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5. 가짜 황후는 물러가라2022.02.06.
케일럽은 홧김에 한 말이었지만, 그것을 거의 확신하고 있었던 로벨리아는 새삼 케일럽을 다시 보게 되었다.
‘미래의 정보 길드장이라 그런지 역시 예리하구나.’
그런 식으로, 가까운 사람들이 슬퍼하고, 실망하고, 분노하고.
“악녀 황후를 폐후하라!”
“빙의자는 물럿거라!”
“거짓말쟁이 위선자는 필요 없다!”
언론과 여론은 빙의자로서 황제를 속이고, 선인의 흉내를 내어 국민들을 속인 불세출의 악녀라고 비난하던 그때. 가장 어려운 시기에도, 결국 반격의 때는 왔다.
‘이제는 내가 움직이기 시작해야겠어.’
그녀를 향한 궁금증 섞인 적개심이 최대로 무르익은 때, 로벨리아는 그렇게 결심하곤 결심을 행동으로 옮기기 시작했다.
***
“마, 마님!”
거리에 노을이 깔리는 시각. 라이트 자작부인은 두 자리에 가까운 개수의 인터뷰를 비롯한 바쁜 스케줄을 소화하고 자작저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집사가 다급하게 자신을 부르며 달려왔다. 모든 것이 자신이 바라던 대로 되었으나 몸이 무척 피곤했다. 그래서 그녀는 신경이 날카로워져 있었다.
“무슨 일이지?”
‘저 늙은이가 나이를 먹더니 이젠 사소한 것에도 번번이 호들갑이라니까. 이번에도 별일이 아니라면 가만두지 않겠어.’
그런 결심이 담긴 자작부인의 물음에 집사는 창백한 얼굴로 대답했다.
“황후 폐하로부터의 초대장이 왔습니다.”
“뭐라고? 황후? 초대장?”
“예. 여기…….”
평소처럼 그 밉살스러운 여자에게 ‘폐하’라는 극존칭을 쓰지 말라며 화를 낼 새도 없었다. 자작부인은 집사가 내민 편지를 황급히 낚아챘다.
“기자회견을 할 예정인데, 나를 초청하겠다고? 이건 대체 무슨 꿍꿍이지?”
“무슨 생각인지는 모르겠지만 가지 않으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쪽에서도 뭔가 준비가 되어있지 않겠습니까? 그러지 않고서야 내내 잠잠히 있다가 갑자기 이런 자리를 마련할 리 없습니다.”
집사가 걱정스레 말했으나, 자작부인은 무언가 곰곰이 생각하는 듯하더니 대답했다.
“아니, 가겠어. 이런 상황에서 제안을 거절했다가는 오히려 의심만 받을 뿐이야. 안 그래도 내 인터뷰가 앞뒤가 맞지 않는다고 의심하는 자들이 있는데……. 내가 기자회견을 거절한 것이 알려지면 그 작자들이 촉새처럼 입을 놀리겠지. 안 그래?”
“하지만 마님…….”
“시끄러워. 집사 주제에 건방 떨지 마. 내 일은 내가 알아서 해.”
자작부인은 고압적으로 집사의 말을 끊었다.
“제국민 몇 명이 내게 등을 돌렸다 해도, 여전히 기자들도, 대귀족들도, 대신관도 내 편인데 뭐가 두렵겠어? 이번 자리에서 아주 큰 실수만 하지 않는다면 기자들은 최대한 나에게 유리한 쪽으로 기사를 쓸 거야. 대귀족들의 후원을 받고 있으니 당연한 일이지. 그러니 이번 기회에 그 콧대 높은 여자에게 본때를 보여주겠어.”
그녀의 단호한 말에 결국 집사는 어깨를 축 늘어뜨린 채 고개를 떨궜다.
“그러시다면……. 알겠습니다.”
한편으로 집사는 자신의 주인마님을 보며 생각했다.
‘과연 마님은 정말로 빙의되신 것이 맞을까?’
바로 어제, 자작부인은 자신이 다른 세계에서 온 빙의자임을 밝혀 자작저의 모두를 충격 속에 빠트렸다. 그녀를 7년이나 모셔왔던 집사 역시 마찬가지였다. 자신이 아가씨 시절부터 충성을 바쳐왔던 주인마님이, 사실은 언젠가부터 다른 사람으로 바뀌어 있었다니! 충격과 배신감을 느낄 수밖에.
