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0. 이것이 바로 황후의 자비다2022.01.20.
“아, 아이고. 정말 죄송합니다. 제가 생각이 짧아서 그만……. 정말 죄송합니다.”
당연히 호위기사들이 저지했으나, 로벨리아가 손을 들어 그들을 막았다. 그녀는 아무런 주저함도, 스스럼도 없이 손을 뻗어 노파의 손을 잡았다.
“이렇게 하면 될까요? 환영해주어 고마워요.”
“아, 아이고! 황후 폐하! 손이…… 많이 더러울 텐데.”
노파는 기겁했으나, 로벨리아의 손에서 느껴지는 체온은 따뜻했다.
“항상 열심히 일해주어 정말 고마워요. 당신 같은 분 덕에 이 나라도 유지되는 것이겠죠.”
로벨리아는 진심을 담아 말했다.
“손녀분께서 이 일을 좋아해 주셨으면 좋겠네요.”
“여, 여부가 있겠습니까. 정말 감사합니다, 황후 폐하!”
구두의 떨어진 밑굽을 고치고 나오는 길에도 노파는 연신 허리를 숙였다. 지네 튀김 사건 이후로 웃고는 있지만 약간 좋지 않은 안색으로 로벨리아의 곁을 지키던 알렉산드로스가 말했다.
“구두를 고칠 필요가 있나? 마차에 새 구두가 있을 텐데.”
로벨리아는 쑥스러운 듯이 웃었다.
“그냥 한번 해보고 싶었어요.”
그런데 구두수선 노점에서 서른 걸음도 채 가지 않은 그때였다.
“여기서 장사하지 말라고 했지!”
큰 소리에 저절로 그쪽으로 고개가 돌아갔다. 구두수선 노점을 돌아본 로벨리아는 충격적인 광경을 보았다. 껄렁하게 생긴 남자 둘이 기물을 발로 차고, 구두장이 노파에게 윽박지르고 있는 것이었다.
“이 할망구가 늙어서 귀가 막혔나? 여기서 장사하지 말라고 몇 번을 말해!”
“정말 죄송합니다. 제발 이번 달까지만 봐주세요. 다음 달에는 꼭 자릿세를 마련해보겠습니다.”
“우린 뭐 땅 파먹고 사나? 분명 말했지, 자릿세를 안 내면 여기서는 장사 못 한다고!”
“죄송합니다. 하지만 평생 이 동네에서만 살아와서, 여기 말곤 달리 갈 데가 없어요. 게다가 손녀를 먹여 살릴 사람은 저밖에 없어요. 제발 이번만 자비를…….”
“자비 좋아하시네! 그건 저기 저, 황궁의 대단하신 황후 폐하께나 구걸하시지!”
남자가 황궁이 있는 방향을 가리키며 소리쳤다. 아무래도 여기에 ‘그’ 황후가 있다고는 상상도 하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맞고 나갈래, 그냥 나갈래? 어? 다 늙어서 어디 부러지면 낫기도 어려울 텐데. 그 잘나신 손녀딸의 짐짝이나 되어볼래?”
“손녀딸이 몇 살이랬지? 열 살이랬나? 우리에게 넘기든가. 아직 어리긴 하지만 쏠쏠하게 쳐주지.”
남자들이 끔찍한 발언을 하며 행패를 부리는데도, 주변의 사람들은 구경만 할 뿐 아무도 도와주지 않았다. 개중에는 돈과 지위가 꽤나 있어 보이는 사람도 있는데도 그랬다. 남자들의 저열함과 가엾은 노파를 도와주지 않는 주변 사람들의 비겁함에 로벨리아는 절로 속이 끓어올랐다. 그런 그녀의 기분을 눈치챈 듯, 알렉산드로스가 속삭였다.
“이 거리는 전부 황실의 소유이고, 수도에 조직폭력배는 없을 터인데 자릿세를 받으려 하다니. 참으로 하찮은 협잡질이로군.”
“…….”
“처리해줄까? 저런 시정잡배들을 치우는 일은 눈을 깜빡이는 것보다도 쉽지.”
그의 말은 분명 믿음직했다. 그라면 눈 깜짝할 사이에 저 양아치들로 하여금 응분의 대가를 치르게 할 수 있으리라. 하지만……. 로벨리아는 고개를 저었다.
‘이 정도의 일을 나 스스로 처리하지 못한다면 황후라고 할 수 없지.’
“이 할망구가, 말로 해선 안 되겠네! 오늘은 제 발로 집에 못 갈 줄 알아라!”
험악한 소리와 함께 남자가 손을 치켜드는 바로 그때였다.
