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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7. 알렉산드로스의 고백 (97/151)

97. 알렉산드로스의 고백2021.12.05.

클레먼스 자작부인의 말을 이해하는 데에는 약간의 시간이 필요했다. 그만큼이나 믿기 어려운 것이기 때문이었다.

16549692099345.jpg‘알렉산드로스가 전시회를 직접 제안했다고? 하지만 그 사람은 분명 전시회가 우연히 지금 수도에 온 것처럼 말했는데!’

그래, 분명했다. 알렉산드로스가 내게 전시회에 함께 가자고 했을 때 나를 설득하기 위해 했던 말이 그것이었으니까. ‘순회’ 전시회라고. 그것은 지금이 아니면 볼 수 없는 전시라는 것이었다.

16549692099345.jpg‘하지만 그가 직접 요청해서 수도에 온 것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지잖아!’

그럼 그는 오직 그녀와 전시회 구경을 하기 위해 이 대규모의 전시회를 불러들였단 말인가? 심지어 자신도 우연히 알게 된 것처럼, 지금 아니면 볼 수 없을 것처럼 거짓말까지 해가면서!

16549692099357.jpg“황후 폐하? 걱정이라도 있으신가요?”

큰 충격에 내가 잠시 말문을 잃자 클레먼스 자작부인이 걱정스럽게 말을 걸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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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행스럽게도 표정을 숨기는 것은 나에게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나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미소 지었다.

16549692099345.jpg“그랬군요. 수도까지 와서 행사를 준비하느라 고생이 많았어요.”

16549692099357.jpg“감사합니다. 제 조국에서 행사를 열 수 있어서 저도 기뻤답니다.”

너무 늦지 않은 모양이었는지, 클레먼스 자작부인은 내가 충격을 받았다는 사실을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았다. 티파티가 끝나고 나는 황궁으로 돌아왔다.

16549692099345.jpg‘대체 알렉산드로스는 무엇을 위해서 이렇게까지 하는 거지?’

그런 대규모의 전시회를 불러들이고, 장소까지 제공해주려면 적지 않은 비용이 필요하리라. 겨우 나와 한 번의 전시회 데이트를 하기 위해서 그랬다기엔 지나친 행동이었다.

16549692099345.jpg‘단순히 자신이 좋아하는 활동을 나와 하고 싶었다고 하기에는 너무 지나쳐. 뭔가 다른 이유가 있는 것 같은데.’

그렇게 생각한 나는 중앙궁으로 찾아갔다. 알렉산드로스에게 이 일에 대해 묻기 위해서였다. 중앙궁의 복도를 걷던 나는 알렉산드로스의 집무실에서 나오는 시종 세 명을 보았다. 그들은 하나같이 두꺼운 서류더미를 끌어안고 있었다.

16549692099357.jpg“오늘도 일찍 퇴근하긴 글렀구나. 일거리가 산더미야.”

나는 나도 모르게 평소라면 절대 하지 않을 일을 했다. 시종들에게 나와 내 시녀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도록 코너 뒤에 숨은 것이다.

16549692099357.jpg“그러게나 말이야. 다른 건 알겠는데, 젊은 여성이 좋아할 만한 요즘 유행하는 여가 활동에 대해 조사해 오라는 지시는 왜 하신 건지 모르겠어.”

16549692099357.jpg“분명 황후 폐하를 위한 것이겠지. 요즘 두 분이 외출하시는 일이 잦아졌다는 소문이 자자하던데.”

16549692099357.jpg“저번에 얼핏 봤는데 여가 활동에 대한 황제 폐하의 조사 자료가 400페이지가 넘어가더군.”

16549692099357.jpg“황후 폐하께서는 황제 폐하의 이런 노력을 아실까 몰라.”

시종들은 그런 대화를 주고받으며 복도 저편으로 사라졌다. 그들이 사라진 뒤에도 난 잠시 움직일 수 없었다. 그들의 대화 내용이 그만큼이나 큰 충격이었던 것이다.

16549692099345.jpg‘난 이제껏 알렉산드로스가 여가 활동에 대해 잘 알고 있는 게 그냥 로판 남주인공이라서 그런 건 줄 알았는데, 사실 뒷조사를 이렇게 열심히 하고 있었던 것이란 말야?!’

역시, 그저 나와 즐거운 시간을 보내기 위해 이런 일까지 했다기에는……. 과해도 너무 과했다.

16549692099345.jpg‘무언가 다른 이유가 있는 것이 틀림없어!’

그렇게 생각한 나는 알렉산드로스의 집무실 문으로 다가섰다.

16549692099345.jpg“저예요.”

