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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3. 대신관의 가면 (93/151)

93. 대신관의 가면2021.11.21.

그러니 알렉산드로스에게 로벨리아의 다정함은 위태로워 보이면서도 사랑스러웠다. 그 다정함이 변치 않았으면 싶으면서도, 한편으론 그녀가 상처 입지 않기를 바랐다. 그건 몹시 어려운 일이었다. 황실은 다정함만으로는 자기 자신을 지킬 수 없을 정도로 위태로운 곳이니까. 그러니…….

16549691415946.jpg‘내가 그녀를 지키는 수밖에 없다.’

알렉산드로스는 굳게 다짐했다.

16549691415946.jpg‘그것만이 그녀의 다정함이 변치 않으면서도 그녀가 안전할 수 있는 길이다.’

그녀를 지켜내지 못한 일은, 단 한 번만으로도 충분했다. 두 번 다시는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으리라. 알렉산드로스는 자신의 삶 전체를 걸고 다짐했다. 이토록 사랑스럽고 소중한 그녀를, 무슨 방법을 써서라도 지켜내겠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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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6549691415946.jpg‘그런 의미에서 경계해야 할 인물이 두 사람 있지.’

알렉산드로스가 언제나 염두에 두고 경계하고 있는 사람이 두 명 있었다. 그건 바로…….

16549691415946.jpg‘아이샤. 그리고 대신관.’

그가 지금 아이샤를 경계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물증은 없다지만, 심증적으로는 로벨리아 시해 시도 사건의 가장 유력한 용의자였으니까.

16549691415946.jpg‘이전에도 생각했지만, 아이샤에게는 나와 닮은 점이 있지.’

호인인 척하는 겉껍데기를 뒤집어쓴 계산적인 인간이라는 공통점. 그 때문에 알렉산드로스는 자신과 아이샤가 닮았다고 생각했다. 한때 그것 때문에 그녀에게 아주 약간의 인간적인 호감을 느꼈던 적도 있었다.

16549691415946.jpg‘이러한 공통점 때문에 아이샤의 속내는 마치 내 손바닥 안처럼 훤하지. 황비는 일찍부터 로벨리아를 질투하고 견제했다. 그 때문에 로벨리아에 대해 나쁜 소문을 퍼뜨리고 상처를 주곤 했지. 하지만…….’

어둑한 집무실. 홀로 책상에 앉아 있던 알렉산드로스는 펜을 쥔 채 생각했다.

16549691415946.jpg‘하지만 기존에는 그저 소문을 내는 정도의 견제에서 그쳤다면, 로벨리아를 시해하려고 하는 등의 직접적인 피해를 주기 시작한 건 바로…….’

일순 알렉산드로스의 황금빛 눈에 강렬한 빛이 서렸다.

16549691415946.jpg‘대신관이 제국에 왔을 때부터다.’

그가 생각하기에, 이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16549691415946.jpg‘아이샤는 분명 속이 검은 인간이지만 혼자서는 남을 살해하는 정도의 큰일을 저지를만한 그릇은 못돼.’

그러니 대신관이 제국에 온 것과 로벨리아를 시해하려는 시도가 시작된 것, 이 두 사건 사이에는 분명 연관관계가 있었다. 알렉산드로스는 오래전부터 대신관을 경계하고 있었다. 그것은 어릴 적부터 이어져 온 그와 성국 사이의 악연 때문이기도 했고, 또 그만의 또 다른 이유 때문이기도 했다.

16549691415946.jpg‘결국 두 사건 사이의 연관관계를 따져보자면…….’

알렉산드로스는 날카로운 눈으로 생각했다.

16549691415946.jpg‘아이샤는 하수인일 뿐이고, 적극적으로 로벨리아를 시해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는 건 대신관이다.’

그래, 그것밖에는 없었다. 지금 알렉산드로스가 로벨리아를 지키기 위해 가장 경계해야 할 인물은 바로 그였다. 대신관. 대륙의 정신적인 구심점인 성국의 원수. 살아 있는 위인, 성자의 현신으로까지 불리는 바로 그 남자.

16549691415946.jpg“분수에 맞지 않는 칭송을 듣는 것도 얼마 남지 않았어.”

알렉산드로스는 입꼬리를 비틀어 올렸다.

16549691415946.jpg“반드시 그 가면을 벗겨주지, 대신관.”

  *** 사교 시즌이 시작된 지 벌써 세 달이나 되었으나, 수도에는 사교 행사다운 사교 행사가 한 번도 열리지 않고 있었다. 시작행사는 황후 시해 시도 사건으로 인해 중단되고, 그 직후에는 황후가 죽은 것으로 알려져 국장을 준비하느라 무도회 같은 것을 열 분위기가 아니었던 것이다. 로벨리아가 살아 돌아오자 모두가 기뻐했으나, 곧 이러한 불평도 일어났다.

16549691444318.jpg“내 생에 이렇게 지루한 사교 시즌은 처음이야.”

