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6. 도망쳐도 소용없어요, 대신관2022.02.10.
바로 그 순간이었다. 관중석 쪽에서 십수 개의 화살의 쏘아진 것은.
“으아악!”
“꺄아악!”
사람들은 경악에 찬 눈으로 화살이 향하는 방향을 좇았다. 그 화살들의 촉 끝은, 명확히 단상에 올라와 있는 두 명의 여인들을 향하고 있었다.
“폐하!”
“자작부인!”
호위병들이 두 여인을 지키기 위해 황급히 몸을 던졌으나, 사람의 발이 화살의 속도를 이길 순 없었다. 자신을 향해 서슬 퍼런 날붙이가 날아오는 것을 본 자작부인은 아연실색했다. 황족도, 하다못해 공작부인도 아닌 자신이 이런 위험에 처하게 되다니! 상상도 해본 적 없었다. 극도로 공포심을 느낀 자작부인의 시야에는 모든 것이 느리게 움직이는 것처럼 보였다. 도망쳐야 할 발은 움직이지 않았다. 차마 도움을 청하는 말조차 꺼낼 수 없었다. 난생처음 느껴본 생명의 위협에 혀뿌리까지 얼어붙어버렸다. 그런 자작부인의 눈앞에서, 로벨리아는 눈썹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그녀는 너무나 대범하게도, 그저 싸늘한 눈으로 자작부인을 노려보고 있을 뿐이었다. 화살촉이 마침내 눈앞까지 다가오자, 자작부인은 눈을 질끈 감았다. 날카롭고 뜨거운 고통이 몸을 꿰뚫을 거라고 생각한 그때. 뎅그랑! 덜그럭, 뎅그랑! 금속으로 된 무언가가 바닥에 떨어지는 듯한 소리가 연속적으로 울려 퍼졌다. 그 소리에 자작부인은 다시 눈을 떴다.
“어, 어째서……?!”
놀랍게도, 방금 전까지만 해도 자신들을 향해 똑바로 날아오고 있던 화살들은 지금은 맥없이 떨어져 바닥을 나뒹굴고 있었다. 자작부인이 그 사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도 눈치채지 못한 채 거친 숨을 헐떡이던 그때.
“이제 내가 물어볼 차례가 왔군.”
얼음장처럼 차가운 목소리가 고요한 로비의 공기를 울렸다.
“자작부인, 왜 그 잘난 신성력을 쓰지 않았지?”
“네, 네……?”
“방금 그대는 생명의 위협을 느꼈어. 그대가 말한 것과 같이 강대한 신성력을 운용할 수 있다면 신성력으로 방어하는 것이 당연한 상황이야. 그런데 그대는 눈을 질끈 감고 아무것도 하지 않았지.”
그렇게 말하는 로벨리아는 이미 답을 아는 것처럼 여유로운 모습이었다.
“마치 아무런 능력도 없는 사람처럼 말이야. 그렇지 않은가?”
그녀의 입꼬리가 비틀려 올라가는 것을 보며, 자작부인은 눈앞이 새하얘졌다.
‘다 이 여자가 꾸민 짓이었구나! 내게 신성력이 없다는 사실을 증명하려고!’
로벨리아의 지적은 합당했다. 관중들 역시 그녀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만한 신성력이 있는데도 자기방어를 포기하고 무력하게 손 놓고 있었다는 건 확실히 이상하지.”
“그럴 때 아니면 언제 신성력을 쓰겠어.”
“아무리 신성력이 있는지 없는지 검증하려는 목적이라고 해도 너무 위험하지 않나? 마법사인지 누구인지는 모르겠지만 단 1초만 늦었어도 큰일 날 뻔했어.”
“뭐, 황후 폐하 역시 화살을 맞을 뻔했으니, 그 정도는 대비를 해두셨겠지.”
로벨리아의 시험 방식이 위험함을 지적하는 이들도 있었으나, 화살이 자작부인에게만 겨냥된 것이 아니고 자신에게도 겨냥되도록 했기에 크게 비판받지는 않는 듯했다. 관중들이 자신을 의심하기 시작하자, 자작부인은 너무나 분해 이를 부드득 갈았다. 하지만 이대로 순순히 신성력이 없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는 없었다.
“……!”
그때 자작부인의 시야에 누군가가 들어왔다. 바로 관중석에 숨어 있던 대신관이었다.
‘그래, 걱정할 것 없어. 여차하면 대신관이 도와줄 텐데 뭐가 걱정이야.’
