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8. 가면 뒤에 숨겨진 얼굴을 까발려주지2022.02.17.
모순점이 없고 매끄러운 로벨리아의 말에 모두가 설득당한 것처럼 보였다. 그 사실을 깨달은 자작부인의 얼굴도 백지장처럼 새하얗게 질렸다. 모두가 로벨리아의 승리를 확신하던 그 순간이었다.
“하하하하하!”
그 팽팽하던 긴장감은 누군가의 웃음소리에 산산조각 났다. 웃음소리는 바로 대신관의 것이었다.
“뭐가 그리 우습죠? 대신관.”
“아, 죄송합니다. 무례를 범할 생각은 없었습니다.”
대신관은 눈가를 손끝으로 문지르며 말했다.
“저는 그저……. 황후 폐하의 풍부한 ‘상상력’이 너무나 흥미로워서요.”
로벨리아의 추리를 전부 ‘상상력’이라는 말로 일축해버리다니! 그 자리의 모두는 경악하여 입을 떡 벌렸다. 기자회견이 완전히 새로운 국면으로 나아갈 듯한 낌새를 보이자, 고기 냄새를 맡은 개처럼 기자들이 코를 들이밀었다.
“그렇다면 대신관님께서는 황후 폐하의 추리가 잘못되었다고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 근거를 말씀하여 주십시오.”
“그래요, 황후 폐하께서는 나름 진지하게 말씀하신 듯하니, 저도 진지함을 되찾는 것이 예의겠지요.”
대신관은 특유의 나긋나긋한 미소를 얼굴에 걸친 채 말했다.
“이곳에 계신 모두가 아시다시피 신성력은 더러운 것을 정화하고 병든 것을 치유하며 불안정한 것을 안정시키는 힘이 있습니다. 그간 세간에 알려지지는 않았습니다만, 신성력에서 편안함을 느끼는 것은 인간뿐만이 아닙니다. 모든 종류의 동식물들이 전부 신성력에 끌리는 습성이 있습니다.”
“그, 그렇다는 것은…….”
“그렇습니다. 자작부인의 새가 아니라, 어떤 동물을 데려온다 해도 제게 이 새와 같이 친근한 반응을 보일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렇게 말하며 대신관은 자신의 어깨 위에 앉은 새의 목을 간질였다. 꽤 능숙한 손길이었다. 그는 자신의 손 위에 새를 앉혀, 도로 새장에 넣어 문을 잠갔다.
“또한 자작부인이 신성력이 없으면서 예언기록을 만진 것, 그리고 신성력이 있는 척 할 수 있었던 것 말입니다만……. 그것 역시 제가 도운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저는 자작부인이 어떻게 그러한 일이 가능했는지 짐작이 갑니다.”
“그, 그것이 무엇입니까?”
“여러분 중에는 ‘신성구’라는 물건에 대해 들어보신 분이 있으실 겁니다. 치유소에서 흔히 쓰이는 물건이니까요.”
기자 중 한 사람이 깨달은 듯이 소리쳤다.
“아아, 그 신성력을 담아놓을 수 있는 구슬……!”
“그렇습니다. 저같이 신성력이 많은 사람들이 그 여분을 담을 수 있는 도구입니다. 신성력이 없는 사제가 환자를 치료할 때 사용하지요. 그것만 있으면 신성력이 전혀 없는 사람이라도 잠깐 정도는 신성력이 있는 척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마침 며칠 전에 신성력을 담아둔 신성구 몇 개가 사라졌는데, 저는 그게 자작부인의 소행이라고 생각합니다.”
즉, 대신관의 말을 종합하자면……. 그는 제국에 온 뒤 자작부인과 만난 적이 없으며, 그녀에게 예언기록이나 신성력을 전달한 적이 없다. 지금까지의 모든 사건은 자신과 관련 없는, 자작부인의 독단적인 소행이라는 것이다. 대신관의 말에 그 누구도 반박할 수가 없었다. 홀 내에 내려앉은 침묵 속에서 대신관이 로벨리아를 돌아보며 말했다.
“라이트 자작부인은 제가 가지고 있던 예언기록을 훔쳐냈을 뿐만 아니라 그 내용을 속세에 유출했습니다. 성국에 큰 죄를 저지른 셈이지요. 일반적인 경우라면 저희 성국에서 죄인을 직접 재판하는 종교재판에 세워야겠지만, 자작부인은 성국에만 죄를 짓지 않았습니다. 제국의 황족을 모독하고 음해하는 황족모독죄를 저지르고 말았으니까요.”
