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 내 아내의 맨살을 남자에게 보일 순 없지2021.11.18.
유령처럼 창백한 얼굴로 두서없는 이야기를 늘어놓던 아이샤는, 문득 상대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대신관이 이 일들을 알게 되면 몹시 분노하여 자신을 구타할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는 의외로 화를 내지도, 자신을 때리지도 않았다. 오히려 그는 꽤 차분해 보이기까지 했다.
“고작 그런 일로 이렇게 얼빠져 있었던 건가요.”
“고작 그런 일…… 이라고요?”
“심증은 있다고 해도 물증은 전혀 없지 않습니까. 제대로 된 물증이 없으면 아무리 제국의 황제라고 해도 성국이라는 뒷배를 가지고 있는 당신을, 그것도 제가 제국에 있는 지금 어찌할 수는 없을 겁니다.”
“그, 그거 정말인가요?”
아이샤는 침대 위를 기어와 대신관에게 다가갔다.
“대신관님, 진심으로 하신 말씀이지요? 저를 안심시키려고 그렇게 말씀하신 게 아니지요? 저 정말로 죽고 싶지 않아요. 특히나 이런 곳에서는요.”
“물론입니다. 당신은 죽지 않아요. 하지만…….”
대신관이 고민하는 듯한 얼굴로 자신의 턱을 쓸었다.
“기왕 이렇게 된 이상, 일을 서두를 필요는 있을 것 같군요.”
*** 로벨리아가 막 마차에서 내리려는 순간이었다. 큰 손이 그녀의 눈앞에 내밀어졌다. 알렉산드로스였다. 그가 다정히 웃으며 말했다.
“조심해.”
로벨리아가 그 손을 잡자, 알렉산드로스의 다른 팔이 허리를 휘감아 그녀는 깜짝 놀랐다. 그냥 손을 잡고 내려오라는 뜻인 줄 알았는데, 그는 로벨리아를 들어 올려 내려주었다.
모든 마차가 그렇듯이 내려오는 발 받침은 좁고 가팔랐고, 덕분에 조금도 힘을 쓰지 않아도 되어 좋긴 했지만……. 아무래도 좀 민망했다.
‘가게 직원들이 다 보고 있잖아.’
두 사람은 가게에 들어섰다. 제국의 황족은 VVIP이니만큼 가게의 모두가 그들에게 극진한 대접을 아끼지 않았다. 가게에는 그들 외에는 손님이 아무도 없었다. 아마 그들이 편한 쇼핑을 하도록 일부러 이 시간을 비워둔 것이리라. 그들은 가장 크고 호화로운 접객실로 안내되었다. 곧 달콤한 핑거푸드가 가득한 2단 접시와 3가지 종류의 차가 나왔다.
“오시느라 많이 피곤하셨을 텐데, 손과 발 마사지를 해드릴까요?”
“아니, 그럴 필요까진 없어요.”
로벨리아는 차를 한 모금 마시며 대답했다.
‘그저 잠옷을 구경하러 왔을 뿐인데 약간 부담스럽네.’
하지만 부담스러워하는 티를 낼 수는 없었다. 그녀는 공녀이자 황후였으므로.
“황후 폐하의 치수를 재어드리겠습니다.”
다섯 명의 직원들이 줄자로 로벨리아의 신체 치수를 쟀다. 지금껏 기억도 나지 않을 정도로 많은 옷을 주문했기 때문에 이 과정은 로벨리아에게 무척 익숙했다. 신체 치수를 재는 직원들은 모두 여성이었으나, 응대 직원 중에는 남자 직원도 있었다. 그는 핑거푸드가 줄어들 때마다 새 음식을 채워 넣는 일을 했는데, 접객실과 외부를 바삐 오가다가 그만 실수로 로벨리아와 부딪치고 말았다.
“정말 죄송합니다, 황후 폐하.”
“뭘요, 이 정도 가지고.”
팔과 팔이 스친 정도라 로벨리아는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하지만 이 사소한 일을 신경 쓰는 사람이, 이 자리에 딱 한 명 있었다.
“……!”
남자 직원은 어느 순간 뒤통수가 저릿저릿해질 정도의 시선을 느꼈다. 바로 알렉산드로스였다.
“…….”
그는 소파에 앉은 채 남자 직원을 노려보고 있었다. 여름이었고, 치수를 재기 위해 로벨리아는 재킷을 벗은 상태였다. 팔과 팔이 부딪쳤다고는 해도 그녀의 팔은 맨살이 드러나 있었다. 남자가 그녀의 맨살과 스치다니, 그 불쾌함을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점장, 부탁할 것이 있는데 말이지.”
“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알렉산드로스의 옆에 서 있던 점장이 물었다. 알렉산드로스는 나직하게 대답했다.
“우릴 접객하는 직원 중 남자를 전부 여자 직원으로 교체해주었으면 좋겠군. 내 아내의 맨살을 남자에게 보이기 싫어서 말이야.”