그렇게 생각하자 새하얘졌던 머릿속이 환히 트이는 것 같았다. 자작부인은 급히 변명거리를 꾸며냈다.
“신성력을 가진 사람들은 다른 마력, 신성력을 가진 사람들을 탐지해낼 수 있지요. 저는 이곳에 들어섰을 때부터 관중석에 숨어 있던 마법사의 존재를 눈치챘고, 그 마력의 형태로 황실 마법사라는 것도, 황후 폐하의 명령을 들으리라는 것도 알게 되었답니다. 그러니 그가 쏘아낸 화살도 전혀 두려워할 필요가 없었던 것이지요.”
“그렇다고 하기에는 아까 분명 겁에 질린 듯한 얼굴이었는데…….”
관중들이 수군거렸으나 자작부인은 애써 무시하고 태연한 미소를 얼굴 위에 걸쳤다. 로벨리아는 그런 자작부인의 말이 재미있다는 듯 웃었다.
“그런 탐지능력이 있다면 방금 화살을 쏘아낸 자가 누구인지 골라내는 것은 일도 아니겠지?”
“네?”
“대기시키고 있던 황실 마법사들을 부르겠다. 그들 중 누가 화살을 쏘았는지 골라보도록.”
로벨리아의 말에, 마치 기다리기라도 했다는 듯 여섯 명의 황실 마법사들이 단상 위로 올라왔다. 꼭 자작부인이 무슨 변명을 할지 예견하기라도 한 것 같았다. 자작부인은 수를 읽힌 기분에 자존심이 상해 낯이 뜨거워졌다. 하지만 그저 자존심 상해하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그랬다간 이 자리의 모두가 그녀가 신성력이 없다는 사실을 눈치채고 말 테니까.
‘아까 그 정도의 규모와 섬세한 조작 능력을 가지려면 어지간한 대마법사가 아니고서는 안 되겠지. 한 5, 6서클 정도?’
자작부인은 황실 마법사들을 훑어보았다. 마법사는 귀한 존재이기에 황실 마법사 정도면 얼굴이 알려질 수밖에 없었고, 자작부인 역시 그들 모두를 대략적으로 알고 있었다.
‘5, 6서클 정도 되려면 황실 마법사 총책임자 정도는 되어야겠지.’
단상 위에 선 마법사들 중 유독 잘생겨서 눈에 띄는 소년이 있었다. 마치 숲의 요정처럼 사랑스러운 눈망울을 가진 그 소년은 최근 떠오르는 마법의 천재라고 했다.
‘나이에 비해 대단하긴 하지만, 3서클이니 이번 일과 관련은 없겠지. 역시 총책임자가 제일…… 유력하려나?’
자작부인은 혹시나 도움이 될까 싶어 대신관 쪽을 흘끔거렸다. 그는 무어라 수신호를 주고 있었으나, 거리가 멀어서 그런지 그 뜻이 잘 이해되지 않았다.
“뭐 하고 있지, 라이트 자작부인? 어서 대답을 해야지.”
고민하는 동안에도 시간은 흐르고 있었다. 신성력이 있다면 순식간에 알 수 있는 것인데 지나치게 시간을 끄는 것도 수상했다.
‘총책임자, 역시 총책임자로 해야겠어.’
결국 처음 마음속으로 점찍은 자를 고르기로 한 자작부인이 말했다.
“왼쪽에서 다섯 번째입니다.”
나름대로는 최선을 다해 머리를 굴린 결과였으나……. 자작부인은 자신이 틀린 답을 골랐음을 금방 알게 되었다.
“푸하하핫!”
참을 수 없다는 듯 누군가 웃음을 터뜨렸다. 바로 왼쪽에서 첫 번째로 서 있던 마법사 소년이었다.
“아, 방해해서 죄송해요! 저는 너, 너무 웃겨서……. 아하하하하!”
그 소년은 뭐가 그리 우스운지 급기야 눈물까지 보이고 말았다. 자작부인이 어안이 벙벙해져 있을 때, 로벨리아의 목소리가 로비를 울렸다.
“소개하지. 이쪽은 내 호위기사이자, 황궁 마법사인 케일럽이다.”
그렇게 말하는 로벨리아의 목소리에는, 그럴 줄 알았다는 비웃음보다는 순수한 자랑스러움이 담겨 있었다.
“케일럽은 불세출의 천재로, 17세밖에 되지 않았는데도 그 마법 능력은 6서클에 달하지.”