“멈춰라!”
날카로운 소리가 멀리까지 울려 퍼졌다. 그것은 그 자리에 있던 모두가 행동을 멈추고 돌아볼 정도로 단호했으며 또 카리스마가 있었다.
“남의 고혈을 빠는 것으로 생존하는 빈대와 같은 무리가 잘도 나에 대해 입에 담는구나.”
구두 굽이 돌바닥에 부딪혀 맑고 청명한 소리를 냈다.
“나에게 자비를 구걸하라고 말했겠다. 그 말에 틀림없이 후회는 없겠지?”
그 목소리와 발소리, 화려하지만 품위 있는 모습에 남자들의 얼굴이 멍해졌다. 그들은 잠시 로벨리아를 알아보지 못했다. 시장의 다른 사람들은 대부분 얼굴을 보자마자 알아본 것과 사뭇 다른 반응이었다. 아마 사회의 밝은 영역에서 멀리 떨어진, 자신과 제일 멀리 떨어진 어두운 영역에서 살아가는 자들이기 때문일 것이라고 로벨리아는 익히 짐작했다. 그러나 주변의 사람들이 수군거리는 것도 있고 해서, 남자들도 결국 로벨리아를 알아보았다.
“화…… 황후……?!”
힘없는 노파를 상대로 할 때는 의기양양했던 남자들의 얼굴이 백지장처럼 질렸다.
“그래, 내가 이 나라의, 이 노파의 국모다.”
로벨리아는 그들의 앞에서 입꼬리를 비틀어 끌어올렸다.
“내 백성들을 대하는 행실은 나를 대하는 것과 다름없지. 백성들은 나의 자식과도 마찬가지니까. 어디 아까 이 노파에게 했던 말을 내 면전에서도 해보아라.”
“화, 화, 황후 폐하……. 저, 저, 정말 죄송합니다…….”
“뭣들 하느냐? 어서!”
남자들은 무너지듯 무릎을 꿇고 바닥에 이마를 박듯이 머리를 조아렸다.
“주, 주주,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부디 한 번만 용서해주십시오…….”
로벨리아는 이런 인간군상을 숱하게 보아왔다. 약하고 가진 것 없는 자 앞에서는 누구보다 강하면서, 자신보다 힘 있고 권력 있는 자 앞에서는 한없이 약해지는 자들. 이런 사람들은 계급사회인 제국에만 있는 것도 아니었다. 전생에서도 로벨리아는 이런 사람을 숱하게 보아왔고, 그들을 경멸했다. 그 커다란 몸을 바닥에 옹송그리고 사시나무처럼 벌벌 떠는 남자들의 모습은 참으로 하찮고 졸렬해 보였다. 로벨리아는 못을 박듯 말했다.
“나의 자식과 다름없는 백성들을 괴롭히는 암적 존재를 황후로서 용서할 수 없지.”
“으…… 흐흐흑, 흑…….”
“비겁하고 저열한 너희들은 법에 따라 그에 걸맞은 대가를 받게 될 거야. 이렇게 추잡한 삶을 이어온 것을 영원토록 후회하게 만들어주마.”
그녀의 말이 이어질수록 당장이라도 혼절할 것처럼 벌벌 떨던 한 남자는…….
“으아아아아악!”
로벨리아가 용서할 것처럼 보이지 않자, 갑자기 용수철처럼 벌떡 일어나 괴성을 지르며 도망치기 시작했다.
“저 녀석이!”
“잡아라!”
로벨리아의 호위기사들이 그를 잡으려 하였으나, 알렉산드로스에게 그녀의 안위 보호를 최우선으로 하라는 명을 받은 탓에 누구도 그녀의 곁을 함부로 떠나지 못했다. 그런데도 남자는 오래 도망치지 못했다. 그가 채 스무 걸음도 가기 전이었다.
“우악!”
그는 누군가의 발에 걸려 넘어져 데굴데굴 굴렀다. 그런 그의 멱살을 거친 손아귀가 잡아 끌어올렸다.
“이런, 이렇게 사람이 많은 곳을 다닐 때는…… 앞을 잘 보고 다녀야지.”
알렉산드로스는 차가운 미소를 지으며 자신의 옷을 털었다.
“제국의 황제와 부딪쳤으니, 황족 폭행죄 추가인가. 아무래도 이번 생에 감옥에서 나가기는 힘들겠군.”
“으아…… 흐아아! 흐어어어어!”