“…….”
“그러니 저는 성국을 대표하여, 라이트 자작부인의 처벌권을 제국 황실에 위임하고자 합니다.”
로벨리아는 그의 말에 담긴 속내를 읽어냈다.
‘저건……. 자작부인의 처벌권을 양도할 테니 이번 사건은 이 정도로 넘어가자는 뜻이야.’
만일 자작부인의 처벌을 성국에서 담당한다면 성국은 그녀를 제대로 처벌하지 않을 것이다. 솜방망이와도 같은 처벌을 내리거나, 죄수를 빼돌릴 가능성이 높았다. 그녀는 대신관과의 거래 하에 이 모든 짓들을 저질렀으니까. 자작부인 역시 그것을 믿고 처벌을 두려워하지 않았던 것이리라. 하지만 그녀의 처벌권을 제국이 위임한다면, 그녀의 운명은 완전히 달라진다. 황실은 그녀를 결코 용서하지 않을 테니까.
“대, 대, 대신관님……!”
그 사실을 깨달았는지, 자작부인은 믿을 수 없다는 듯 경악과 절망에 가득 찬 얼굴로 대신관을 보았다.
“대신관님, 어떻게 저를……! 이, 이건, 약속과 다르지 않……!”
그녀가 금방이라도 바스라질 듯 부들부들 떨리는 목소리로 항변했다. 대신관은 그런 그녀에게 흘끗 시선을 주었다. 오로지 그녀에게만 보일 각도에서 대신관은 검지를 입술 위에 올렸다. 홀의 조명을 역광으로 받으며, 대신관의 얼굴 위로 그림자가 내려앉았다. 그림자 속에서 빛나는 두 개의 눈동자. 그 눈과 마주치는 순간, 자작부인은 견딜 수 없는 두려움과 위압감을 느꼈다.
‘이, 이건 뭐지……?!’
이 한없이 검고, 삿되고, 두려운 기운은 대체 뭘까? 이것이 아까의 그 나긋나긋한 미소를 짓던 남자와 동일인물이란 말인가?
‘아니…… 그보다는…… 이게, 정말 사람이기는 한 건가?’
너무나 음울하고 불쾌한 기운이 그녀를 뒤덮었고, 그녀는 혀뿌리까지 굳어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거대한 맹수, 아니 괴물을 눈앞에 둔 것만 같았다. 지독하게도 끔찍하고 불결한 감정만이 머릿속을 뒤덮고 그녀의 영혼까지 갉아먹기 시작했다. 이대로라면 정신이 망가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던 그때……. 그녀를 감싸고 있던 두려운 기운이 사라졌다.
“허억, 쿠, 쿨럭, 쿨럭!”
자작부인은 황급히 숨을 들이켰다. 깨끗한 공기로 자신의 몸속, 머릿속에 끈적하게 달라붙은 듯한 그 불결한 기운의 흔적까지 지우고 싶었다. 그런 그녀의 귓가에 대신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부인은 가만히 계세요.”
“…….”
“제가 다 알아서 하겠습니다.”
두려움에 가득 찬 자작부인은 그저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대신관은 다시 모두를 돌아보았다. 그의 얼굴과 음성은 언제나와 같은 여상한 모습으로 돌아와 있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황후 폐하. 나쁘지 않은 제안이라고 생각합니다만.”
마치 상대의 선택지가 하나밖에 없다는 것을 아는 양, 자신만만하고 여유로운 태도. 로벨리아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의 말대로 하면, 라이트 자작부인은 처벌할 수 있어도 이번 사건에서 대신관을 엮을 수는 없어. 그는 능구렁이처럼 모든 혐의에서 빠져나가고 말 거야.’
로벨리아는 생각했다.
‘어떻게 할까? 그의 말대로 자작부인만 처벌하고, 대신관은 나중에 다시 꼬리를 잡을 기회가 있을 거라고 생각하고 그가 빠져나가는 것을 지켜만 봐야 하는 걸까?’
로벨리아가 갈등하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 듯이, 대신관은 그녀에게 바짝 다가와 그녀에게만 들릴 목소리로 속삭였다.
“자작부인이 저지른 여죄에 대한 정보와, 황후 폐하의 다른 세계에서의 삶에 대한 정보를 저희 성국이 증명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그의 속삭임은 뱀과 같이 매끄러웠다.
