어째서 그만이 이렇게 특별할까? 다른 모두에게 빙의자라고 비난당하는 것보다, 어째서 그의 차가운 시선 한 번이 훨씬 더 아프게 느껴질까? 그저 ‘그에게 호감이 있어서’, ‘그를 좋아해서’ 정도의 대답만으로는 자신을 설득할 수 없었다.
‘아, 그렇구나. 나는…….’
그 질문의 해답은 너무나 분명한 것이었다.
‘나는 결국 그를 사랑하게 되었구나.’
투명한 눈물이 방울방울 솟구쳐 올랐다. 깨달음이라는 것이 참 얄궂다. 계속 그의 곁에 있을 때에는 알지 못했던 사실이, 그와 만날 수 없을 때에 이렇게 부쩍 다가오다니. 두 손으로 몇 번이고 눈물을 닦아내던 로벨리아는, 결국 무너지듯 의자에 앉았다.
‘나, 생각보다 외로웠나 봐.’
그랬다. 시녀들이나 케일럽의 앞에서는, 그 아이들을 불안하게 만들고 싶지 않아 계속 강한 척만 했지만……. ‘그’ 없이 홀로 버텨야만 하는 이 시간 속에서, 그녀는 외로웠다. 의자에 앉은 채, 로벨리아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소리죽여 흐느꼈다. 울음소리가 문 밖으로 새어나가지 않도록. 그 어느 때보다도 그가 보고 싶었다. 그저 그만 곁에 있어준다면, 비난도 외로움도 무엇 하나 두렵지 않을 것 같았다. 하지만 그녀는 그럴 수 없었다. 그러기에, 그는 너무나 멀리에 있었으니까. ***
‘내가 빙의자가 아닌 걸로 알려지기 전까지는 무슨 일이 있어도 만나지 않으려 했는데…….’
로벨리아는 입술을 깨물었다.
‘내가 기자회견 때문에 나온 틈을 놓치지 않고 여기까지 찾아왔구나.’
시선을 어디에 두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여전히 그녀는 그를 마주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만일 그의 눈에 아주 조금의 배신감이라도 비친다면, 그의 입에서 자신을 비난하는 말이 나온다면……. 로벨리아는 견딜 수 없으리라.
‘어떡해, 이쪽으로 오고 있잖아. 나라도 자리를 피해야 하나? 하지만……!’
그녀가 당황하던 그때였다. 커다랗고 뜨거운 몸이, 그녀를 끌어안았다.
“혼자서, 계속 이렇게 고독한 싸움을 해왔던 건가?”
다정하기 짝이 없는 목소리가 그녀의 귓가를 간지럽혔다.
“내게도 기회를 줘, 로벨리아. 이 싸움 중에 그대의 곁을 지킬 기회를.”
로벨리아는 그제서야 자신이 이 목소리를 얼마나 그리워하고 있었는지 깨달았다. 한 점의 의심도, 분노도, 비난도 없는 그 목소리. 이 단단한 품도, 손길도, 체온도, 그녀가 계속해서 그리워하고 목말라하던 그것이었다. 로벨리아는 알렉산드로스의 품에 안긴 채, 떨리는 목소리로 속삭였다.
“모두가 저에게 빙의자라고 해요.”
“나도 알고 있어.”
“당신은 내게 화가 나지 않나요?”
알렉산드로스는 로벨리아의 어깨에 묻었던 얼굴을 떼고 그녀를 보았다. 이번에 로벨리아는 도저히 그의 시선을 거부할 수 없었다. 그 올곧고 아름다운 시선에 묶인 듯이, 그녀는 그저 그를 마주보았다.
“나는 남들의 말은 전혀 믿지 않아. 오직 그대의 말만을 믿지.”
“…….”
“로벨리아, 그대는 정말로 빙의자인가?”
로벨리아는 주저했으나, 결국 대답했다.
“……아니요.”
알렉산드로스는 그렇게 말하는 그녀의 손등 위에 입술을 누른 채 그녀를 보았다. 그의 시선은 너무나 뜨겁고 또 맹목적이어서 로벨리아는 마치 발가벗겨진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는 그녀의 손등에서 입술을 떼고는 속삭였다.
“그대가 그렇다면 내게도 그런 거야.”