*** 로벨리아는 신체 치수를 재고, 카탈로그 북도 보고 샘플 잠옷도 실컷 보았다.
‘이제 당분간 잠옷은 안 봐도 되겠는걸. 잠옷이라는 말만 들어도 질려.’
그런 그녀의 마음은 모른 채, 점장은 열정적으로 말했다.
“다른 카탈로그도 가져올까요? 아니면 샘플을 입어보시겠어요?”
마침 점장의 열정적인 영업에 신물이 나려던 찰나였다. 잠시라도 영업 멘트를 듣지 않고 쉬고 싶었으므로 그것은 좋은 핑계였다.
“뭐, 그것도 좋겠네요. 그럼 여기 샘플만 놓고 나가주시겠어요?”
“입으시는 걸 도와드리지 않아도 될까요?”
“폐하께서 도와주실 거예요.”
로벨리아의 말에 점장을 포함해 모든 직원들이 접객실을 우르르 빠져나갔다. 곧 방 안에는 로벨리아와 알렉산드로스만이 남았다. 그녀는 한숨을 쉬며 소파에 몸을 묻었다.
“어쩜 저렇게 영업을 열심히 한담. 황후에게는 구경만 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네요.”
“피곤하면 일찍 돌아가는 것도 괜찮아.”
“여기 말고도 갈 데가 아직 남아서요.”
로벨리아는 고개를 돌려 알렉산드로스를 보았다. 그는 그녀를 향해 몸을 완전히 돌리고 있었다. 그녀의 사소한 쇼핑에 알렉산드로스가 따라온 것은 처음이었다. 그가 얼마나 바쁜지 정도는 그녀도 알고 있었다. 그가 할 일이 없거나 심심해서 따라온 것은 아닐 것이다.
“여기까지 따라오신 건, 역시 저의 안전을 위해서인가요?”
암살 시도를 두 번이나 겪은 그녀였다. 이런 상황에서 ‘자신을 적극적으로 살해하려고 하는 세력이 존재한다’는 걸 눈치채지 못할 그녀가 아니었다. 알렉산드로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검은 로브를 입은 마법사를 기억하나?”
“물론이죠.”
“그대를 습격했던 마법사는 여럿이었지만, 전부가 분신이고 진짜 마법사는 단 한 명이었어.”
“그 사람은…….”
“그래, 예상했겠지만 제레미 홀튼이야. 마탑주가 말했던 실종된 마법사.”
알렉산드로스가 천천히 설명했다.
“제레미 홀튼과 암살을 사주한 자 사이에 오고 갔던 전령(傳令) 마법의 흔적을 발견했어. 구체적인 내용까지는 읽을 수 없었지만, 그 마법이 황궁을 오갔다는 것만은 확실해.”
“그렇다는 건 역시…….”
“그래.”
알렉산드로스는 가벼운 미소를 얼굴에 걸치고 있었으나, 그 목소리는 더없이 묵직한 무게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대의 암살을 사주한 건 황궁 내부의 인물이야.”
로벨리아는 한숨을 쉬었다.
“아이샤겠군요, 역시.”
원래 아이샤와의 관계가 좋지 않긴 했지만, 그래도 그 상대가 자신에 대한 안 좋은 소문을 퍼뜨릴 정도로 자신을 싫어하는 것과 자신에게 명확한 살의를 가지고 있는 것은 기분이 완전히 달랐다.
‘원작 속에서는 눈치는 없어도 그렇게 나쁜 애는 아니었는데……. 대체 왜 이렇게 되어버린 건지.’
그런 생각을 하면 가슴 속에 돌이 얹히는 것만 같았다. 그녀의 그런 무거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알렉산드로스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그 외에는 동기가 있는 자가 없지.”
“…….”
로벨리아는 고민에 빠진 얼굴로 대답하지 않았다. 그런 그녀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알렉산드로스는…… 놀라운 말을 했다.
“황비를 제거해줄까?”
“네?”
“암살은 그쪽에서만 시도할 수 있는 일은 아니지.”
그는 웃고 있었으나, 로벨리아는 그가 농담을 하고 있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알았다. 그의 눈빛은 더없이 진지했던 것이다.
“물론 위험부담이 있는 일이기는 하지만, 내게 그대의 안전보다 중요한 것은 없어.”
로벨리아는 그 말의 무게감을 알고 있었다. 그건 그녀에게 호의를 사기 위해 그냥 해 보는 말이나 책임 없는 말이 아니었다. 그는 정말로 그녀를 잃어버리는 경험을 한 사람이었으니까.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더 그냥 넘어갈 수 없어!’
