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7. 증거를 원한다면 보여드리죠2022.02.13.
마치 혀에 기름칠이라도 한 듯한 대신관의 능청스러운 말에 로벨리아는 비웃듯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여기 있는 라이트 자작부인은 예언기록을 유출시킨 중범죄자죠. 그런데 대신관, 왜 당신은 대신관으로서의 권리를 이용해서 자작부인을 체포하지 않은 거죠? 성국에서 파견한 신관들은 제국에 닿는 데만 5일이 걸린다고 하는데, 그 사이에 자작부인이 도망칠 수도 있을 텐데요.”
“저는 최근 며칠 동안 타지역을 여행 다니느라 이런 일이 일어났다는 사실조차 몰랐습니다. 바로 오늘 오전에 뒤늦게 알게 되어 다급히 돌아온 참입니다. 그 증거로 이동허가서를 보여드리겠습니다.”
과연, 대신관이 제출한 이동허가서에는 타지역의 인장이 찍혀 있었다.
“하필 이런 대사건, 그것도 성국과 얽힌 사건이 일어난 시점에 우연히도 여행 중이셨다고요. 이제껏 제국에 오신 뒤로 단 한 번도 홀로 황성을 비우신 적 없는 그대가요?”
“그것이 신의 뜻이겠지요.”
비꼬는 의도가 다분한 로벨리아의 말에 대신관은 어깨를 으쓱였다. 관중들은 대신관에 대한 의심이 담긴 말을 수군거렸으나, 어찌할 수는 없었다. 그의 말을 반증하는 증거가 더 나오지 않는다면, 그의 말을 믿는 수밖에.
“흐음, 좋아요. 이 이야기는 이쯤 하도록 하고. 대신관이 여행에서 갓 돌아와서 상황을 완전히 알지 못한다면, 제가 설명을 드리지요.”
로벨리아는 자작부인이 주장하는 바에 대해 간략하게 설명했다. 자작부인은 빙의자이며, 원래 세계로 돌아가는 문제로 성국에서 대신관과 상의를 한 바 있고, 그때 자작부인이 다른 고위신관들의 대화를 엿듣고 예언기록을 훔쳤다는 내용이었다.
“이와 같은 라이트 자작부인의 주장은 사실과 같은가요? 대신관. 신중하게 대답하는 편이 좋을 거예요.”
“음……. 라이트 자작부인의 입장까지는 제가 알 수 없지만, 성국의 입장과 관련된 부분은 전부 사실과 같습니다. 저는 자작부인과의 상담을 진행한 바 있고, 그날 예언기록이 도난당했습니다. 그리고 자작부인이 예언기록을 훔친 일은 그녀의 독단으로 일어난 것으로 성국이나 저의 의사와 관계가 없습니다.”
“그러니 대신관은 자작부인과 성국에서 단 한 번 만났다고 주장하고 싶은 것이군요? 혹시 제국에서 다시 만남을 가진 적은 없었나요?”
“예, 없었습니다. 라이트 자작부인과의 만남은 그때 한 번뿐이었습니다.”
대신관이 확언하자 로벨리아의 얼굴에 의미심장한 미소가 어렸다. 마치 사냥감의 꼬리를 잡고 기뻐하는 고양이와 같은 그 웃음에, 대신관과 자작부인 모두 불길함을 느꼈다.
“하지만 그렇다면 이상하군요. 대신관의 말대로라면 그대가 제국에 오기도 전부터 예언기록은 이미 도난당한 상태였던 것인데 그대가 제국에 온 뒤 저는 그 예언기록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본 적이 있어요. 바로 10월 19일, 그대가 내 응접실에 찾아왔던 날이지요.”
그날은 바로 그가 처음으로 로벨리아에게 빙의자인 게 아니냐는 의문을 제기했던 날이었다. 그는 예언기록서를 비롯한 몇 가지의 증거를 들이대며 그녀에게 빙의자가 아니냐, 원래 세계로 돌려보내줄 수 있다고 제안했지만 로벨리아는 그가 녹음마도구 등을 가지고 있을 가능성이 있어 자신이 빙의자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그날 그가 분명 로벨리아에게 ‘내가 빙의자임이 기록되어 있는 예언기록서를 보여주었다’는 것이다. 라이트 자작부인과 대신관의 주장대로라면 그 시점에서 그 책이 대신관의 손안에 있으면 안 되었다. 이미 자작부인이 기록서를 훔친 이후이니까.
