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 침대에서의 그의 모습2021.12.16.
그런 그의 몸과 자신의 몸이 겹쳐지면…… 대체 어떤 기분이 들까. 그때 그는 자신에게 어떤 말을 하고, 어떤 태도를 보여줄까. 그녀의 모습을 본 그는 감탄할까, 미소 지을까, 이것도 저것도 아니라면 진지한 얼굴을 할까. 평소 그의 눈빛이 자신에게 머물 때 로벨리아는 그 시선이 자신을 핥고 있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지나치게 야릇하고, 녹진하며, 뜨거운 그 시선. 그녀의 모습을 단 한 순간도 놓치지 않겠다는 듯한 그의 눈빛.
‘요즘 그의 태도는 한층 더 다정했지. 과연 그는 침대에서도 그런 다정함을 보여줄까. 아니면…….’
그의 동굴과 같이 낮은 목소리는 평소에도 남성적인 매력이 가득했다. 그의 모습을 보지 않고 목소리만 듣더라도, 누구나 그가 권력을 가진 남성이라는 사실을 눈치챌 수 있을 것이었다. 그 낮지만 멀리까지 울리는 목소리, 단정한 발음, 여유롭지만 분명한 어조. 하나하나가 대륙의 주인인 그의 위치를 상기시키고 섹시한 매력을 불러일으켰다. 침대 위에서, 그 근사한 목소리가 귓가를 간지럽힌다고 생각하면 그것만으로도 견디기 어려울 것이었다.
‘그 목소리로 내게 뭐라고 말할까. 다정하게 내 이름을 불러줄까. 그리고 또…….’
로벨리아는 뱃속이 저릿저릿해져 옴을 느꼈다. 낯선 감각이었다. 간지러운 듯, 기분 좋은 듯하면서도 견디기 어려웠다. 그녀는 결국 견디지 못하고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아, 안 되겠어.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자극이 너무 강해.’
그저 그의 모습을 머릿속으로 떠올렸을 뿐인데 얼굴이 홧홧하고 목이 탔다. 그녀는 손을 뻗어 침대 옆 협탁에 놓여 있던 자리끼를 마셨다.
‘물을 마시니까 좀 낫네.’
로벨리아는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괜한 생각을 했어. 민망하기도 하고……. 역시 이런 건 당사자한테 실례잖아. 남의 잠자리 모습을 자세하게 상상하는 일 따위…….’
그런데 그때였다. 누군가가 그녀의 침실의 문을 두드렸다. 이 밤중에 침실까지 찾아올 사람은 많지 않았다. 하지만 로벨리아는 그만은 아니길 바랐다. 아까 그런 상상을 그토록 상세하게 해놓고 그의 얼굴을 마주할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로벨리아는 침실의 문을 열었다. 그리고 그 너머에서 나타난 얼굴은…….
“로벨리아.”
그의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를 듣는 것만으로도 몸에 힘이 들어갔다. 로벨리아는 침을 꼴깍 삼켰다. 그 나직한 목소리의 주인, 알렉산드로스가 분명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밤중에 갑자기 찾아와서 미안하군. 혹시 내가 깨운 것은 아니지?”
늦은 저녁이긴 했지만 아직 잠자리에 들만한 시간은 아니었다. 로벨리아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그냥 쉬고 있었어요.”
“그렇다면 다행이야. 내가 찾아온 건, 다름이 아니고 업무상의 문제 때문인데…….”
로벨리아는 그와 얼굴을 마주치기가 힘이 들었다. 그의 눈을 볼 때마다 아까 구체적으로 떠올린 상상이 떠올랐다.
‘정말, 그런 상상 따위 하지 말았어야 했는데. 내가 괜한 짓을 했어…….’
자꾸만 얼굴에 열기가 올라 손부채로 식히느라고 그녀는 자신이 알렉산드로스를 방에 들이지도 않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채지 못했다. 그녀가 다른 생각에 빠져 있는 듯하자 알렉산드로스는 참을성 있게 기다려주었다.
“혹시…… 들어가도 되겠나?”
그의 질문에 로벨리아는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와 자신이 함께 복도에 서 있다는 사실조차 눈치채지 못했던 것이다.
“아아, 물론이죠. 들어오세요.”
그들은 티테이블에 앉았다. 로벨리아가 하녀에게 차를 내오게 하려 했지만 알렉산드로스는 사양했다.
“밤이 늦었으니 그리 오래 있을 생각은 없어. 그대도 휴식을 취해야 할 게 아닌가.”
“아아…… 그렇게 생각하신다면, 그러세요.”
