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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8. 그가 내가 빙의자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108/151)

108. 그가 내가 빙의자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2022.01.13.

대신관은 신의 사자로서 지지를 받고 있으며 모두의 존경을 받고 있다. 그뿐만이 아니다. 성국의 종교는 전 대륙에 영향을 미쳐서, 대륙의 물리적 중심이 제국이라면 정신적 중심은 성국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이다. 종교는 사람들의 사고방식의 근본이 되는 만큼, 제국 역시 성국의 영향을 적지 않게 받고 있었으며 황제 역시 대신관이나 성녀를 함부로 대하지 못한다. 그러니 대신관의 신탁 발표는 절대적인 신뢰성을 가진다.

16549694662766.jpg‘물론 나는 제국의 황후고, 국민들의 지지도 얻고 있지. 그러니 내가 부정한다면 여론이 바로 대신관에게 넘어가지는 않을 거야.’

대신관과 나의 발표가 상반된다면…… 어떻게 될까?

16549694662766.jpg‘사람들은 혼란스러워하겠지. 대신관과 황후 중 누구의 편을 들어야 할지 알 수 없어 할 거야.’

그러니 내 생각에, 결국 여론을 주도하게 되는 것은…….

16549694662766.jpg‘아마 황제인 알렉산드로스의 의견이겠지.’

하지만, 아무리 고민해보아도 내가 빙의자라는 말을 들었을 때의 알렉산드로스의 반응은 잘 예상이 되지 않았다.

16549694662766.jpg‘물론 나는 내 말을 믿어주었으면 좋겠지만……. 그럴 거라는 확신이 서지 않아.’

알렉산드로스는 내게 무척 진지하고, 날 위해서라면 뭐든지 해줄 수 있을 것만 같지만……. 그토록 사랑한 사람이 자신이 알던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의 충격은 짐작이 가지 않았다.

16549694662766.jpg‘오히려 지금 그가 나를 사랑하는 만큼 더 큰 배신감을 느낄지도 몰라.’

내게 배신감을 느끼고, 분노하는 그의 모습을 그저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가슴 속 어딘가가 와르르 무너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것은 그저 내가 황제를 속인 죄로 폐위당하고, 큰 벌을 받을 것이 걱정되어서가 아니었다.

16549694662766.jpg‘나를 향한 그의 다정함이 비수가 되어 돌아올 것이 두려워.’

나는 생각보다 더 그에게 익숙해진 것이 분명했다. 그의 다정함이, 그 미소가 더 이상 나를 향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가정하는 것만으로도 이토록 가슴이 아픈 걸 보면.

16549694662766.jpg‘한때 그 다정함이 없어도 너무나 잘 살던 때가 있었는데. 갑자기 모르는 세상에 떨어져도 내 앞길을 준비해서 살아남겠다며 씩씩하게 굴었던 때가 있었는데.’

차라리 처음부터 그 온기를 몰랐더라면 모를까. 이미 한 번 그 따뜻함을 알아버린 몸에게 온기 없는 세상은 너무나도 쓸쓸하다. 잠이 오지 않아 뒤척이던 나는 씁쓸하게 웃었다.

16549694662766.jpg‘나 생각보다 더 꽤, 그를 많이 좋아하는구나.’

마음이라는 것이 참 얄궂다. 이토록 중요한 사실은 행복한 때에 알게 되는 법이 없다. 꼭 두렵고, 불안하고, 무언가가 모자랄 때에만 비로소 깨닫게 된다. 씁쓸한 깨달음과, 그와의 관계에 대한 걱정과 함께 나는 잠을 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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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6549694662766.jpg‘걱정만 해서는 소용없지.’

다음날 맑은 머리로 기상한 나는 결심했다.

16549694662766.jpg‘상대가 손에 쥔 무기를 보고만 있을 수는 없어. 나도 무언가 대비를 해야 해.’

그나마 위안이 되는 것은, 대신관이 내가 빙의자라는 것을 그렇게 금방 유포할 것 같지는 않다는 사실이었다.

16549694662766.jpg‘그의 목적이 단순히 내가 빙의자라는 사실을 퍼뜨림으로써 내 인망을 떨구는 것이라면 했어도 진작 했을 거야.’

나는 생각했다.

16549694662766.jpg‘하지만 대신관은 그러지 않았지. 그것은 그의 목적이 그저 내 인망을 떨구는 것이 아니고, 나와의 거래에 있다는 뜻이야.’

그리고 만일 그의 목적이 나와의 거래라면, 그가 가진 거의 유일한 판돈인 내가 빙의자라는 사실을 이렇게 빠르게 소모할 리는 없었다. 그렇다면 적어도 그가 나와의 거래를 포기할 때까지는 나에게 대비할 시간이 있다는 뜻이다. 그것은 무척 다행인 일이었다. 나는 이른 아침부터 도서관에서 책을 찾아 읽고, 사람을 보내 조사를 시키고, 계획을 짰다. 그것은 대신관이 내가 빙의자라는 사실을 퍼뜨렸을 때의 대비책이었다.