“10월 19일 당시, 분명 예언기록서는 그대의 수중에 있었죠. 그런데 지금은 자작부인이 가지고 있군요. 이 경우 도출될 수 있는 해답은 뭘까요?”
대신관, 자작부인, 기자들은 물론 구경하는 관중들까지. 모두가 침을 삼키며 긴장한 얼굴로 로벨리아를, 그녀의 입술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는 그 많은 사람들 앞에서 선언하듯 입을 열었다.
“바로 그대가 제국에서 자작부인에게 예언기록서를 주었다는 것이죠. 그것 말고 가능성은 존재하지 않아요.”
기자들과 관중들 사이에서 충격에 빠진 탄식이 흘러나왔다. 대신관은 아주 순간이지만 눈살을 찌푸렸다. 혹여 대신관이 자신이 언제 예언기록서를 보여주었냐고 발뺌할 것을 대비해 로벨리아는 증거자료까지 준비하는 치밀함을 발휘한 상태였다. 바로 그가 그날 해당 시각 그녀의 응접실에 왔다는 호위부의 방문기록과 녹음마도구였다.
‘상대가 우리의 대화를 녹음할 것을 예상하고 대비한 내가 그 정도의 준비도 하지 않았을 리가 없잖아?’
그렇다. 그날의 대화를 마도구로 녹음하려 시도한 것은 대신관뿐만이 아니었다. 로벨리아 역시 그날의 대화를 녹음하여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내가 빙의자라는 사실이 밝혀지지 않은 상황에서는 스스로 공개할 이유가 전혀 없는 내용이지만, 지금이라면 이야기가 다르지.’
대신관이 발뺌할 것을 예상하며 로벨리아는 코트 아래에서 품 안에 들어있는 마도구를 만지작거렸다. 그런데 대신관은 의외의 반응을 했다.
“예, 그런 일이 있었지요. 아마도 제 기억에 착오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자작부인과의 접견은 성국에서 이루어졌으나, 예언기록의 도난은 제가 제국에 온 뒤 일어난 것입니다.”
‘예언기록서를 보여주었다는 것을 부정하지 않네?’
마도구를 사용할 기회를 노리던 로벨리아는 순간 의아해졌다. 하지만 잘 생각하면 그것이 아주 이상한 일도 아니었다. 예언기록서를 보여주었다는 것을 어설프게 부정해보았자, 녹음마도구 같은 증거가 나오면 쉽게 논파 된다. 그런 들키기 쉬운 거짓말을 해보았자 신뢰만 잃고, 대신관이라는 권위에 손상까지 입게 되리라.
‘대신관 역시 내가 녹음마도구를 가지고 있을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있는 거겠지. 내가 상대가 녹음마도구를 가지고 있을 가능성을 염두에 두었듯이.’
그렇게 생각한 로벨리아는 분명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기억의 착오라니, 보잘 것 없는 변명이로군요. 아무래도 대신관이 진실을 입에 담을 생각이 없는 듯하니, 제 추리를 설명하도록 하죠. 대신관과 라이트 자작부인, 두 사람은 틀림없이 제국에서 만났어요. 그것도 한 번이 아니라 여러 번이었죠. 아마 이번 일을 공조하기 위한 모임이었겠죠.”
긴장감이 감도는 홀 내에서, 모두가 로벨리아의 이어질 말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가장 많은 긴장감과 관심이 자신이 입술로 모였을 때, 그녀는 단호하게 말했다.
“……그리고 그 과정 중, 대신관은 예언기록서를 자작부인에게 넘겨주었어요.”
대신관이 헛웃음을 지었다.
“하지만 황후 폐하, 그것은 폐하의 추측일 뿐 아무런 증거가 없지 않습니까.”
“증거를 그리 원하신다면, 보여드리죠.”
로벨리아가 신호를 주자 로비 뒤쪽의 공간에서 시종이 천에 감싸인 커다란 물건을 들고 왔다. 시종이 벨벳천을 걷자, 그 아래에 숨겨져 있던 것의 모습이 드러났다. 그것은 금빛 새장이었다.
“아니, 저건?”
“설마!”
“이 자리에도 이것을 알아보시는 분들이 있는 모양이군요.”
