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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9. 그는 아이를 원하고 있을까 (109/151)

109. 그는 아이를 원하고 있을까2022.01.16.

나는 할 말을 잃었다.

16549694844708.jpg‘나는 알렉산드로스가 또 내 의사와 관계없이 돈으로 들이대려 하거나, 내가 추레하게 입는 것이 싫어서인 줄 알았는데…….’

그런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의 입장에서는 내 의사와 취향을 최선을 다해 고민했던 결과였던 것이다. 나의 숨은 의도까지 읽어내려고 애쓰면서. 그는 내가 주변의 시선을 신경 써 정말 좋아하는 스타일의 옷을 입지 못할까 봐 배려하려고 했던 것이다.

16549694844708.jpg‘다만 그가 몰랐던 건, 내가 정말 값비싼 옷을 미친 듯이 좋아하는 게 아니고 이혼당하려고 샀을 뿐이라는 거지만…….’

그의 섬세한 배려에 대한 고마움과 당혹스러움이 동시에 밀려들었다. 나는 곤란한 기색을 숨기지 못했다.

16549694844708.jpg“당신의 뜻은 알겠어요. 나쁜 쪽으로 오해해서 미안해요. 하지만 굳이 그럴 필요는 없어요. 당신은 내가 굉장히 화려한 옷만 입고, 그런 것만 좋아하는 줄 아는 것 같지만 사실 그렇지는 않아요. 지금 입는 것도 충분히 화려하고, 난 이만하면 만족해요.”

16549694844723.jpg“그렇다면 이전에는 왜 극도로 화려한 옷만을 사들였던 것이지? 이제 와서 예전의 소비 습관이 바뀐 이유는 무엇이고?”

그의 질문은 타당했고 나는 할 말이 없어졌다.

16549694844708.jpg‘그냥 솔직하게 당신에게 이혼당하려고, 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하지만 지금에 와서 그런 말은 너무 잔인하게 느껴졌다. 나는 이미 알렉산드로스에게 많은 상처를 주었고, 그 위에 새로운 상처를 얹어주고 싶지는 않았다. 그를 밀어내고 싶었던 옛날이라면 모를까, 나 역시 그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는 지금은 더더욱.

16549694844708.jpg‘나는 어느덧 그를 상처입히는 것을 견딜 수 없게 되었구나. 옛날에는 그렇게나 상처 주는 말만 골라서 했었는데. 그만큼이나 그에게 진심이 되었다는 것이겠지.’

달콤 쌉싸름한 깨달음이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퍼져나갔다. 내가 대답을 주저하자, 알렉산드로스는 다 알겠다는 듯이 웃었다.

16549694844723.jpg“어떤 상황에서라도 당신의 취향을 숨길 필요는 없어. 나는 당신이 좋아하는 것을 마음껏 좋아했으면 해.”

그의 긴 손가락이 내 목 위에 내려앉았다. 더없이 조심스러우면서도 다정한 그 손길의 끝에는, 아름다운 사파이어 목걸이가 걸려 있었다. 나는 그만한 크기의 사파이어는 본 적도 없었다. 아마 나뿐만이 아니라 제국의 모든 귀족 여성들이 그럴 것이었다. 물빛을 띤 사파이어가 내 쇄골 사이에서 맑고 투명하게 빛나는 모습을 흐뭇한 듯 지켜보며, 알렉산드로스가 말했다.

16549694844723.jpg“나는 그대가 황제의 반려라는 위치를 얼마든지 이용하고 즐겨주길 바라. 제국의 골수까지 빨아 먹고, 나라를 기울게 하더라도 그렇게 해서 그대가 그 자리를 선택한 것의 보람을 느낀다면 나는 기쁠 거야.”

16549694844708.jpg“……아무리 농담이라도 그런 말은 하지 마세요. 나라를 기울게 하다니요.”

그의 농담은 가끔 등골이 시릴 정도로 섬찟하게 느껴지는 때가 있었다. ……농담 맞겠지? 농담이어야 할 텐데. 내 말에 알렉산드로스는 이가 드러나도록 씩 웃었다.

16549694844723.jpg“그래, 물론 농담이지. 그대가 애써서 일구어놓은 것을 그리 쉽게 기울게 만들 생각은 없어. 그대가 아무리 돈을 써도 나라가 기울어지지 않게끔 하는 것이 나의 일이 아닌가.”

결국 내가 나라가 기울어질 정도로 돈을 쓰는 것은 기정사실인 셈이었다.

16549694844708.jpg‘대체 이 오해를 어떻게 풀어야 좋을는지…….’

오래 묵은 오해다 보니, 당장 풀어내는 것은 어려울 것 같았다. 앞으로 천천히 시간을 들여서, 내 취향이 그렇게 호화롭기만 하지는 않다는 것을, 의외로 소소하고 평범한 것도 좋아한다는 것을 그에게 인식시키는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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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알렉산드로스가 데려가 주었던, 수도의 번화가가 훤히 내려다보이는 레스토랑을 로벨리아는 무척 좋아했다. 그래서 그 이후로도 두 사람은 그 레스토랑에 함께 찾아가곤 했다. 온갖 진귀한 보석을 보고, 가져본 로벨리아였으나 밤의 거리의 반짝임은 그 어느 보석의 반짝임보다도 각별한 데가 있었다. 특히나 알렉산드로스의 그 말을 들은 때부터 더더욱 그렇게 느껴졌다.  

