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9. 정상적인 부부라면 아이가 없을 수 없죠 (99/151)

99. 정상적인 부부라면 아이가 없을 수 없죠2021.12.12.

하나 로벨리아는 하녀의 말에 화를 내지 않았다. 그러기는커녕, 무심한 얼굴로 이렇게 말했다.

16549692501314.jpg“그래, 다른 사람들은 그에게 관심을 가질 수도 있지. 하지만 난 아니야.”

16549692501314.jpg‘그의 곁에 있기로 결심하긴 했지만, 그것이 꼭 그를 사랑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지.’

로벨리아는 생각했다.

16549692501314.jpg‘아무리 그래도 나는 그가 싫다는 이유로 그에게서 도망쳤던 몸이야. 그런 내가 무슨 염치로 그를 사랑하겠어?’

그녀는 한숨을 쉬며 욕조에 등을 기댔다. 하녀들은 당황하며 그런 그녀의 눈치를 살폈다.

16549692501314.jpg‘다행이다. 아직 그를 사랑하는 것 까진 아니어서. 호감 정도에서 내 마음을 자각하고 멈출 수 있어서. 만일 그를 사랑하고 있었으면 힘들었을 텐데.’

로벨리아는 그 정도로 자신의 생각을 정리하곤, 눈을 감았다. 노곤노곤한 피로가 따스한 물에 녹아 흩어졌다.

16549692501336.jpg

  *** 분명 그걸로 끝난 일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날 밤, 잠에 들기 위해 침대에 누운 로벨리아는 목욕할 때의 일이 자꾸만 떠올랐다.  

1654969250134.jpg‘아름다운 미모, 듬직한 체격, 자상함, 능력, 부와 권력……. 그분께서는 여인들이 꿈꿀 만한 것들을 전부 가지고 계신걸요. 그분을 아는 모든 여성들은 그분을 매력적이라고 느낄 거예요.’

  그렇게 말하던 하녀의 목소리는 열기를 띄고 있었고, 표정은 꿈을 꾸듯 황홀해보였다. 그녀가 알렉산드로스에게 매력을 느끼고 있다는 사실을 누구라도 알 수 있을 정도였다.

16549692501314.jpg‘알렉산드로스가 객관적으로 아주 매력적인 남자인건 사실이지. 나도 그 매력을 느낄 수 있을 정도였으니 말이야.’

로벨리아는 눈을 감은 채 생각했다.

16549692501314.jpg‘그러니 누가 그에게 매력을 느끼든 난 신경 안 써. 부부라고는 해도 합방도 하지 않는 껍데기만 부부인 관계고, 나는 그를 사랑하지 않기로 결심했는걸. 애초에 그에게는 황비도 있다고.’

그렇지만……. 그런 생각이 난 시점에서 이미 신경 쓰고 있다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자꾸만 하녀의 열정적인 목소리와 상기된 얼굴이 떠올랐다. ‘모든 여성들이 그를 매력적이라고 느낄 것이다’라는 말도. 뱃속이 뒤틀렸다.

16549692501314.jpg‘왜 짜증이 나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자신은 분명 그를 사랑하는 것은 아닐 터인데 이런 걸로 기분이 나빠지다니.

16549692501314.jpg‘내가 원래 이렇게 속이 좁았나? 아니면, 이게 바로 내가 갖긴 싫지만 남 주기는 아까운 심리인가?’

어쩐지 자신에게 실망스러웠다. 자신이 이렇게까지 속이 좁은 인간인 줄 로벨리아는 이제껏 생각도 하지 못했으니까.

16549692501314.jpg‘됐어, 신경 쓰지 말자. 잠이나 자자, 잠이나.’

결국 그렇게 생각한 로벨리아는 이불을 뒤집어쓰고 잠을 청했지만, 그녀는 밤이 깊을 때까지 잠들지 못했다. *** 로벨리아는 사교활동을 그리 즐기지 않았다. 그렇기에 처음에는 오직 의무감으로 그것을 해냈지만, 몇 번 하다 보니 이것도 요령이 생기고 나름의 즐거움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16549692501314.jpg‘용기가 생겼으니, 사교활동의 범위를 좀 더 넓혀볼까.’

그렇게 생각한 로벨리아는 그렇게 친하지 않은 귀부인의 초대에 응하여 찾아가게 되었다. 티파티는 여러 개의 테이블로 나뉘어 있었고, 좌석이 지정되어 있었다. 가장 높은 사람인 로벨리아는 물론 파티 주최자의 대접을 받기 위해 주최자와 같은 테이블로 배정되어 있었으며, 같은 테이블의 다른 사람들도 어느 정도 안면이 있고 믿음직한 이들이었다. 하나 문제는 다른 테이블에서 일어났다.

1654969250134.jpg“아이가 너무 갖고 싶은데, 영 생기지 않아서 걱정이에요.”