관중들의 격렬한 반응에, 로벨리아는 당당한 얼굴로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새장 안에는 약 40cm 정도 되는 키의 새가 들어 있었다. 앵무새와도 비슷하게 보이는 그 새는 전체적으로 노란색을 띠었는데 머리깃과 길게 늘어진 꼬리는 오색의 빛깔로 찬란하게 반짝였다. 새의 모습은 무척 아름다웠으며 한눈에 보기에도 희귀하고 그 가치가 높을 것처럼 보였다.
“라이트 자작부인의 반려조입니다. 열대지방에서 수입해온 몹시 희귀한 종의 새라고 하죠. 자작부인은 이 새를 무척 자랑스러워해, 사교행사에서도 여러 번 선보였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로벨리아의 말에 관중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언제는 티파티를 열더니 진종일 저 새 이야기만 하더라니까. 그렇게 지루한 사교모임은 난생 처음이었지.”
“나도 귀에 인이 박힐 정도로 들었어.”
“저 꼬리만 봐도 알겠어. 라이트 자작부인의 새라는 것을 말이야.”
“그, 그 새를 대체 어떻게…….”
로벨리아가 지금부터 어떤 일을 할지 짐작한 듯, 자작부인의 얼굴에서 핏기가 사라졌다. 로벨리아는 그런 자작부인을 향해 피식 웃어 보이더니, 시종으로 하여금 새장에서 새를 꺼내게 했다.
“자, 아빠에게로 날아가렴.”
로벨리아의 말이 끝나자마자, 새는 푸드덕 날아올랐다. 그 화려하고 아름다운 꼬리가 호를 그리더니, 새가 날아 앉은 곳은 바로…….
“어머!”
“저, 저럴 수가!”
관중들이 탄성을 터뜨렸다. 새는 바로 대신관의 어깨 위에 앉은 것이었다!
“이 새는 열대지방에서 포획해 수입되었어요. 본디 반려조로 키워지는 종이 아니라 야생동물이라는 말이죠.”
로벨리아가 비웃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경계심 많은 야생동물이 이렇게나 친근함을 드러내기 위해서는……. 겨우 한 두 번의 만남으로는 어렵지 않을까요?”
마치 그녀의 말을 뒷받침하듯, 새는 대신관의 어깨 위에 앉을 뿐만 아니라 그의 얼굴을 향해 머리를 들이밀며 쓰다듬어줄 것을 종용하고 있었다.
“휘리릭, 휘리릭.”
새는 호루라기를 닮은 울음소리를 내며 대신관에게 아양을 떨어댔다. 누가 봐도, 새는 대신관에게 친근함과 호의를 보이고 있었다. 지금까지 밝혀진 것들을 수첩에 불이 날 듯 적어 내려가던 한 기자가 말했다.
“이, 이렇게 된다면……. 자작부인의 증언은 전혀 못 믿을 만한 것이 되어버리지 않습니까?”
그만이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아닌 것 같았다. 그 주변의 기자진들은 미심쩍은 듯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만도 했다. 빙의자를 돌려보내는 일은 오랜 준비가 필요한 일이다. 짧은 시간 내에 여러 번 만난다고 해결되는 일이 아니라는 뜻이다. 그러니 두 사람이 자작부인의 저택에서 여러 번의 만남을 가졌다면, 그것은 자작부인을 원래의 세계로 돌려보내기 위해서가 아니라 다른 이유 때문일 가능성이 높았다.
“게다가 아직 해결되지 않은 의문이 있습니다. 현재 자작부인은 신성력이 없는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그런데 그런 자작부인이 어떻게 스스로 예언기록을 훔쳐냈다는 말입니까?”
유난히 젊어 보이는 기자가 의문을 제기했다. 그의 말대로 신성력이 없는 사람은 예언기록을 만질 수도, 훔칠 수도 없었다. 그 자리에 있는 모든 이들의 머릿속에는 한 가지의 결론이 떠오르고 있었다.
“해답은 간단해요. 자작부인은 스스로 예언기록을 훔치지 않았어요.”
로벨리아는 질문에 마침표를 찍는 듯한 분명한 어조로 말했다.
“대신관이 자작부인에게 예언기록을 넘겨주었다면 간단해요. 또, 자작부인에게 실제로는 신성력이 없으면서도 신성력이 있는 척 하는 것도 대신관의 협력이 있다면 쉬운 일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