16549694844723.jpg‘그대와 함께 공유하고 싶었던 풍경이야. 우리가 함께 이룬 도시의 모습이지.’

16549694844723.jpg‘나는 궁외부의 일, 그대는 궁내부의 일을 하지 않나. 하나라도 없었으면 이 도시가 이렇게 아름답고 부유해지는 일은 결코 없었겠지.’

  활기차고 끊임없이 움직이는 거리의 모습은 마치 자라는 생명체처럼 보이기도 했다. 알렉산드로스와 자신의 힘으로 키워낸, 사랑스럽고 소중한 생명체.

16549694844708.jpg‘앞으로도 잘 자라주었으면 좋겠네.’

로벨리아는 식사를 하면서 흐뭇한 눈으로 야경을 지켜보았다.

16549694844708.jpg‘알렉산드로스와 내가 함께 키웠다고 생각하니, 꼭 우리들의 자식처럼 느껴지기도 해.’

그런 생각이 드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으리라. 두 사람은 부부였고, 부부가 함께 키워낸 존재에게 자식의 이미지가 연상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로벨리아는 자신의 그런 생각에 깜짝 놀랐다.

16549694844708.jpg‘자식이라니 내가 너무 앞서나갔나. 아직 입이나 겨우 맞춰본 사이인데.’

그녀는 괜히 눈앞의 남자를 흘긋거렸다. 알렉산드로스가 아무리 머리가 좋아봤자 자신의 마음속까지 읽을 수 없다는 건 당연한 일이지만……. 왠지 그에게 마음이 들킬 것만 같았다. 식사를 하던 알렉산드로스는 시선을 느끼고 이쪽을 향해 미소 지었다.

16549694844723.jpg“무슨 일이지?”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한 그 얼굴. 로벨리아는 그에게 자신의 생각을 들키지 않았다는 사실에 안도했다.

16549694844708.jpg“풍경이 너무 예뻐서요. 이 풍경을 앞에 두면 괜히 감상적으로 되네요.”

16549694844723.jpg“그럴 만도 하지. 이 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야경일 거야.”

그가 자신의 생각을 몰라준다는 것은 다행스러우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묘한 아쉬움이 들었다.

16549694844708.jpg‘그는 아이를 원하고 있을까?’

황족들에게 황손을 생산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일이니 그 역시 그럴지도 모른다.

16549694844708.jpg‘나는 언젠가 그의 아이를 낳아야 할지도 몰라. 지금 당장은 아니더라도, 언젠가는. 그는 황제이고 나는 황후이니까.’

하지만, 그는 다른 황족들과는 달랐다. 자신의 ‘목적’을 위해 황손의 생산을 유예할 정도니까. 그 정도면 후계를 잇는 것을 그렇게까지 중요시 여기는 건 아닌가? 싶으면서도, 역시 확신할 수는 없었다. 최단기간 안에 목적을 달성하고 곧바로 황손을 가지려는 것일 수도 있으니까. 로벨리아로서는 아이를 갖는다는 것을 생각만 해도 가슴이 떨렸다. 일 년 반 전까지만 해도 자기 일에 집중하느라 바빠 연애도 해본 적 없는 커리어우먼이었으니까. 누군가의 아이를 낳는다는 것은 상상도 해본 적이 없었다. 그렇다고 그런 걸 감수하고 아이를 낳아주고 싶을 정도로 그를 사랑하는 것은 아니었다. 분명 그를 좋아하고, 그 마음이 점점 커지고 있는 것도 느끼고 있지만, 여전히 그의 아이를 낳고 싶을 만큼은 아니었다. 지금 그와의 관계는 너무나 달콤해서, 계속해서 이 달콤함에 빠져 있고만 싶었다. 지금도 이미 너무나 좋은데, 여기에 합방이니 아이니 하는 이야기가 개입되는 것이 두려웠다. 그것은 그와의 관계의 변화를 의미하니까.

16549694844708.jpg‘하지만 우리가 부부인 이상 언젠가는 꼭 해야 하는 이야기고, 지나야 할 과정이겠지.’

아이를 낳고 키우는 일은 누구에게나 두렵고, 불안하고, 예민한 주제였다. 그런 이야기를 하다 보면 어쩌면 그와 의견 차이가 생겨 다툴지도 모른다. 지금의 이 한없이 달콤하기만 한 관계에도 어떤 변화가 생길지도 모른다.

16549694844708.jpg‘그래도…… 언제까지나 피하기만 하고 싶지는 않아.’

로벨리아는 결심했다.

16549694844708.jpg‘조만간 이 문제에 대해 꼭 그와 진지한 이야기를 나누어봐야겠어.’