1654969250134.jpg“괜찮아요. 아이 없이 둘이서만 잘 지내는 부부도 있는걸요. 황후 폐하만 봐도 그렇잖아요.”

다른 테이블에서 나누는 대화까지 들릴 일은 보통 없지만, 로벨리아가 앉은 테이블의 대화가 끊긴 아주 잠깐의 순간, 어떤 귀부인들의 대화가 그녀의 귀에 닿았다. 하지만 로벨리아는 그냥 못 들은 척 지나가기로 했다. 떨어진 테이블에서 나누는 이야기이기도 하고, 비난조도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하나 문제는 그 뒤에 일어났다.

1654969250134.jpg“하지만 정상적인 부부생활을 하면서 아이가 안 생긴다는 것이 말이 안 되잖아요. 몇 년 동안이나 부부 사이에 아이가 없는데 그걸 잘 지낸다고 볼 수 있겠어요?”

한껏 목소리를 죽인 듯했으나, 행운인지 불행인지 그 이야기는 로벨리아의 귓가에까지 닿고 말았다.

1654969250134.jpg“아니면 둘 중 하나가 건강하지 못한 거겠죠.”

다른 귀부인이 킥킥거리며 동조했다.

16549692501314.jpg‘내가 같은 자리에 있다는 걸 알면서도 굳이 저런 대화를 지금 나누는 이유가 뭘까.’

당연히 자신이 듣지 못하리라고 생각하고 저런 말을 하는 것이겠지만……. 로벨리아로서는 그 심리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16549692501314.jpg‘꼭 있다니까. 남의 뒷이야기를 주워섬기며 스릴을 느끼는 부류의 인간들이.’

로벨리아가 험담을 듣고 가만히 있자 같은 테이블의 귀부인들이 모두 그녀의 눈치를 살폈다.

1654969250134.jpg“화, 황후 폐하…….”

특히나 주최자는 얼굴이 파랗게 질릴 정도였다. 그녀는 안절부절못하며 로벨리아의 안색을 살폈다.

1654969250134.jpg“정말 죄송합니다. 제, 제가 가서 엄히 주의를…….”

16549692501314.jpg“아니, 여기 앉아 있어요.”

로벨리아는 단호하게 그녀의 말을 끊었다. 자신과 같은 테이블에 앉은 귀부인들이 모두 들었고, 주최자가 책임감을 느끼기까지 하는 상황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자신이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다. 로벨리아는 더 고민하지 않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의자 다리가 돌바닥과 부딪쳐 드르륵 끌리는 소리와 함께 수많은 이목이 그녀에게 집중되었다. 로벨리아는 그대로 뒤를 돌아 예의 그 테이블로 향했다. 그녀가 다가갈수록, 그 테이블의 귀부인들의 얼굴에서 핏기가 사라져갔다.

16549692501314.jpg“방금 그 이야기에 대해 흥미가 좀 있는데 말이지.”

로벨리아는 짙은 루주를 바른 입꼬리를 비틀어 끌어올렸다.

16549692501314.jpg“방금 그 이야기는, 나와 황제 폐하에 대한 이야기인가?”

설마 당사자가 자기들의 이야기를 들을 줄은 몰랐는지, 귀부인들의 안색이 파랗게 질렸다.

1654969250134.jpg“네? 무,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습니다. 저희는 황후 폐하와 황제 폐하에 대한 이야기를 한 것이 아닙니다.”

1654969250134.jpg“마, 맞습니다. 아마 잘못 들으신 것 같습니다.”

16549692501314.jpg‘그래, 이렇게 나올 줄 알았지.’

로벨리아는 그녀들을 한심하다는 듯한 눈초리로 훑어보았다.

16549692501314.jpg‘바로 반성할 사람들이면 같은 자리에 있는 사람의 험담을 하며 즐거워하진 않겠지.’

16549692501314.jpg“그래? 그거 정말 이상한 일이로군. 나는 분명 내 두 귀로 똑똑히 들었는데 말이야. ‘황후 폐하’라는 단어를 말이지.”

로벨리아의 발음이 분명하게 떨어지는 목소리가 고요한 응접실을 울렸다.

1654969250134.jpg“그, 그건……!”

1654969250134.jpg“황후 폐하, 오해입니다!”

16549692501314.jpg“더군다나 파티의 주최자 역시 그대들의 대화를 똑똑히 들었는걸. 안 그래?”

로벨리아는 피식 웃으며 자신의 테이블에 앉아 있던 주최자를 향해 눈짓했다.

16549692501314.jpg“그러니 더 이상 불명예스러운 발뺌은 그만두는 게 좋을 거야. 그대들을 가르친 이들의 명성에 이 이상 흠집을 내고 싶지 않다면 말이야.”

1654969250134.jpg“세상에!”