16549691444318.jpg“사교 행사다운 사교 행사가 한 번도 없었던 사교 시즌은 근 60년 만이로군요.”

있을 만한 불평이었다. 자신의 영지에서 지내던 귀족들은 오로지 사교 시즌만을 위해 먼 길을 지나 수도에 올라왔으니까. 그래서 알렉산드로스는 로벨리아가 돌아온 것을 기념하고, 지금까지 사교 시즌을 제대로 보내지 못한 것을 만회하기 위하여 성대한 황실 무도회를 개최했다. ‘로벨리아가 돌아온 것을 기념하기 위한’ 무도회다 보니 그 주인공이 빠질 수는 없었다. 사교 시즌이 시작된 뒤 3개월 만에 열리는 사교 행사다운 사교 행사였기에 수도의 거의 모든 귀족이 참석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무도회장이 북적였지만……. 이 자리에 참석하지 못한 사람이 딱 두 명 있었다.

16549691444326.jpg‘케일럽과 노먼은 무도회에 참석하지 못했구나.’

그 두 사람은 아직 자택 연금 중이었기에 무도회에 올 수 없었다. 그 자택 연금도 자신 때문에 받은 것인지라 로벨리아는 책임감을 느꼈다.

16549691444326.jpg‘모두 무도회에 왔는데, 그 두 사람만 못 왔으니 얼마나 지루하고 심심할까. 내일 바로 두 사람에게 선물이라도 보내주어야겠네.’

하지만 그들에 대한 생각은 오래 할 수 없었다. 어느덧 익숙하게마저 느껴지는 단단한 팔이 그녀의 허리를 감아왔기 때문이다. 그쪽을 돌아보자, 아니나 다를까 대단히 잘생긴 얼굴이 다정하게 웃으며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16549691415946.jpg“많이 피곤해 보이는군.”

그가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16549691415946.jpg“피곤하다면, 휴게실로 가서 쉬어도 좋아.”

로벨리아는 새삼스럽게 그와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인파를 바라보았다. 어마어마한 인파가 그들을 둘러싸고 있었다. 연예인이 대로변에 나타나도 이 정도는 아닐 거라고 로벨리아는 생각했다. 황제와 황후이니 당연히 주목받을 수밖에는 없겠지만, 지금 그들이 관심을 한 몸에 받는 이유는 그뿐만이 아니었다.

16549691444318.jpg“황후 폐하, 위클리 오피니언에 실린 인터뷰는 잘 읽었습니다. 다만 신문에 실린 기사가 아닌 황후 폐하께서 직접 말씀해주시는 의견이 듣고 싶은데요…….”

16549691444318.jpg“옆 나라까지 다녀오시면서 많은 고생을 하셨다는 것이 사실인가요?”

16549691444318.jpg“국장이 준비되고 있다는 것을 알았을 때 기분이 어떠셨나요?”

16549691444318.jpg“황제 폐하께서 식음을 전폐하고 걱정하고 계시다는걸 아셨을 때는요?”

로벨리아는 ‘죽은 줄 알았으나 살아 돌아온 자’였고, 지금 제국에서 제일 인기 있는 러브 스토리의 주인공이었다. 어마어마한 이슈의 한복판에 있는 그녀의 이야기를 직접 듣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이럴 줄 알고 로벨리아와 알렉산드로스는 사전에 말을 맞춰놓았고, 몰려오는 관심에 최대한 응대해주기는 했지만……. 그러나 그것도 슬슬 힘에 부쳤다. 그만큼이나 그들에게 쏟아지는 질문이 어마어마하게 많았던 것이다. 알렉산드로스의 말에 로벨리아는 잠시 멈칫했다.

16549691444326.jpg‘그래도 되나? 하지만 여론을 최대한 우리가 원하는 쪽으로 바꿀 기회인데.’

그녀가 머뭇거리는 사이 먼저 움직인 쪽은 알렉산드로스였다.

16549691415946.jpg“이만하면 됐다. 황후가 피곤해하는군. 호기심은 알겠지만 이제 그만 질문을 거두도록.”

그는 멀리까지 들리는 목소리로 분명하게 말한 뒤 사람들의 질문을 끊었다. 사람들은 여전히 궁금증이 덜 풀린 듯한 얼굴이었으나, 황제의 명이니 어쩔 수 없다는 듯 길을 비켰다. 그런데 그때였다.

16549691444318.jpg“황비 전하, 그리고 대신관님 납십니다!”

호명관의 목소리와 함께 익숙하나 반갑지 않은 얼굴들이 나타났다.

16549691474737.jpg“아, 안녕하세요. 황제 폐하, 그리고 황후 폐하를 뵙습니다.”

아이샤는 그들을 보자 어색하게 예의를 차렸다. 답지 않게 조금 긴장한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16549691474741.jpg“황제 폐하, 그리고 황후 폐하를 뵙습니다. 좋은 밤입니다.”