‘하지만……. 그렇다고 하기에는, 그 충격적인 기자회견 전에 나는 아무런 위화감도 느끼지 못했는데.’
영혼이 다른 사람으로 바뀌었다면, 설령 본인이 아무리 원래 몸주인의 흉내를 낸다고 해도 그 측근인 자신은 뭔가 이상함을 느꼈어야 했다. 소문 속의 황후처럼 취향이나 성격, 말투가 달라진다거나. 그러나 집사는 자작부인의 달라진 점을 조금도 느끼지 못했다. 그에게 자작부인은 예나 지금이나 똑같았다.
‘옛날부터 자신이 원하는 것을 위해서라면 과격한 일이라도 벌이고 마는 성미의 분이셨지. 이번에도 그런 것은……. 제발 아니어야 할 텐데.’
저택을 떠나는 주인마님의 뒷모습을 보며, 집사는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빌고 또 빌었다. 이 모든 것이 자작부인의 자작극이 아니기를. 그래서 그녀가 수습할 수 없을 정도로 사건이 번지는 일만은 없기를. *** 혹여 황궁에서 기자회견을 하면 부담을 느낀 자작부인이 참석하지 않겠다고 할까 봐 기자회견은 호텔의 로비를 빌려 이루어졌다.
“혹시 이렇게까지 했는데도 자작부인이 오지 않겠다고 하면 어떡하죠?”
시녀의 걱정스러운 질문에, 로벨리아는 대답했다.
“올 거야. 인터뷰에서의 행보로 그녀는 의심을 사고 있고, 나는 이것이 첫 번째 의사표명이기 때문에 이번 기자회견은 굉장히 큰 주목을 받고 있어. 이런 상황에서 사람들의 관심과 신뢰를 갈망하는 자작부인이 오지 않을 리 없어.”
로벨리아의 말 대로였다. 구름처럼 몰려든 기자들로 인해 로비에는 발 디딜 틈도 없을 정도였다. 어림잡아도 2~300명은 될 법한 수의 기자들을 향해 로벨리아는 담담한 시선을 던졌다.
‘전생에는 더 큰 규모의 행사 진행도 맡아보았는걸. 이 정도는 괜찮아.’
그렇게 생각하며 스스로의 마인드 컨트롤을 하던 그때였다.
“자작부인이 왔습니다!”
“라이트 자작부인, 한 말씀만 해주십시오!”
‘왔군.’
로벨리아는 마지막으로 호흡을 정돈하고, 기다렸던 상대를 향해 미소 지었다. 한편 라이트 자작부인은, 자신감과 오기에 찬 채 이 자리에 나타났으나 멀찍이서 황후를 마주쳤을 때부터 두 눈을 믿을 수가 없었다. 자신의 노력과 언론과 여론의 공격으로 인해 당연히 상대도 어느 정도의 타격을 입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자작부인의 눈에 비친 로벨리아는 깜짝 놀랄 정도로 화려한 옷을 입고, 여유로 가득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목은 꼿꼿이 세운 채로, 턱을 치켜들고 우아한 동작으로 이쪽을 향해 걸어나왔다. 마음고생을 한 사람에게서 보일 법한 증상, 눈 밑이 꺼져 있다든가 해쓱해 보인다거나 혈색이 좋지 않다거나 한 모습은 찾아볼 수조차 없었다. 게다가…….
‘원래 저렇게 키가 크고…… 눈에 띄었던가?’
그녀를 만난 것은 몇 년 전, 무도회에서가 마지막이었지만……. 그때만 해도 그녀는 황후라는 자리에는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자신감 없는 얼굴로, 어깨를 푹 숙인 채 나다녔다.
‘성격과 외모가 많이 바뀌었다고 듣긴 했지만 어느 정도는 과장일 줄 알았는데…….’
황후라는 자리에는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카리스마 없었던 그녀는 지금, 도무지 얕볼 수 없을 정도의 위엄과 자신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 자작부인은 순간적으로 중력이 강해지는 것처럼 느껴졌다. 황후를 향해 다가가야 하지만, 강한 중력이 자신의 발을 붙잡고 있었다.
‘아니, 중력이 강해진 게 아니야. 이건……. 위압감에 짓눌린 거야.’