‘왜 이렇게 덥지?’
그렇게 생각한 로벨리아는 가운 위로 드러난 목에 연신 손부채질을 해댔다. 한편, 알렉산드로스 역시 이상함을 느끼고 있었다.
‘그녀의 태도가 평소와는 많이 다르군.’
언제 만나더라도 맺고 끊음이 분명하고, 사람을 대할 때 당당했던 그녀였다. 누구를 대할 때나 똑바로 바라보며 꿰뚫을 듯 올곧은 그 시선, 목을 꼿꼿이 든 당당한 자세를 그는 무척 매력적으로 느끼고 있었다. 한데 오늘의 그녀는 확실히 이상했다. 그와 얼굴을 잘 마주치지 못하고, 어쩐지 안절부절못하는 듯 보였다.
‘게다가 얼굴이 이상하게 붉고, 계속 손부채질을 하고 있군.’
알렉산드로스는 생각했다.
‘날씨가 더워서 그런 건가?’
초가을인데다가 오늘은 유독 더우니 그럴 수도 있다고 하기에는……. 황궁은 기온 유지 마법으로 항상 가장 쾌적한 온도를 유지하고 있었다.
‘게다가 단순히 더워서 이러는 거라고 하기에는, 저 안절부절못하는 듯한 태도가 잘 이해되지 않아.’
로벨리아가 자신의 사생활을 건드리는 것을 싫어한다는 건 알고 있지만, 역시 아무래도 걱정이 됐다.
“로벨리아, 혹시 어디가 아픈가?”
“네?”
“안색이 별로 좋지 않아 보여서.”
로벨리아가 채 반응하기도 전에, 그의 얼굴이 불쑥 가까워졌다. 그는 허리를 숙여 로벨리아에게 다가오더니, 그 커다란 손으로 그녀의 이마를 덮었다.
‘……!’
아까 그렇게 구체적으로 상상하던 그의 손길이었다. 그런 그의 손길이 이렇게 불쑥 닿아올 줄은 몰랐던지라 로벨리아는 움찔 놀랐다. 본능적으로 쳐낼 뻔했지만, 그러지 못한 것은 그의 눈빛 때문이었다. 그의 손이 닿는 순간 로벨리아는 놀라서 그의 얼굴을 들여다보고 말았고……. 너무나 가까운 곳까지 다가온 그의 얼굴. 그녀의 코끝에 닿아오는 그의 숨결. 진심으로 걱정하는 듯한, 그의 진중한 눈빛이 그녀의 몸을 저릿하게 만들어서……. 도저히 손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열이 조금 있는 것 같은데.”
그가 나직하게 말했다.
“역시 너무 무리한 게 아닌가? 내일은 쉬는 편이 좋을 것 같은데.”
로벨리아로서는 도저히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아니, 그게. 저…….”
당황한 그녀는 가쁜 숨을 삼켰다. 자신이 흥분했다는 사실을, 그것도 그와의 야릇한 밤을 상상하다가 그렇게 되었다는 사실을 들킬 수는 없었다.
‘그걸 들킬 바엔 차라리 혀 깨물고 죽는 게 낫겠어!’
그녀는 애써 시선을 피했다. 옆얼굴에 그의 시선이 와닿는 것이 느껴졌고, 그것이 그녀를 더욱 달뜨게 했지만……. 지금으로선 그 사실을 한껏 외면하는 수밖에 없었다.
“어디가…… 아프거나 한 건 아니에요. 그냥 더워서 그래요.”
“그게 정말인가?”
“네. 너무 뜨거운 물에 목욕을 했는지, 이상하게 덥네요.”
“창문을 열어줄까?”
“그래 주시면 감사하죠.”
그녀의 말에 알렉산드로스는 군말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가 창문을 열러 가자, 그제서야 로벨리아는 한숨을 돌릴 수 있었다.
‘잠깐이라도 떨어질 수 있어서 정말 다행이야.’
곧 알렉산드로스가 창문을 열었다. 가을의 선선한 바람이 창문 사이로 들어오자, 몸의 열기도 조금이나마 식어가는 듯했다.
‘좋아, 이대로 별일 없으면 곧 아무렇지도 않아질 수 있겠어.’
“그래서…… 오신 이유는 뭐죠? 업무상의 문제라고요?”
로벨리아는 자신의 손톱을 들여다보는 척 그의 시선을 피하며 말했다. 잠시 한숨 돌리긴 했지만, 여전히 그의 눈빛을 마주하는 건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다. 그런 그녀를 미심쩍게 바라보는 건지, 알렉산드로스는 몇 초의 텀을 두고 대답했다.