반면 대신관은 언제나처럼 예의는 깍듯이 차리면서도 여유가 있는 듯한 모습이었다.

16549691415946.jpg“좀 늦었군. 두 사람 모두 충분히 즐기고 가도록.”

알렉산드로스는 짧게 인사하며 로벨리아를 데리고 휴게실로 가려고 했다. 하지만 대신관이 그것을 놔두지 않았다.

16549691474741.jpg“황후 폐하, 이리 간만에 폐하의 건강한 모습을 뵈니 무척이나 기쁩니다. 이 역시 모두 신의 인도하심이겠지요.”

16549691444326.jpg“그렇네요. 저도 무사히 돌아와서 다행이라고 생각해요.”

로벨리아는 여상하게 대답했다. 하지만 대신관의 말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16549691474741.jpg“저 역시 신문을 읽었습니다만, 정말 많은 고생을 하셨더군요. 그런 고난을 겪고서도 이리 무사히 돌아오신 것이 신께서 안배하신 기적으로 느껴집니다.”

16549691444326.jpg“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16549691474741.jpg“특히 윈터펠 지역의 마력 측량을 친히 하러 가셨다는 부분도 인상적이었습니다. 여인의 몸으로 결코 쉽지 않은 일일 텐데……. 옥체에 손상을 입을 수 있는 일임에도 불구하고, 사람을 쓰지 않고 황후 폐하께서 직접 가셨다는 데에서 ‘노블레스 오블리주’가 느껴지더군요.”

로벨리아는 대신관의 말에 기묘함을 느꼈다. 그는 언제나처럼 친근한 척 담소를 건네러 온 것이 아니었다. 로벨리아의 감이 맞다면, 그의 의도는 분명…….

16549691444326.jpg‘기사의 내용이 맞는지 떠보고 있구나.’

그녀는 생각했다.

16549691444326.jpg‘대신관은 알고 있는 거야. 기사의 내용은 일정 부분 거짓이라는 걸. 알렉산드로스가 나를 감싸기 위해 나의 흠이 될 수 있을 만한 부분은 최대한 가려주었다는 걸.’

알렉산드로스가 짠 시나리오는 완벽했기에 흠잡을 데가 없었지만, 그래도 황궁에서 지냈던 대신관은 알고 있었을 것이다. 로벨리아가 도망친 직후, 황궁에서 있었던 혼란을. 그녀를 찾으려고 했던 알렉산드로스의 비이성적인 태도를. 그것을 두 눈으로 목격했다면, ‘로벨리아가 알렉산드로스와의 합의 하에 국정 조사를 하러 떠났다’는 공식적인 발표가 의심스럽게 느껴질 수도 있으리라.

16549691444326.jpg‘그 의심을 개인적으로 물어봐서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많은 사람들의 앞에서 떠보는 방식으로 해결하려 한다는 것은……. 분명한 의도가 있는 행동이겠지.’

부채의 뒤에서 로벨리아는 곁눈질로 주변인들의 반응을 살펴보았다.

16549691444318.jpg“대신관님께서 황후 폐하를 진심으로 걱정하고 계시는군요.”

16549691444318.jpg“성력에는 치유의 힘이 있으니, 아마 황후 폐하께서 다치신 데가 있으면 치유해주시려는 것이겠지요.”

하나 대신관의 로벨리아를 떠보려고 하는 노골적인 의도를 눈치챈 사람은 거의 없어 보였다.

16549691444326.jpg‘그럴 만도 하지. 대신관은 살아 있는 위인이고 모두의 존경을 받고 있으니까. 그의 언행은 하나하나 좋은 의도로 선해(善解)될 거야.’

그렇다고 대신관이 심어놓는 의문의 씨앗이 효력을 가지지 않는 것도 않으리라. 대신관의 의도가 성공한다면, 그의 말에 의문을 갖는 사람들도 분명히 있으리라. 실패한다 해도, 모두가 대신관은 순수하게 걱정하는 마음으로 물어본 것이라고 생각할 터이니 결국 그가 손해 볼 일은 없었다. 어느 쪽이건 간에 대신관은 손해를 안 보고 로벨리아만 손해를 보는 판이 짜인 것과 다름없었다.

16549691444326.jpg‘아이샤처럼 멍청한 상대는 아니야. 잘 생각해서 대답해야겠는걸.’

로벨리아가 그렇게 생각하던 그때였다. 크고 단단한 손이 그녀의 양어깨를 감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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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549691415946.jpg“황후는 많은 질문을 받은 탓에 피곤해하던 참이네. 질문을 거두어달라고 했는데, 그건 아무리 그대라고 해도 예외가 아니지, 대신관.”

알렉산드로스가 낮고 위엄 있게 울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정치적 이익에 예민한 그가 다른 사람도 아니고 성국의 국가원수를 상대로 말을 끊을 줄은 생각도 못 했기에 로벨리아는 깜짝 놀랐다. 하지만 진짜 놀랄 만한 말은, 그 뒤에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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