16549694662766.jpg‘그건 그렇고, 그가 나와의 거래에서 얻으려고 하는 게 뭐였지? 내 기억이 맞는다면 아마…….’

그는 나를 ‘원래의 세계로 돌려보내고 싶다’라고 했다. 그것에는 합당한 이유도 있었다. 내가 원래의 세계로 돌아가면 알렉산드로스의 애정의 대상은 사라지고, 아이샤가 다시 그의 관심을 되찾을 가능성이 높아진다. 아이샤를 친동생처럼 아끼는 대신관에게는 반가운 일이리라. 성녀가 황후가 된다면, 덤으로 성국의 제국에 대한 영향력도 강화될 테고.

16549694662766.jpg‘대신관의 입장에서 보면 일리 있는 거래 같지만……. 어쩐지 이것이 그가 노리는 전부가 아닐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내가 대신관을 너무나 불신하기 때문일까? 어쩐지 그에게 숨기고 있는 것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16549694662766.jpg‘일단 그 목적을 알아내야겠어.’

나는 결심했다.

16549694662766.jpg‘그리고 어쩌면 그것이 대신관이 가지고 있는 계략에 대한 해답이 될지도 몰라.’

대신관에 대한 대비도 하고, 기존의 업무도 하고 알렉산드로스와 데이트도 하다 보니 시간은 금방 지났다. 연말 행사를 대비해 맞춘 드레스가 완성되었다는 소식에 나는 다시 한번 부티크를 찾아갔다.

16549694692715.jpg“오래 기다리셨습니다, 폐하. 이번 작품들은 제 회심의 역작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부디 폐하의 높으신 안목에도 흡족하시다면 더할 나위 없는 영광이겠습니다.”

귀족 사회의 단점은 형식이 중요하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무엇을 하든 서론이 길었다. 결코 본론으로 바로 들어가는 법이 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디자이너는 드레스를 완성하느라 어느 정도의 노고가 들었으며 시간과 인력이 소요되었는지 몇 분 동안이나 장광설을 늘어놓았다.

16549694662766.jpg“서론은 됐고, 결과물을 보여주지?”

그나마 내가 좀 멋대로 굴어도 되는 캐릭터라 다행이었다. 내 말에 디자이너는 송구한 듯 고개를 꾸벅거렸다.

16549694692715.jpg“네, 지금 바로 준비해드리겠습니다.”

디자이너의 지시에 조수들이 완성된 드레스들을 가져왔다.

16549694721721.jpg“어머나!”

시녀들이 감탄사를 내뱉었다. 과연, 그럴 만큼이나 드레스들은 아름다웠다. 하지만…….

16549694662766.jpg“잠깐, 뭔가 다른데?”

나는 디자이너와 조수들의 앞에 나서며 말했다.

16549694692715.jpg“네?”

16549694662766.jpg“내가 주문할 때와 디자인이 달라. 지난번 컨펌 때만 해도 이 부분에 이런 보석은 없었는데? 게다가 재질도 달라졌어. 그때는 이런 촉감이 아니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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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 말에 디자이너는 당혹스러운 듯 말을 더듬었다.

16549694692715.jpg“아, 그, 그게…….”

16549694662766.jpg“이게 대체 어떻게 된 거지? 황제 폐하의 피드백을 반영했다고 해도 이건 명백히 내가 주문한 것과 다른 물건이야. 고객이 주문한 것과 다른 물건을 가지고 오면 어떻게 하나?”

내 쏘아붙임에 눈을 데룩데룩 굴리던 디자이너는, 결국 사실대로 실토하고 말았다.

16549694692715.jpg“그, 그게……. 사실 지난번 컨펌 때 황제 폐하께서 저에게 따로 말씀하신 바가 있었습니다.”

16549694662766.jpg“어떤 말씀이었지?”

16549694692715.jpg“예산을 5배, 10배까지도 지불할 테니 재료를 아끼지 말고 최대한 고급스러움을 지향하라고 하셨습니다. 그, 그리고 이 지시사항은 황후 폐하께 말씀드리지 말라고도…….”

나는 기가 막혀서 입을 다물지 못했다.

16549694662766.jpg‘그때 디자이너에게 따로 할 말이 있다고 그러더니, 그게 이거였어?’

이혼을 당하기 위해 노력할 때, 나는 돈을 미친 듯이 펑펑 썼다. 한 번의 쇼핑에 집 몇 채 값이 날아간 적도 있었다. 그런 소비생활도 솔직히 꽤 즐거웠지만, 그것은 내가 도망쳤다 황궁에 돌아오면서 끝이 났다. 왜냐하면 난 더 이상 이혼을 목표로 하지 않았으니까. 악녀로 몰려 이혼당하고자 하는 계획은 포기했는데 굳이 필요 이상의 사치를 부릴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렇다곤 해도 빙의 전의 로벨리아만큼 곤궁하게 생활한 것은 아니고, 현실적으로 품위유지는 될 정도로 쓸 곳에는 쓰면서 살았다. 그저 이혼당하려고 할 때처럼 정신 나간 사치를 부리지는 않게 된 것뿐이다. 디자이너의 설명을 들은 뒤 드레스를 꼼꼼히 살피자, 확실히 모든 완성품이 이전보다 화려하고 고급스러워진 것이 느껴졌다. 보석의 개수가 늘어나고 원단의 품질이 높아지고, 레이스나 섬세한 세공 같은 노동집약적이고 값비싼 가공도 아낌없이 들어간 것이 보였다.