“그래. 다름이 아니고 올겨울에 있을 국정 행사 말인데…….”
그는 업무에 대해 로벨리아의 의견을 몇 가지 물어보았다. 그들의 의견에는 맞는 부분도 있었고, 맞지 않는 부분도 있었지만, 둘 다 무척 합리적이고 유능한 편인지라 곧 합의점을 찾아낼 수 있었다.
“이제 끝인가요?”
“그래. 늦은 시간에 의견 주어서 고마워.”
“이 정도로 뭘요.”
로벨리아는 그제서야 조금 긴장을 풀고 웃을 수 있었다. 시원한 바람을 쐬고 일에 대한 이야기를 했더니 축축한 열기로 가득 찼던 머리도 좀 맑아지는 것 같았다.
‘이만하길 다행이야. 그래도 다시는 그런 생각은 하지 말아야지. 정말 들키는 줄 알았다니까.’
이제 그를 방 밖으로 배웅해주기만 하면 그뿐이었다. 더 이상 그녀를 번뇌하게 하는 것은 없을 것이었다. 하지만, 상황은 그녀가 기대하는 대로 되지 않았다.
“로벨리아.”
눈을 마주치지 못하는 동안 잠시 침묵하고 있던 알렉산드로스의 목소리가 귓가를 간지럽혔다.
“날 보는 게 그렇게 싫은가?”
“네, 네?”
로벨리아는 깜짝 놀라 손으로 입을 가렸다.
“오늘따라 유난히 날 보려 하지 않는 것 같아서 말이야.”
“아니, 그게 아니라…….”
“마지막으로 내가 가기 전에 눈이나 한 번 마주칠 순 없겠나.”
그렇게 말하는 알렉산드로스의 목소리는 믿을 수 없이 서글프게 들렸다. 하지만 로벨리아는 바로 그의 얼굴을 볼 수 없었다. 그럴 각오가 들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고 보니 이틀 후면 끝이지. 그대의 친구와 호위기사의 연금이 풀리는 날이 말이야.”
“아…….”
“그간 그들은 별다른 문제도 일으키지 않고 모범적인 연금 생활을 해왔지. 시간이 참 빠르군.”
알렉산드로스가 엷은 한숨을 쉬었다.
“그들을 생각하면 그대가 나를 용서하기 어려운 것도……. 이해해. 아무리 의례적인 것이었다고 해도, 그대의 소중한 친구들에게 벌을 주었으니 얼마나 마음이 아팠겠나.”
‘이 사람 설마 지금…….’
로벨리아는 생각했다.
‘내가 눈을 마주치지 않는 게, 노먼과 케일럽 때문에 화가 나서라고 생각하고 있는 건가?’
그녀는 그에게 화가 나서 이러는 것이 아니었다. 그런 오해는 풀고 싶었다.
“전 당신에게 화가 난 게 아니에요. 사실 노먼과 케일럽이 풀려나는 날이 이틀 뒤라는 것도 지금 알았는걸요.”
“정말인가? 그런데 왜 그렇게 고집스럽게 내 눈을 피하는 거지?”
음……. 그에 대해서는 도저히 할 말이 없었다. 대체 어떻게 ‘당신과 밤을 보내는 상상을 했는데 그것이 너무 야릇해서’라고 솔직하게 대답하겠는가.
“로벨리아.”
나직한 목소리가 한껏 다가왔다는 사실에 로벨리아는 파드득 놀랐다.
“내게 화가 난 게 아니라면, 나를 봐.”
주저하던 그녀는 조심스레 시선을 들어올렸다. 그와 눈이 마주치는 순간. 평소보다 더 깊고, 진득하고, 그녀를 핥는 듯 뜨겁게 바라보는 그 시선과 맞닿는 순간 로벨리아는 자신의 상상 속 그의 모습을 떠올렸다. 차마 상상하고 싶지 않았던 모습. 그의 적나라하고도 노골적인 모습. 그것은 그녀가 어떻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의 지독하도록 매혹적인 모습과 아까의 상상, 아직 달뜬 몸에 남은 욕망이 합쳐져 그녀의 머릿속에 무의식적으로 그러한 상을 만들었다.
“윽……!”
그녀는 당황해 그를 밀쳤다. 하지만 알렉산드로스의 손이 더 빨랐다. 그는 자신을 밀어내는 그녀의 손을 움켜쥐었다. 맞닿는 손과 손 사이에서 저릿한 감각이 전해져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