“뭐라고!”
“저 소년이 6서클?”
관중에, 기자들은 물론이고 자작부인까지 경악했다. 17살의 어린 나이에 3서클도 충분히 대단한 경지였는데, 6서클이라니. 그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천 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천재인 것이다. 기함한 자작부인은 저도 모르게 소리쳤다.
“이, 이건 반칙이야! 이런 걸 어떻게 맞추란 말이에요? 천 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한 천재를 데려다 놓고……!”
그녀가 자신의 말실수를 깨닫고 입을 다물었을 때는 이미 모두가 그녀의 말을 들은 직후였다.
“방금 그것은 자신에게 신성력이 없다는 자백이라고 이해해도 되겠나, 라이트 자작부인?”
그렇게 말하는 로벨리아의 웃는 얼굴은…… 더 물러날 데가 없는 자작부인의 눈에는 지극히 사악하고 섬뜩하게 보였다.
“아, 아, 아…….”
금방이라도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았다. 대체 왜, 저 간교하고 사악한 황후의 부름에 응했을까? 초대를 거절하고, 어떤 소문이 돌든 그저 집에 있을 것을. 차라리 그편이 이렇게 공개적으로 망신당하는 것보다는 훨씬 나았을 텐데……. 로벨리아는 저항이나 변명의 의지조차 잃어버린 자작부인의 앞으로 걸어 나왔다.
“하지만 제가 오늘 밝힐 진실은 여기서 끝이 아닙니다.”
로벨리아는 자작부인이 힘없이 들고 있는 예언기록서를 가리키며 기자들을 향해 말했다.
“라이트 자작부인에게 신성력이 없다고 해도, 그녀가 예언기록을 가지고 있는 것은 사실이니까요. 그건 어째서일까요? 해답은 간단합니다. 바로 예언기록은 그녀가 훔친 게 아니기 때문이죠.”
“질문이 있습니다, 황후 폐하! 황후 폐하께서는 지금 예언기록이 위조되었다고 말씀하시고 싶으신 겁니까?”
“하지만 예언기록의 위조는 불가능합니다! 그 종이와 기록에 고위신관만이 알고 있는 특수한 술법이 들어갑니다.”
기자들이 앞다투어 말했으나, 로벨리아는 고개를 저었다.
“저는 이 예언기록이 위조되었다고 말하고 싶은 것이 아니에요. 예언기록의 위조는 불가능하고, 이것은 ‘성국에서 만들어진’ 것이 맞습니다.”
“그렇다면…….”
“그래요. 이번 사건은 라이트 자작부인이라는 한 어리석은 개인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보다 훨씬 더 크고 강력한 세력을 배후에 두고 있죠.”
로벨리아는 단호하고 전달력 있는 목소리로 말했다.
“왜냐하면, 이 예언기록은 성국의 고위신관이 자작부인에게 직접 주었으니까요!”
경악하는 사람들, 자신의 귀를 의심하는 이들, 불이 붙도록 빠르게 움직이는 펜과 사각거리는 소리……. 그 한가운데에서 로벨리아는 관중석에 있던 한 사람을 지목했다.
“대신관, 이리 나오세요. 도망쳐도 소용없어요.”
긴 로브를 걸치고, 후드를 뒤집어쓴 채 관중 사이에 숨어 있던 대신관은 헛웃음을 지었다. 하지만 어찌할 도리가 없어, 그는 결국 로벨리아가 시키는 대로 단상 위로 올라왔다.
“태양의 유일무이한 달을 뵙습니다.”
“그런 인사치레는 필요 없어요. 우리 사이에는 그런 거 말고도 할 말이 많으니까요.”
로벨리아가 씩 웃었다.
‘쉬운 상대는 아니라고 생각하긴 했지만.’
대신관은 남몰래 속으로 혀를 찬 뒤, 후드를 벗어 얼굴을 드러냈다. 모두의 눈앞에 드러날 때, 그의 새하얀 얼굴 위에는 잔잔한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송구하지만 황후 폐하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저는 아무것도 모르겠습니다. 이런 지위에 있다 보면 사적인 외출을 할 때 주변의 시선이 부담스러워 모습을 숨기는 것을 선택하는 일이 점점 많아지지요. 하지만 제가 후드 달린 로브를 입었다는 이유만으로 저를 의심하시는 것은 아니실 터이니, 그렇게 생각하시게 된 이유가 궁금해지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