그렇게 말하며 노크를 하자, 놀랍게도 내가 문고리에 손을 대기도 전에 문이 열렸다. 이 몸 역시 키가 꽤 큰 편에 속했지만, 그런 나조차 목을 뒤로 젖혀야 할 정도로 키가 크고 기골이 장대한 남자의 모습이 드러났다. 알렉산드로스였다.

16549692129045.jpg“로벨리아.”

내 모습을 본 그는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웃었다.

16549692129045.jpg“이렇게 직접 찾아와주다니 이게 얼마 만인지 모르겠군.”

이를 드러내는 그 웃음은 어찌나 기뻐 보였는지, 그를 꽤 소년 같아 보이게 했다.

16549692099345.jpg‘하긴 그럴 만도 하지. 그동안 언제나 그가 나를 찾아왔고, 나는 그를 쫓아내느라 바빴으니까. 내가 그를 찾아오는 건 정말 오랜만이로구나.’

하지만 이번에도 그를 보고 싶어서 찾아온 것은 아니라는 것이 유감이라고 해야 할지. 그런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알렉산드로스는 나를 집무실의 안쪽으로 이끌었다.

16549692129045.jpg“앉아서 이야기하지. 차는 엠살롱? 아니면 린튼?”

16549692099345.jpg“음, 린튼이요.”

팔로 내 등을 감싸서 방의 안쪽으로 끌어당기는 그 몸짓은 무척 매끄럽고 자연스러워서 나조차 그 의도를 눈치채지 못할 뻔했다.

16549692099345.jpg‘차를 마시는 것을 기정사실로 해서 물어보는 것도 그렇고, 행여 내가 마음을 바꿔 돌아가기라도 할까 걱정하는 것 같네.’

그는 집무실 책상이 아닌, 소파와 테이블 좌석으로 나를 안내했다. 그의 지시 몇 마디에 곧 궁인들이 화려하게 치장된 다과를 가져와 테이블 위에 세팅했다.

16549692129045.jpg“들지. 여기까지 오느라 목이 마를 텐데.”

목이 마른 것은 사실이었기에 나는 찻잔을 들어 한 모금 마셨다. 하지만 나는 이곳까지 온 목적을 잊지 않고 있었다. 상대에게 넌지시 시선을 주니, 그는 찻잔에는 손도 대지 않고 나를 빤히 보고 있었다.

16549692099345.jpg“폐하께선 안 드시나요?”

16549692129045.jpg“배가 불러서.”

16549692099345.jpg“점심시간은 한참 지났는데요?”

16549692129045.jpg“나는 그대가 먹는 모습만 봐도 배가 부르거든.”

나는 기가 막혀서 헛웃음을 지었다. 하지만 알렉산드로스는 두 손을 깍지 끼고 더욱 짙은 시선을 던질 뿐이었다. 그 시선이 점점 더 얼굴을 뜨겁게 만드는 듯해 나는 서둘러 입을 열었다.

16549692099345.jpg“다름이 아니고, 오늘 귀부인들의 티파티에 다녀왔어요.”

16549692129045.jpg“즐거운 시간이었으면 기쁘겠군.”

16549692099345.jpg“그럼요. 다들 좋은 사람이었기에 아주 즐거운 시간을 보냈지요. 그보다 중요한 것은, 제가 거기서 누굴 만났는지 아시겠어요?”

16549692129045.jpg“글쎄, 모르겠는데.”

16549692099345.jpg“클레먼스 자작부인이랍니다, 폐하.”

내 입술에서 그 이름이 튀어나오는 순간, 나는 놓치지 않았다. 순간 알렉산드로스의 눈에 스쳐 지나가는 당혹의 기색을. 알렉산드로스 같은 능수능란한 사람이 이 정도의 감정도 숨기지 못할 리가 없었다. 그의 당혹이 드러난 것은 정말 찰나의 순간이었으나 나는 그것을 알아차렸다. 어쩌면 그간 그의 곁에 꽤 오래 있어서, 그에게 조금 익숙해진 것일지도 모른다. 나는 기세를 몰아가기로 했다.

16549692099345.jpg“폐하처럼 현명한 분이시라면 그 이름을 아실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데요.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폐하.”

올가미를 조이듯 우리 사이에 작은 긴장감이 당겨져 왔다. 나는 사실 알렉산드로스가 발뺌을 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랬기에 황후의 권한으로 전시회 장소의 소유주가 알렉산드로스라는 사실을 증명하는 서류까지 떼어온 상태였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그는 거짓말을 하는 데 능숙한 자였고, 실제로 그런 모습을 내게 보여준 적이 많았다. 그래서 나는 그가 이번에도 그렇게 나올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하지만 내 예상은 틀렸다.

16549692129045.jpg“물론 알지.”

16549692099345.jpg“기억이 잘 안 나신다면 제가 그 기억을 되찾아드릴……. 네?”