그렇게 말한 알렉산드로스는 조심스레 로벨리아의 이마 위에 입을 맞추었다. 그 다음은 입술, 다시 이마. 경애와 무조건적인 신뢰가 담긴 그의 입맞춤은 로벨리아의 가슴 속에 깊은 자욱을 남겼다.
‘그는 단 한 순간도 흔들리지 않았어. 나를 실낱만큼도 의심하지 않았어.’
충격적일 정도의 애정에 숨이 막힐 것만 같았다. 그 한없이 거대하고 깊은 감정을 목도한 감격에 벅차오르면서도, 그와 동시에 괴로웠다.
‘그런데 난 그에게 또 거짓말을 했구나.’
그에 대한 죄책감과 미안함이 가슴 속을 콕콕 찔러왔다.
“너무 미안해하지 마. 그대가 만나주지 않은 덕에 이번 사건에 대해 조사해서 증거를 충분히 확보할 수 있었으니까.”
그런 그녀의 어두운 표정을 다른 이유로 받아들였는지 알렉산드로스가 말했다. 그는 한 팔로 로벨리아를 감싼 채 대신관을 보았다. 로벨리아를 대할 때와는 완전히 다른, 지독히도 오만하고 자신감이 넘치는 얼굴이었다.
“내가 찾은 첫 번째 증거를 제시하지.”
그렇게 말한 그는 품에서 무언가를 꺼내 던졌다. 낡은 노트 같은 것이 단상 위로 툭 떨어졌다.
“먼저, 라이트 자작부인의 동기에 대한 것이다. 이것은 특별히 조사할 필요도 없더군.”
기자들이 허겁지겁 노트를 받아들어 펼쳤다.
“이, 이건……! 누군가의 일지가 아닙니까?”
“내 것이다. 내가 5년 전에 작성했던 것이지.”
알렉산드로스의 입에서 나온 뜻밖의 말에 그 자리에 있던 모두가 깜짝 놀랐다.
“화, 황제 폐하께서 직접 쓰신 일지란 말입니까?”
“당시에는 황제가 아니었지. 17번째 황비의 황자에 불과했으니.”
알렉산드로스가 냉소적인 어투로 말했다.
“라이트 자작부인. 그때 그대는 애들러 백작영애였지.”
알렉산드로스의 차가운 목소리가 자신을 향하자, 자작부인은 화들짝 놀라 몸을 떨었다.
“5년 전, 그대는 나를 흠모하여 몇 번이고 구애하였다. 수없이 만남을 청하고, 머리카락과 같은 선물을 보냈지. 심지어 미행을 붙여 내게 다른 연인이 있는지 알아보려 하기까지 했어.”
그렇게 말하는 그의 목소리에는 자작부인에 대한 비웃음이 뚜렷하게 담겨 있었다.
“내가 그대의 모든 구애를 거절해도 그대는 멈출 줄을 몰랐지. 결국 그대는 내 의사와 관계없이 나를 손에 넣을 계획을 세웠다. 그대의 아버지, 애들러 백작의 힘을 빌리기로 한 것이지.”
당시만 해도 애들러 백작의 위세는 지금과 같지 않았다. 그때 그는 선황의 총애를 받았기에, 귀족 사회의 유력한 인사로 알려져 있었고 애들러 백작저에는 그를 만나고 선물을 바치려는 사람으로 줄을 이었다.
“애들러 백작의 협조로 나는 강제로 그대와 혼인할 처지에 놓였지. 하지만 그대의 계획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혼인 직전, ‘황자의 난’이 일어났으니까.”
황자의 난. 그것은 알렉산드로스가 일으킨 군란을 말하는 것이었다. 그때 알렉산드로스는 종교에 빠져 국정을 방탕하게 만든 죄를 물어 선황을 폐위시키고, 스스로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황제가 바뀌면서 모든 것이 달라졌다. 17번째 황비의 황자에 불과했던 알렉산드로스는 대륙의 주인이 되었으며, 선황의 측근이었던 애들러 백작은 좌천당해 그 위세가 땅으로 떨어졌다. 자연스레 알렉산드로스를 손에 넣으려던 자작부인의 계획도 실패하고 말았다.
“그때 나는 그대를 처벌하지 않았다. 선황파인 그대의 친부를 좌천시켰고 그대는 유명무실한 귀족영애가 되어버렸으니까,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리라고 생각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