로벨리아는 알렉산드로스의 손등을 찰싹 소리가 나게 때렸다.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릴 하는 거예요? 아이샤라는 심증만 있고 물증은 없는 상황인데, 정말 만에 하나 그녀가 범인이 아니면 어쩔 거예요? 더군다나, 아이샤를 죽이는 건 곧 성국과의 전쟁을 의미하는 거잖아요. 저를 많이 걱정하셨다는 건 알겠지만, 아무리 그래도 저 때문에 그렇게까지 이성을 잃어버리면 안 되죠. 당신은 이 제국의 기둥이라고요.”
그녀는 긴말을 한순간도 쉬지 않고 한꺼번에 쏟아냈다. 그녀의 단호한 태도에, 알렉산드로스는 손등을 문지르며 씩 웃었다.
“나의 황후가 이렇게까지 조국의 외교사정에 대해 관심이 많은 줄은 몰랐군. 외교를 위해서 자신의 안위를 더 신경 써주었으면 좋겠는데 말이지.”
“제가 죽고 싶은 사람인 줄 아시나요? 물론 그러고 있고, 앞으로도 그럴 거예요.”
알렉산드로스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로벨리아는 자신의 안전을 신경 쓰고 있고, 조심하고 있었다. 그녀는 죽고 싶은 마음이 티끌만큼도 없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자꾸만, 자신이 죽은 줄 알았을 때의 그의 모습이 떠올랐다. 살아는 있으나 삶을 온전히 소유하고 있지 않은 것 같았던 그의 모습. 모든 것을 잃어버린 자의 공허한 눈빛. 그것을 로벨리아는 평생 가도 잊어버릴 수 없을 것 같았다.
‘만일 내가 진짜로 죽으면, 그때는 정말로 그도 무너져버릴지 몰라.’
만일 그렇게 된다면…… 로벨리아는 죽어서 저승에 있어도 도무지 마음이 편치 못하리라.
‘그러니 내가 꼭 살아남아야 해. 그가 망가지지 않게 하기 위해서라도.’
그리고 그런 그녀의 속마음을 알렉산드로스는 눈치채고 있었다.
‘로벨리아는 자신이 죽기 싫어서 자신의 안위를 신경 쓴다고 말했지만, 나는 알 수 있다. 그녀가 자신의 안위를 신경쓰는 진짜 이유는 내가 무너지는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라는 것은.’
그녀가 없다는 것만으로도 자신이 어디까지 무너질 수 있었는지, 그는 이번 일로 알게 되었다. 그것은 알렉산드로스 자신에게도 충격이었다. 그러니 마음 약한 로벨리아에게는 더했으리라. 한 달 만에 처음 만났을 때 자신을 본 그녀의 놀란 얼굴을 그는 도저히 잊을 수 없었다.
‘그녀는 책임감이 강하고, 약자에게 따뜻한 사람이지. 제국의 황제인 내가 무너지면 대단히 많은 사람들이 피해를 입을 것이라는 것을 그녀는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러니 그녀는 제국이, 내가 무너지지 않기 위해 스스로의 안위를 신경 쓸 수밖에.’
겉으로는 끊임없이 강한 척, 악녀인 척하지만 사실 여리기 짝이 없는 그녀의 본모습을 그는 알고 있었다. 그 다정함은 황족이라는 위험한 자리에 도무지 어울리는 성정이 아니었다. 그러니 언제나 그녀가 걱정될 수밖에. 하지만…….
‘걱정되면서도, 그녀의 그런 모습에 강하게 끌리고 있다는 걸…… 이제 도저히 부정할 수가 없겠군.’
그는 쓴웃음을 지었다. 그에게 있어서 선한 자는 두 가지였다. 그의 친모처럼 유약하고 자신의 이해타산을 챙기지 못하는 자. 혹은 자신이나 아이샤처럼 선을 흉내 내며 뒤에서는 이해타산을 챙기는 자. 결국 둘 중 하나였다. 자신의 이해타산을 챙기지 못하는 것을 남으로부터 착한 사람이라고 포장되거나, 아니면 자신이 직접 스스로를 포장하거나. 그것은 험난하며 잔혹한 어린 시절을 거쳐 왔던 그의 오랜 가치관이었다.
‘평생 가도 바뀌지 않을 줄 알았던 그런 생각이, 한 사람으로 인하여 바뀌게 될 줄이야.’
유약하지 않고, 자신의 이해를 따지는 선이라는 것도 있었다. 스스로 착한 척 가면을 쓰고 뒤에서는 검은 수작을 벌이지 않는 선이라는 것도 있었다. 로벨리아는 그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았다. 그녀는 강인했고, 현실적이었으며, 챙길 것은 챙길 줄 알았고, 자신의 선행을 내세우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선했다. 약자에게 다정하고 강자에겐 누구보다도 엄격했다. 그것은 제국의 주인이라고 해도 마찬가지였다. 그건 선인으로 일컬어지는 자라고 해도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그녀는 그에게 많은 것을 알려주었다. 그 중 하나는 자신의 식견이 얼마나 좁았던가에 대해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