남자가 절규했다. 그는 돌바닥에 얼굴을 부딪치는 바람에 앞니가 깨지고 코피가 터지기까지 했는데, 입과 코에서 피를 줄줄 흘리며 절규하는 모습은 참으로 비참하기 짝이 없었다. 그러나 주변의 그 누구도 그 남자들을 불쌍하게 여기지 않았다. 모두가 고소한 듯 만족스러운 얼굴로 지켜보며 수군덕거릴 뿐이었다. 로벨리아는 알렉산드로스에게 달려왔다.
“괜찮아요? 어디 다친 건 아니죠?”
다 잡았다고만 생각했지, 이렇게 많은 기사들을 앞에 놔두고도 도주를 시도할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알렉산드로스는 씩 웃으며 걱정스러운 얼굴을 한 로벨리아의 콧잔등을 꾹 눌렀다.
“내 생에 그대의 걱정을 사보는 날이 다 오다니, 마치 이 자리에 즉위했을 때만큼이나 기쁘군.”
로벨리아는 그의 허풍이 심하다고 생각하면서도, 그 덕분에 웃음이 나왔다. 저렇게 농담을 하는 걸 보니 어디 다친 건 아니라는 확신이 든 것이다.
“그 남자가 흉기라도 들었으면 어쩔 뻔했어요. 오늘은 다행이었지만……. 앞으론 그러지 마세요.”
“감사 인사도 하기 전에 잔소리인가? 그래, 그대의 잔소리라니 감사히 받아야지.”
그렇게 말한 알렉산드로스는 눈 깜짝할 새에 로벨리아의 몸을 끌어당겨 품에 안았다.
“느껴지나? 난 조금도 다치지 않았어. 그 정도로 다칠 내가 아니지.”
그는 그 커다란 손으로 로벨리아의 손을 쥐어, 옷 위로 자신의 몸을 만져보게 했다. 로벨리아가 채 어쩌기도 전에, 그녀의 손바닥 아래로 고목처럼 단단한 몸과 잘 짜인 근육의 윤곽이 느껴졌다. 순식간에 로벨리아의 얼굴에 장밋빛 물이 들었다. 그녀는 주저하면서도 알렉산드로스를 올려다보며 물었다.
“심장이 너무 뛰는데요. 무리하셔서 그런 거 아니에요?”
알렉산드로스는 다정히 웃더니, 그녀의 앞머리를 살짝 쓸어넘겨 주었다. 그가 그녀의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그건 당연히 그대 때문이지, 로벨리아.”
그러고보면, 그는 엄연히 로맨스 판타지의 남주인공이었고, 온갖 전장을 전전한 전적이 있었다. 그깟 시정잡배 한 명 때문에 그의 심장이 이렇게 뛴다니, 말도 되지 않았다.
‘그렇지만…….’
예상하면서도 물어본다는 이 어린 애 같은 일이…… 이렇게나 그녀를 가슴 뛰고 기분 좋게 만들어줄 줄, 그녀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로벨리아는 그의 말에, 자신이 이렇게 속이 빤히 보이는 행동을 했다는 사실에, 참을 수 없이 부끄러워져서 그의 가슴팍에 얼굴을 묻었다. 하지만 물어본 것이 후회되지는 않았다. 그녀는 앞으로 오래오래, 이날의 일을 추억하며 즐거워할 것이다. 그의 단단하고 뜨거운 몸과, 빠르게 박동하는 심장. 자신의 유치한 질문과 그의 달콤한 대답을.
‘어떻게 하지? 가면 갈수록 좋아지네.’
로벨리아는 하얗게 녹아드는 머릿속으로 생각했다.
‘달콤한 늪처럼 그에게 끝도 없이 빠져들게 돼.’
“로벨리아.”
다정한 목소리가 귓가를 간지럽히고, 로벨리아는 고개를 들었다. 그의 입술이 조심스레 그녀의 입술을 덮쳐왔다. 로벨리아는 그것을 기쁘게 받아들였다. 두 남자가 치안보호대에 넘겨지고, 노파의 절절한 감사 인사를 받은 뒤 두 사람은 다정한 모습으로 그 자리를 떠났다. 그런데, 그런 두 사람을 지켜보는 시선이 있었다. *** 그 시선의 정체는 바로 대신관이었다. 대신관은 황족과 달리 언론에 정면으로 나서는 일이 잘 없기 때문에 그의 얼굴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거기다 사복 차림을 하고 모자를 푹 눌러쓰기까지 하자, 그의 정체가 대신관이라는 사실을 눈치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다정하게 입술을 겹치고, 다정한 모습으로 황궁으로 돌아가는 두 사람의 모습을 지켜보는 그의 눈은 싸늘하게 식었다.
‘이대로 놔둬서는 안 되겠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