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8. 로벨리아의 약속2021.12.09.
하지만 알렉산드로스의 고백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그날 이후로 걱정하는 것을 주체하기가 어렵더군. 행여 그대가 지나친 업무로 병에라도 걸리면 어쩌나, 아니면 업무에 지쳐서 황궁 생활에 정이 떨어져 버리면 어쩌나, 그래서 가까스로 되찾은 그대를 이번에야말로 정말로 떠나보내면 어떻게 하나, 하고. 나도 지나친 생각이라는 것도, 이성적이지 않다는 것도 알지만 절제하기가 어려워. 그대를 향한 내 마음을 절제할 수 없듯이.”
자존심 강한 사람이 자신의 약한 모습을 드러내는 일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나 역시 알고 있었다. 그야 나도 자존심이 꽤 강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내 약한 모습이나, 상처나, 힘듦을 남들에게 잘 드러내지 못했다. 그것은 굉장한 믿음과 결심이 필요한 일이었다. 그래서인지 더 그가 드러낸 약한 모습에 공감이 갔다. 조금 정도는 도움이 되고 싶었다. 테이블 위에 놓여 있는 그의 커다란 손을 잡아주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 그렇게 하면 그와 내 마음이 이어질 것만 같았다. 이 약함이 그와 나를 잇고 있듯이.
‘아무리 그래도 갑자기 손을 잡는 건 이상해 보이지 않을까?’
그런 마음이 내게 제동을 걸었지만…….
‘에이, 뭐 어때. 이상해 보일 거 걱정하기에는 한참 늦었지.’
결국 나는 손을 뻗어 그의 손을 잡았다. 덥석! 내 손이 그의 손을 덮자 그는 정말로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 그 눈이 이렇게 크게 벌어지는 건 표정을 가장하는 데 능숙한 그에게 아주 드문 일이었다.
“당신이 그런 생각까지 하고 있는 줄 몰랐어요. 그리고 그렇게 불안해하는 것도 이해해요. 그런 큰일을 겪었으니, 저라도 그랬을지도 몰라요.”
로벨리아는 솔직하게 말했다.
“당신의 의도를 오해해서 미안해요. 그냥 저를 많이 걱정했던 것뿐이었군요.”
“로벨리아…….”
“하지만 정말 걱정하지 않아도 괜찮아요. 저는 정말로 즐거워서 한 일이니, 이것 때문에 아프거나 황궁 생활이 싫어질 일은 없을 거예요. 하지만 그렇게 걱정하는 마음도 이해가 되니, 앞으로는 조금 조절해서 일하도록 할게요. 주 5회, 평일에만 하루 6시간씩 일하는 건 어때요? 이쯤 되면 당신도 불안하지 않을까요?”
내 말에 알렉산드로스는 정말 믿을 수 없다는 듯한 반응을 했다. 잠시 아무런 말도 하지 않더니, 내가 잡은 손을 두 손으로 꽉 잡았다.
“물론이지, 로벨리아. 그대가 이렇게까지 깊이 이해해줄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어.”
“별말씀을요. 이 정도 가지고.”
“아니야. 그대는 내가 지금 그대에게 얼마나 고마워하고 있는지 상상도 못 할 거야. 그대의 배려에 진심으로 고마워.”
그렇게 말하는 그의 목소리와 얼굴에는 짙은 감격이 어려 있어서, 내가 그간 그에게 얼마나 호의를 보이지 않았는지 새삼 실감이 갔다. 그 사실을 깨닫자 나로서도 그에게 약간 미안해졌다.
‘그가 불안을 느끼게 된 데에는 도망치려 했던 내 책임도 약간은 있는데, 이 정도 가지고 이렇게 기뻐하다니. 내가 그간 그를 얼마나 홀대했으면.’
돌이켜보면 나는 정말 그에게 잘해주지 않았다. 그가 다가올 때마다 다 의도가 있는 행동이라고 생각하고 철벽만 쳤으니까. 그때는 원작을 읽었기에 이혼이 최선이라고 생각했고, 그의 마음을 믿을 수 없어서 그런 일을 했지만, 내가 죽었다고 생각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마음이 변치 않았다는 사실을 확인한 지금은 그에게 미안하고, 또 그가 안쓰럽게 느껴졌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한 지붕 아래에서 같이 살 사람이라면 마음을 여는 것이 좋겠지. 난 그의 진심의 조각을 보았으니까.’