놀란 것은 오히려 이쪽이었다.

16549692129045.jpg“그녀는 아틀란타 특별 전시회의 담당자야. 내가 그녀에게 편지를 써서 전시회를 수도에서 열 것을 요청했지.”

알렉산드로스는 담담하고 나직하게 말했다.

16549692129045.jpg“클레먼스 자작부인을 만나 그 이야기를 처음 들었다면 많이 놀랐겠군. 미안해, 로벨리아.”

16549692099345.jpg‘이 사람 왜 이러지? 뭘 잘못 먹었나?’

나는 너무 놀라서 그런 생각마저 했다. 하지만 여기서 멈출 수는 없었다.

16549692099345.jpg‘알렉산드로스가 내가 좋아할 만한 전시회를 일부러 수도로 끌어들이고, 400페이지의 자료까지 작성해가며 내가 좋아할 만한 각종 활동들을 조사하고……. 그랬던 이유를 나는 알 것 같아.’

우연이라고 하기에는 타이밍이 절묘하게 겹쳤다. 그가 내게 ‘그 말’을 했던 때와, 그가 날 이곳저곳에 데리고 다니기 시작한 때가. 나는 한숨을 쉬곤 찻잔을 달각 소리가 나도록 내려놓았다.

16549692099345.jpg“솔직하게 말씀해주시니 대화가 빠르겠군요. 제가 놀란 일은 그뿐이 아니었어요. 오는 길에 들었는데, 폐하께서 제가 좋아할 만한 활동을 조사하고 계신다고 하더군요.”

16549692129045.jpg“…….”

16549692099345.jpg“그 모든 일들을 하신 이유는…… 저를 일에서 멀어지게 하시려는 속셈이죠?”

나는 분명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는 내가 일을 하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오죽 싫어했으면, 이제껏 했던 것처럼 전부 남에게 맡기라느니, 정 일을 하려거든 하루에 세 시간만 하라느니 하는 말까지 할 정도였으니까.

16549692099345.jpg‘어쩐지 그 이후로는 더 이상 설득을 시도하지 않는 게 이상하다 싶었어. 갑자기 날 재밌는 곳에 데리고 다니는 것도 이상했고.’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내가 일을 못 하게 하기 위해 이렇게까지 하다니! 정말 황당하기 짝이 없었다.

16549692099345.jpg‘심지어 나를 속이면서까지 말이지!’

그렇게 생각한 나는 상대를 향해 날카로운 시선을 던졌다. 만일 내가 잘못 짚은 것이었다면 벌써 그 세 치 혀로 뭐라고 말했을 텐데, 침묵을 지키며 고개를 조금 숙이고 있는 걸 보면 내가 제대로 짚은 것이 분명했다.

16549692099345.jpg“이해할 수가 없어요. 대체 왜 제가 일하는 걸 이렇게까지 싫어하시는 거예요? 아내가 일을 하는 걸 좋아하면 좋아했지 싫어해야 할 이유가 어디 있어요?”

나는 답답한 속을 터뜨렸다.

16549692099345.jpg“아니면 설마 여자는 일을 하면 안 된다, 뭐 그런 구시대적인 생각 때문에 그런 거예요? 그런 거라면 가만 안 둘 거예요. 당신이랑 다시는 외출하지 않고 하루에 10시간씩 일해 버릴 거라고요.”

16549692129045.jpg“그런 것이 아니야, 로벨리아.”

그렇게 말하는 알렉산드로스는 괴로워 보였다. 조금 머뭇거리는 것 같기도 했다. 그는 한 손으로 마른세수를 하더니 깊은 한숨을 쉬었다.

16549692129045.jpg“사실은……. 정말로 그대가 걱정이 되어서 그래.”

16549692099345.jpg“걱정이요?”

16549692129045.jpg“로벨리아, 난 한 달 동안이나 그대를 잃은 뒤 기적처럼 되찾았지. 물론 그것만으로도 그대에게 몇 번이고 감사해야 할 일이지만……. 하지만 그건 쉽게 잊히는 기억은 아니더군. 그대를 되찾은 지금도, 틈만 나면 지난 한 달간의 일들이 떠올라. 아무리 착각에서 비롯된 감정이었다 해도, 그 감정들이 현실이 될까 봐 두려워. 한 달이 한 달이 아니게 될까봐. 그대를 다시 잃어버리게 될까 봐…….”

그 말을 들으면서 나는 몇 번이나 충격을 받았다. 첫 번째로는 아무렇지 않아 보였고, 언제나처럼 능숙하고 유들유들해 보였던 그가 내심으로는 그때의 일을 큰 상처로 가지고 있었다는 것 때문이고, 두 번째로는 그의 입에서 그런 솔직한 고백이 나올 거라곤 상상도 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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