귀족적으로 에둘러 말하긴 했으나 그녀가 한 말은 ‘너희의 언행을 보니 가정교육의 수준이 의심된다’와 비슷한 수준의 모욕이었다. 일반적인 귀족 여성이라면, 더더욱이 이런 공개적인 장소에서는 입에 담지 않을 말이리라. 로벨리아의 모욕을 참을 수 없었는지 발뺌하던 귀부인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해졌다.

1654969250134.jpg“황후 폐하! 폐하께서도 잘 아시겠지만, 아이의 생산은 귀족 여성의 의무이며 웃어른이라면 아랫사람들에게 본보기를 보여야 합니다. 그런데 제국의 어머니이신 황후 폐하께서 그 모범을 보이지 않으시니 저희들이 어찌 공경하고 따르겠습니까?”

귀부인의 말에 티파티의 참가자들 모두가 기함을 했다. 로벨리아의 모욕에 아무리 화가 났다곤 해도 애초 험담을 한 것이 잘못이 아닌가. 그런 상황에서 저렇게 당당히 대들다니! 그것도 온갖 ‘특출난’ 언행으로 악명이 높은 로벨리아에게 말이다. 앙칼지게 소리치는 귀부인을 마주 본 채 로벨리아는 픽 웃었다. 모두의 시선과 관심이 쏟아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이를 어째’ 하고 걱정하면서도, 내심 로벨리아가 어떻게 대응할지에 대한 호기심이 가득한 위선적인 시선들. 만일 여기서 로벨리아가 제대로 본때를 보여주지 못한다면 그들의 입방아에 오르는 것은 상대가 아니라 로벨리아, 자신이 되리라.

16549692501314.jpg‘물론, 여기서 물러날 생각 따윈 없지만.’

그렇게 생각한 로벨리아는……. 손을 들어 상대의 뺨을 때렸다. 짜악! 살과 살이 부딪치는 날카로운 소리가 귀청을 때렸다. 상대가 채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로벨리아는 다시 한번 손을 들었다. 짜악! 맞은 곳을 한 대 더 맞은 귀부인은 새빨개진 뺨을 감싸고 멍하니 허공을 보았다. 설마 이렇게 공개적인 장소에서 맞을 줄은 몰랐는지 상대의 얼굴은 얼떨떨하기 그지없었다.

16549692501314.jpg“그 입 하나 믿고 함부로 놀리는 꼴이 우습구나. 어디 한 번 세 치 혀를 더 놀려 보아라. 아까도 그랬던 것처럼.”

1654969250134.jpg“…….”

16549692501314.jpg“왜 아까처럼 못 하지? 그리도 촉새처럼 떠들어대더니. 이제야 자신의 주제가 좀 실감이 나나?”

그렇게 말한 로벨리아는 상대에게 다가갔다. 상대는 성큼 다가가는 그녀에게서 도망치려 하는 것 같았으나, 너무 당황한 나머지 제대로 걷지 못해 비틀거렸다. 로벨리아는 그녀의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16549692501314.jpg“한 번만 더 걸리면 그 때를 가리지 못하는 입을 꿰매버릴 거야.”

1654969250134.jpg“그…… 그런!”

16549692501314.jpg“지금 내가 하는 말이 농담 같나? 농담인지 아닌지 잘 생각해봐.”

16549692611987.jpg

  귀부인의 얼굴에서 핏기가 완전히 사라졌다. 불쌍할 정도로 창백해진 그녀는 벌벌 떨더니, 눈물을 쏟아내며 그 자리에서 뛰쳐나갔다. *** 뺨도 때렸겠다, 하고 싶은 말도 다 했겠다, 속이 다 시원했지만 걸리는 것이 하나 있었다.

16549692501314.jpg‘어쨌든 난 이제 황후로서 살기로 했고, 황후로서의 책임도 다하기로 했지. 그럼 역시 황손 역시 낳아야 하는 걸까?’

책임감이 강한 로벨리아로서는 이걸 고민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역시 서류 업무를 하고 사교활동에 참가하는 일과 아이를 낳는 일은 완전히 다른 일이었다. 서류 업무를 하는 것에 비해 아이를 낳는 일은 섣불리 엄두가 나지 않았다.

16549692501314.jpg‘그리고 아이를 낳으려면……. 역시 알렉산드로스와 그 일도 해야겠지.’

로벨리아는 침대 머리맡에 몸을 기댄 채 알렉산드로스와 함께하는 ‘그 일’에 대해 머릿속으로 그려 보았다. 옷 아래로 느껴지는 그의 단단한 몸의 감촉이 아직도 손끝에 생생했다.

16549692501314.jpg‘그의 몸…… 정말 말도 안 되게 단단했지. 마치 단단한 돌이나 나무 같아서, 내 몸과는 차원이 달랐어.’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