그렇게 생각한 나는 미소 지으며 그의 손을 꽈악 쥐었다. 내 손을 감싸 쥐는 그의 손가락은 펜과 검으로 인한 굳은살이 박여 있었지만, 그 느낌도 어쩐지 싫지 않았다.
“로벨리아. 만일 괜찮다면…….”
알렉산드로스가 입을 열었다.
“거기에 더해서, 앞으로도 주말에는 나와 함께 시간을 보내주었으면 좋겠군.”
“네? 하지만…….”
“그래, 이젠 그대를 일에서 떼어놓으려는 생각은 없어. 나도 처음에는 그런 불순한 의도로 그대와 함께 이런저런 일들을 했지만, 뜻밖에도 그대와 시간을 보내는 건 그 자체로도 가치 있는 일이더군.”
알렉산드로스가 잘생긴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말했다. 그의 다정한 눈빛이 내 손등 위를 스치고는 얼굴로 향했다.
“그러니 그대가 내게 기회를 줬으면 해. 불순한 의도 없이, 순수한 의도로 그대와 함께 시간을 보낼 기회 말이야.”
그의 금빛 눈빛은 마치 내 손을 어루만지는 듯했다. 내 손을 끌어당겨 입 맞추고 싶기라도 한 것처럼, 하지만 그런 욕망을 꾹 억눌러 참아내는 듯 그는 진득한 눈으로 내 손을 보았다.
“부탁하지. 그럴 수 있겠나?”
속삭이는 듯한 목소리와 함께 내 시야에 와닿는 그의 금빛 눈동자. 애써 참아내는 듯 보이지만, 진득한 욕망이 묻어나는 그 눈빛……. 나는 그 눈빛을 앞에 두고 차마 거절의 말을 입에 담을 수 없었다.
“……그러죠, 뭐. 앞으로도 계속 흥미로운 할 거리를 찾아와 주신다면요.”
그래, 솔직히 그와 시간을 보내는 건…… 나도 꽤나 즐거운 일이었다. 이제껏 대부분의 여가를 시간 낭비라고 생각한 나였는데, 최근 해본 적도 없고, 할 생각조차 하지 않은 활동들을 하는 게 의미 있는 시간처럼 느껴졌다. 어쩌면 그것은 그의 힘 때문일지도 몰랐다. 나를 기쁘게 하기 위해 노력을 아끼지 않는 그의 힘. 내 대답의 그의 눈꼬리가 기쁜 듯이 휘었다.
“그대를 기쁘게 하기 위해서는 얼마든지.”
그는 내 손을 제 손으로 감싼 채, 자기 손등 위에 입술을 포갰다. 그러면서도 그 눈빛은 뜨겁고 올곧게 나를 향한 채였다. 내 손 위에 직접 입 맞추지 않은 건 내가 부담감을 느끼지 않도록 배려해준 것일 것이다. 하지만, 그의 손을 사이에 둔 채 입 맞추는 그 모습은 당혹스러울 정도로 야릇해서…… 차라리 내 손 위에 직접 입을 맞추는 것이 더 낫지 않을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무서울 정도로 매혹적인 남자야.’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런 남자와 매주 주말마다 시간을 보낸다면…… 내가 내 마음을 빼앗기지 않을 수 있을까?’
분명 이혼은 포기했지만, 그렇지만……. 한때 싫어했고, 결코 좋아하게 될 일이 없을 거라고 생각한 상대를 매혹적이라고 느끼는 나 자신이 굉장히 낯설었다. 게다가, 너무 염치없이 느껴지기도 했다. 그가 싫다고 황궁에서 도망쳐 큰 파장을 불러온 지 대체 얼마나 됐다고, 이렇게 마음이 흔들린단 말인가?
‘도망쳐서 그에게 그 고생을 시킨 내가 갑자기 그에게 두근거린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그는 어떤 표정을 지을까? 환멸을 느끼지는 않을까?’
내가 이렇게 줏대가 없는 여자였나 싶고, 나 자신이 실망스럽기까지 했다.
‘아, 이젠 나도 모르겠다. 될 대로 되라지.’
결국 나는 고개를 살짝 흔들어 잡념을 날려버리고, 그를 향해 미소 지었다.
“기대되네요. 당신이 준비할 다음 데이트 코스.”
이것은…… 조금 진심이었다. 좋아하고 두근거리고의 문제를 떠나서, 그와의 외출이 즐겁지 않았던 적은 한 번도 없었으니까. *** 그렇게 알렉산드로스와 일과 관련해 합의를 보았지만, 여전히 머리가 복잡했다.