이 호텔에 들어설 때만 해도 자신감으로 가득했던 자작부인은 어느샌가 로벨리아에게 압도당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을 이 자리의 모두가 느끼고 있는 듯했다.
“자작부인의 얼굴에서 혈색이 사라졌는데.”
“확실히 분위기를 휘어잡는 장악력으로는 자작부인이 황후 폐하를 따라올 수 없군.”
기자들이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려오자, 수치심과 오기에 자작부인은 속이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아니, 그래봤자 사치나 일삼는 가벼운 여자일 뿐이야. 내가 위축되어야 할 이유가 하나도 없어. 대신관, 성국도, 제국의 대귀족들도 전부 내 편이라고.’
그렇게 생각한 자작부인은 용기를 쥐어짜내 카펫을 밟고 눈앞의 여성에게로 나아갔다.
“도망치지 않고 여기까지 오다니 놀랍군, 자작부인. 그 용기 하나는 치하할 만해.”
도발임이 분명한 말에 자작부인은 애써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제게는 거리낄 것이 하나도 없는데, 왜 도망쳐야 합니까?”
“거리낄 것이 없다라. 말 나온 김에 하나 묻지, 자작부인.”
로벨리아는 붉은 루주를 덧바른 입꼬리를 휘었다.
“그대는 이제까지 한 말, 그리고 지금부터 할 말에 대하여 책임질 수 있고, 만일 거짓증언이 있었거나 있다면 그에 따른 합당한 벌을 받을 의향이 있겠지?”
“…….”
“한 번 모두가 지켜보는 앞에서 선언해보도록.”
이 자리는 굉장히 많은 주목을 받고 있었고, 따라서 기자들만이 참가한 것은 아니었다. 기자가 아닌 구경꾼도 신분의 고저를 가리지 않고 자리를 채우고 있었다.
“자작부인은 오직 진실만 말하고 있다!”
“자작부인을 겁박하지 마라! 가짜 황후는 물러가라!”
“우우우! 물러가라!”
구경꾼들 사이에서 그런 야유가 터져나왔다. 대부분 대귀족들이 고용한 바람잡이였다. 바람잡이임은 알고 있으나 그 소리에 용기를 얻은 자작부인이 말했다.
“물론입니다, 황후 폐하. 저는 예언기록을 훔치는 중죄를 저질러 닷새 뒤 성국으로부터 큰 벌을 받게 되었는데, 고작 거짓을 고하기 위해 그런 짓을 벌였겠습니까? 제가 이제부터 하는 말은 전부 진실이며 만일 아니라면 그에 상응하는 벌을 받을 것을 신의 앞에서 맹세합니다.”
그녀의 말에 로벨리아는 마치 비웃듯 입꼬리를 비틀어 올렸다.
“어제의 기자회견 이후로 그대가 줄곧 주장하고 있는 바는 이것이지. ‘그대와 나는 빙의자이며, 그대는 예언기록을 훔쳤고, 전생에서 그대와 나는 같은 교육기관에서 수학했고, 그곳에서 나는 그대를 핍박했다’.”
“네, 맞습니다.”
“하지만 이 주장들은 만일 그대가 그 대단한 신성력의 소유자가 아니라면 도미노처럼 연쇄적으로 무너지고 말지. 그렇게 생각하지 않나?”
자작부인은 가지고 나온 예언기록서를 힘주어 꽉 붙들었다.
“네, 그렇겠지요. 하지만 저는 분명 신성력을 가지고 있고 어제도 모두의 앞에서 보여드렸습니다. 원하신다면 오늘 이 자리에서 다시 보여드릴 수도…….”
“책에서 빛이 나는 잔재주 따위는 필요 없어.”
로벨리아의 차가운 목소리가 그녀의 말을 끊었다.
“그것보다 좀 더 제대로 된 방법으로, 그대의 신성력을 시험해보도록 하지.”
‘뭐라고? 설마 대지의 정령석을 가지고 있나? 하지만 그럴 리 없을 텐데. 대신관이 수입통로는 확실히 막아뒀다고…….’
그 차갑고도 단호한 목소리에 자작부인의 머리가 부산스럽게 회전하기 시작한 그때. 호텔 로비 한복판에서, 그 자리에 있던 모두가 놀랄 만한 일이 일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