16549694662766.jpg‘알렉산드로스는 대체 왜 이런 짓을 한 거야? 내 옷인데, 필요하지 않은 행동을…….’

나는 한숨을 쉬었다.

16549694662766.jpg“그래, 황제 폐하의 명이었으니 어쩔 수 없었겠지. 드레스는 포장해서 황후궁으로 보내줘.”

16549694692715.jpg“예, 정말 감읍합니다. 얘들아, 준비해라!”

잠시 겁먹고 쪼그라들었던 디자이너는 내 말에 다시 어깨가 쫙 펴졌다. 하지만 이것이 내가 알렉산드로스에게도 항의하지 않겠다는 뜻은 아니었다. 나는 그 길로 중앙궁으로 향했다. 내가 집무실로 직접 찾아오자, 알렉산드로스는 무척 반갑고 기쁜 듯했다.

16549694747481.jpg“그대가 이렇게 찾아와주다니 무척 기쁘군. 다과를 내오라고 할 테니 편히 쉬도록. 아예 여기서 그대의 업무를 하고 가도 좋고.”

16549694662766.jpg“그럴 생각까지는 없어요. 그보다 제가 여기 온 건 당신에게 따질 것이 있어서예요.”

나는 알렉산드로스에게 부티크의 구매확인서를 내밀었다.

16549694662766.jpg“대체 왜 내 드레스 주문을 멋대로 수정했죠? 내가 내 영역을 남이 건드리는 것을 무척 싫어한다는 것 정도는 당신도 알고 있었을 텐데요. 설마, 당신의 아내 되는 자가 지나치게 추레하게 다니는 것이 싫어서는 아니었겠죠? 당신은 내가 최고로 값비싸지 않은 옷을 입으면 부끄럽나요?”

따발총처럼 따따따 쏟아지는 나의 항의에 알렉산드로스는 잠시 눈을 크게 떴다. 그는 내 말을 끝까지 듣더니 고개를 저었다.

16549694747481.jpg“무슨 오해를 한 건지는 알겠지만 그런 게 아니야, 로벨리아. 내가 그대가 부끄러울 리가 있겠나. 그대가 어떤 모습을 하고 어떤 차림을 하더라도 내가 가진 것 중 가장 자랑스러운 것이 바로 그대라는 사실엔 변함이 없어.”

16549694662766.jpg“그럼요?”

16549694747481.jpg“나는 그대의 취향에 대해 오래 생각해왔어. 그대가 뭘 선호하고 뭘 선호하지 않는지에 대해서 말이야. 내가 알 수 있는 한도 내에서 최대한 알아보려고 노력했지.”

이번에는 내가 놀랄 차례였다.

16549694662766.jpg‘내 취향에 대해 그렇게 관심을 기울이고 있었단 말이야?’

아니, 생각해보면 놀랄 일도 아니다. 그는 이전에도 내가 좋아하는 여가활동을 찾겠답시고 300쪽 분량의 두꺼운 보고서를 작성한 적도 있으니까.

16549694662766.jpg‘하지만 그건 내가 일을 적게 하게 만들겠다는 명확한 목표가 있어서 그랬던 것이고……. 보통 그만한 목표가 없어도 이렇게까지 관심을 기울이나?’

그가 내 취향을 알아보기 위해 제일 좋은 정보는, 당연히 내가 어떤 물건을 구매했는지에 대한 구매기록일 것이다. 황실의 생활비 내역은 언제나 재무부에서 관리되어 투명하게 공개되니 그보다 알아내기 쉬운 것도 없으리라. ‘만일 알렉산드로스가 그동안의 내 구매 내역을 다 보아왔다면……. 내 취향을 어떻게 파악했을지는 뻔하지.’ 나는 생각했다.

16549694662766.jpg‘내가 엄청나게 화려하고 값비싼 물건만을 좋아한다고 생각했을 거야. 나는 이혼당하기 위해 그런 것만 골라서 샀으니까.’

내 추측을 뒷받침해주는 것처럼, 그의 입에서 이런 말이 흘러나왔다.

16549694747481.jpg“그런데 요즘, 그대는 그대가 그리 선호하지 않는 물건만을 구매하는 것 같더군. 정확히 말하자면, 그대가 황궁으로 돌아온 직후부터. 그래서 나는 그대가 지난번의 사건 이후로 여론을 걱정하느라 취향을 포기하기 시작했다고 판단한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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