  *** 저녁 식사를 하고, 두 사람은 소화를 시킬 겸, 밤거리를 구경하며 조금 걷기로 했다.

16549694844708.jpg“낮에는 이곳에 여러 번 와보았지만, 낮과 밤의 풍경은 완전히 다르네요.”

16549694844723.jpg“확실히 그렇군.”

밤에는 인적이 적어질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렇지 않았다. 오히려 밤은 밤대로 업무 뒤 피로를 풀려는 사람들로 우글거리고 있었다. 발 디딜 틈 없이 북적거리는 술집들. 길거리 판매상과 공연자. 웃음을 터뜨리는 취객들과 밤늦은 시간까지 뛰어노는 아이들.

16549694844708.jpg‘꼭 야시장 같은걸. 이런 생활감 느껴지는 풍경은 정말 오랜만이라 반갑네.’

되돌아보니 마지막으로 시장을 본 것은 전생의 일이었던 것 같았다. 그간은 황후로 지내느라 지극히 호화로운 공간만을 질릴 정도로 보아왔으니까. 반가움을 느낀 로벨리아는 야시장을 한껏 즐겼다. 길거리 공연자의 공연도 듣고, 다양한 수공예품도 구경하고, 길거리 음식도 먹었다. 너무 즐거운 나머지 알렉산드로스의 존재도 잠깐은 잊어버릴 정도였으나, 그는 군말 없이 그녀를 따라와 주었다.

16549694844723.jpg‘이런 시장이나 길거리 음식도 좋아할 줄은 몰랐군. 늘 값비싸고 호화로운 것만을 즐기는 줄 알았는데.’

알렉산드로스는 그 나름대로 즐거움을 찾았다. 로벨리아를 관찰하는 것이었다.

16549694844723.jpg‘호기심이 많고, 새로운 것에 도전하는 도전정신도 뛰어나군. 그 뛰어난 업무에 대한 창의력은 이런 것에서 기인한 것인가 보군.’

로벨리아는 대부분의 길거리 음식은 다 도전하였으나, 지네 튀김만큼은 도저히 입에 넣을 수가 없었다. 지네 튀김을 손에 들고 어쩔 줄 몰라 하는 로벨리아의 모습을 보고 알렉산드로스가 피식피식 웃었다.

16549694844723.jpg“무리해서 먹을 필요는 없어. 자, 여기에 버려.”

16549694844708.jpg“하지만 먹을 걸 버리는 건 너무 아까워요.”

제국인으로 살아온 인생보다 한국인으로 살아온 인생이 훨씬 길었던 그녀에게 먹을 걸 한 입도 먹지 않고 버리는 것은 역시 꺼려지는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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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549694844723.jpg“그럼 역시 한 입만 먹지 그래. 의외로 먹어보면 진미일지 어떻게 알겠나.”

늘 단호하던 그녀가 어쩔 줄 몰라 하며 주저하는 모습이 귀여웠던 나머지 알렉산드로스는 짓궂은 농담을 던졌다. 시종일관 여유를 잃지 않았던 그의 얼굴에 금이 간 것은 로벨리아의 이 말이 떨어진 직후였다.

16549694844708.jpg“그럼 당신이 먹을래요?”

16549694844723.jpg“뭐?”

16549694844708.jpg“당신이 먹어주면 안 아까울 것 같아요. 당신이 먹어줘요.”

  ***

16549694926795.jpg“세상에, 저희 가게에 황후 폐하와 황제 폐하께서 와주시다니! 가문의 영광으로 알겠습니다.”

작은 노점을 운영하는 노파는 슬리퍼도 신지 못하고 맨발로 뛰어나왔다. 영광이라는 말이 빈말이 아닌 듯, 그녀는 감격의 눈물마저 보였다.

16549694926795.jpg“황후 폐하, 저희 손녀가 황후 폐하의 열렬한 지지자입니다. 황후 폐하에 대한 기사가 실린 신문이란 신문은 다 모아서 벌써 그 양만 해도 작은 방의 반을 채울 정도랍니다. 혹시 손녀를 위한 서명을 한 장 받을 수 있을까요? 그 애가 정말 기뻐할 것 같습니다.”

16549694844708.jpg“어머, 당연하죠.”

로벨리아는 노파가 내미는 노트에 펜을 꺼내 사인했다. 능숙한 솜씨였다. 하지만 서명을 받은 뒤에도 노파는 여전히 할 말이 남아 있는 것 같았다.

16549694926795.jpg“호, 혹시……. 악수도 한 번 받을 수 있을까요? 할미가 황후 폐하와 악수를 나눴다는 사실을 알면 손녀가 자지러질 겁니다.”

서명과 신체 접촉은 다른 문제였다. 노파는 한나절 동안이나 계속해서 구두를 손질해 손이 더러웠다. 두 손은 마르고, 쭈글쭈글하고, 검버섯이 피어 있기까지 했다.

16549694926795.jpg“무엄하다! 황후 폐하께서 배려를 해주시니 한도 끝도 모르느냐.”

16549694926795.jpg“적당히 해라! 그 더러운 손을 감히 황후 폐하께 들이대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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