“성국의 도움이 있으면 자작부인의 여죄를 찾아내는 것도, 황후 폐하의 다른 세계에서의 무고를 증명하는 것도 아주 간단해집니다. 하지만 도움이 없으면 폐하의 앞길은 가시밭길이 되겠지요.”
“…….”
“계속해서 언론과 여론과 외로운 싸움을 해나가고 싶으십니까? 또, 자작부인이 왜 이런 짓을 벌였는지 궁금하지 않으십니까? 지금으로선 물증이 있으니 그녀에게 법적인 처벌을 내릴 수는 있어도, 동기를 밝혀내지 못하면 언론과 여론을 완전히 폐하의 편으로 돌리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자작부인에게 처벌을 내린 뒤에도 수많은 언론과 여론은 폐하를 믿지 않고 거짓말쟁이, 폭군, 악녀로 매도하겠지요. 하지만 자작부인의 동기를 찾아내는 것 역시 저희의 도움을 받으면 아주 간단해집니다.”
긴장감 속에서 대신관이 자신의 입술을 핥는 모습이 보였다. 그는 마지막으로 쐐기를 박듯 말했다.
“심지어, 이 거래에 응하시면, 황후 폐하께서 빙의자라는 예언기록도 잘못 해석한 것으로 발표해드릴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폐하께서 빙의자라는 사실이 밝혀져 일어났던 일련의 사건들도 전부 한순간에 없었던 일이 되지요. 이렇게 쉬운 길이 있는데도 구태여, 구불구불한 가시밭길에 들어서시겠습니까?”
그것은 너무나 달콤하고 매력적인 제안이었다. 로벨리아는 새삼스럽게 그가 얕볼 수 있는 상대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몹시 지능적이며, 수완이 뛰어났다. 대신관이라는 지위가 주는 영향력과 권력 역시 어마어마했다.
‘너무나 갈등되지만…….’
긴장감 속에서 고민하던 로벨리아는 결국 결론을 내렸다.
‘그의 제안을 받아들여서는 안 돼. 이번 일도 자작부인은 수족의 역할을 했을 뿐이고, 조종자는 대신관이야. 조종자가 원하는 대로 해주면서 수족만 잡아들이는 것은 정의도 뭣도 아니야. 옳은 길을 놔두고 쉬운 길을 선택하는, 비겁이고 부정의(不正義)지.’
하지만 조종자를 잡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그것이 제일 큰 문제였다.
‘유감이지만…… 지금으로선 내 수중에 아무런 증거도, 방법도 없어.’
그것을 인정하는 것은 몹시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로벨리아는 아프도록 입술을 깨물었다.
‘그렇다고 조사를 더 하기 위해 이번 기자회견을 여기서 마무리 지으면, 그 시간 동안 대신관도 관련된 정보를 인멸하려 들겠지. 지금껏 보아온 그의 노련함을 생각하면 다시는 이런 기회를 얻지 못할 수도 있어.’
대신관의 악행, 그 비열한 속내를 모두의 앞에서 까발릴 더없이 좋은 기회였는데. 대신관도 이번 일로 로벨리아가 그를 의심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으니 앞으로는 다시는 이렇게 방심하지 않으리라. 그는 더욱 철두철미해질 것이며, 그렇게 되면 그의 실체를 까발리기 더욱 힘들어질 것이다.
‘나는 대체 어떻게 하면 좋지? 제발 생각해, 로벨리아. 생각해……!’
로벨리아가 고통스럽게 되뇌이던 그 때. 쿠웅! 호텔의 문이 열리는 육중한 소리가 홀을 울렸다.
“네가 원하는 것이 물증이라면.”
동굴과 같이 깊고 낮게 울리는 목소리. 그 목소리에는 그 자리의 모두를 휘어잡고 주목하게 만드는 기묘한 마성이 있었다.
“여기 있다, 대신관.”
이 자리에서 있는 사람 중, 새로 나타난 불청객을 알아보지 못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화, 화……. 황제 폐하!”
기골이 장대하며, 검고 긴 코트를 걸친 남자. 알렉산드로스가 바로 이곳에 있었다. 살짝 흘러내린 앞머리 아래에서 빛나는 두 개의 금빛 눈동자에는 차가운 분노가 드러났다.
“그 가증스런 가면 뒤에 숨겨진 민낯을 오늘 모두의 앞에 까발려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