‘내가 정말 그를 좋아해도 되는 걸까? 그가 싫다고 황궁을 도망치기까지 한 내가?’
게다가 그에게 느끼는 이 두근거림이 일시적인 것인지, 정말 오래 갈만한 것인지도 알 수 없었다. 아무래도 나는 연애를 해본 적이 한 번도 없었으니까.
‘아휴, 모르겠다. 잠시 기분 전환을 하자.’
그렇게 생각한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머리가 복잡할 때는 역시 목욕이지.’
나는 욕실로 향했다. 그곳에서는 하녀들이 욕조에 뜨거운 물을 붓고, 입욕제를 넣고 꽃잎을 띄우는 등 만반의 준비를 한 상태였다.
“어서 오세요, 황후 폐하!”
“지금 물 온도가 딱 좋아요. 어서 몸을 담그세요. 어깨를 주물러 드릴게요.”
처음 이곳에 왔을 때는 목욕 시중을 받는 일이 창피했다. 7살 이후로는 남에게 알몸을 드러낸 일이 없었으니까. 하지만 이곳에 온 지 일 년이 지나자 목욕 시중을 받는 것도 어느덧 익숙해졌다. 나는 목욕가운을 벗어 하녀에게 건네고 발끝부터 조심스레 물에 담갔다. 처음엔 발, 다리. 그리고 상체까지 천천히 물에 밀어 넣고 나니, 삽시간에 기분 좋은 온기가 퍼져나가고 온몸이 부르르 떨렸다.
“황후 폐하, 물 온도는 적당하신가요?”
“제가 목과 어깨를 주물러드릴게요.”
“저는 팔이요.”
따뜻하고 향기로운 물에 몸을 담그고 하녀들의 야무진 손으로 마사지를 받고 있자니 피로가 절로 눈 녹듯 풀렸다.
‘아, 천국이야, 천국. 이러다 물에 녹아버릴 것 같아.’
그러는 동안에도 하녀들은 내가 기뻐할 만한 말들을 늘어놓았다.
“피부가 어쩜 이리 고우세요. 하얗고 보드랍고, 그야말로 깐 달걀 같아요.”
“머릿결은 또 어떻고요. 정말 부러워요. 제 머릿결이 황후 폐하의 반만이라도 닮았으면 좋겠어요.”
물론 내가 고용주이니만큼 어느 정도는 서비스 멘트겠지만……. 그 사실을 알면서도 기분이 조금 좋은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정말이에요. 황제 폐하께서 황후 폐하께 왜 그리 푹 빠지셨는지 알 것 같아요.”
“황제 폐하의 황후 폐하 사랑은 정말 유명하죠. 너무 낭만적이에요.”
‘알렉산드로스 생각 때문에 심란해서 머리를 비우려고 목욕을 하는 건데 그의 이야기를 들을 줄이야.’
그건 그리 달갑지 않은 화제였다. 그래서 난 화제를 돌리기 위해 말했다.
“너희들이 아는 이야기는 어느 정도 과장이 포함되어 있단다. 너희도 알잖니, 기자들이 기사를 쓸 때 얼마나 상상력을 동원하는지.”
“아이, 아무리 그래도 황제 폐하께서 황후 폐하를 가장 아끼시는 것은 거짓 없는 사실일 거예요. 그분의 눈빛만 봐도 알 수 있어요. 얼마나 달콤한 눈빛으로 황후 폐하를 보시던지 꿀 받을 양동이를 가지러 갈 뻔했어요.”
“게다가 어딜 가셔도 황후 폐하와 함께하시잖아요. 단 한 순간도 떨어지기 싫으신 거죠.”
‘화제를 돌리려 한 것이 오히려 역효과를 낸 것 같은데.’
“곤란한 이야기로구나. 나는 그분을 그렇게까지 연모하지 않아.”
“네? 정말이요?”
“그렇게 아름다운 분을요? 저는 살면서 그분만큼 위엄 있고 매력적인 분을 본 적이 없는걸요.”
한 하녀가 갑작스레 열기를 띠었다.
“아름다운 미모, 듬직한 체격, 자상함, 능력, 부와 권력……. 그분께서는 여인들이 꿈꿀 만한 것들을 전부 가지고 계신걸요. 그분을 아는 모든 여성들은 그분을 매력적이라고 느낄 거예요.”
“야, 야…….”
그녀의 말이 지나치다고 생각했는지 동료 하녀들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그녀들은 팔꿈치로 열변을 토하는 하녀의 옆구리를 찔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