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 돌아온 걸 후회하지 않도록 노력하지2021.11.11.
물론 기자회견에 반발을 드러내는 기자들도 있었다.
“내가 보기에는 황후 폐하와 공작의 염문이 틀림없다니까! 염문설을 틀어막으려고 거짓 발표를 한 거야!”
“그럼 다음 호 편집은 어떻게 할까요? 기자회견 내용에 집중해서 보도할까요? 아니면……?”
“기자회견보다는 염문설에 집중해! 그리고 슈워츠코프 공작과 황후의 주변에 기자를 뿌려서 한 가지라도 더 단서가 있는지 샅샅이 살펴!”
이런 움직임을 놓칠 알렉산드로스가 아니었다. 워낙 많은 관심을 받는 사건이다 보니, 기자회견 이전부터 온갖 말도 안 되는 소문이 돌아다녔다.
“역시 황후 폐하와 공작이 눈이 맞아서 도망친 게 분명해!”
“황후 폐하와 황제 폐하가 크게 싸웠대요.”
“사실 황후가 외국의 세작이라던데요?”
심지어 온갖 신문들의 가십을 위한 추측성 기사들까지. 세간에는 로벨리아가 황궁을 떠난 이유에만 50가지가 넘는 소문이 존재했다. 이 일에 대해 비서관 로버트 역시 무척 진지하게 받아들였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폐하. 역시 각 언론사들에게 황실을 모욕하지 말라는 내용의 공문을 내리고, 추측성 기사를 자제하게끔 하는 편이 좋을까요?”
역시 그것이 보통 사람들의 생각일 것이다. 하지만 알렉산드로스의 생각은 달랐다.
“아니. 오히려 바람잡이를 해서, 제일 작고 보잘것없는 언론사들까지 끝도 없는 추측성 기사를 쓰게 하도록 해라.”
“예? 하지만 그렇게 하면 이 논란이 더 커지지 않겠습니까?”
로버트가 말렸으나, 알렉산드로스는 자신의 생각을 바꾸지 않았다. 결국 로버트는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그렇게 해서 이번 사건에 대한 소문은 끝도 없이 불어났다.
“사실 황후 폐하께서 옆 나라의 공주이며 세작이라면서요?”
“아니야, 사실은 드래곤이라고 하시던데?”
“사실 공작이 성국의 신관이래요. 그래서 황후 폐하와 공작이 함께 성국에 귀의할 예정이었다더군요.”
“황후 폐하께서 잠시 돌아가셨던 건 독을 먹었기 때문이라면서요?”
“아니야, 황후 폐하께서 드래곤이시니까 동면에 들어가셨던 거야.”
“황후 폐하께서 위대한 신탁을 듣고 돌아오셨대요.”
“사실은 공작이 해적이라 약탈혼을 위해 황후 폐하를 납치한 거래요.”
그렇게 말도 안 되는 소문이 50가지, 100가지, 200가지……. 끝도 없이 불어나자 처음에는 이 흥미로운 가십에 탐닉하던 사람들도 점점 지쳐가기 시작했다.
“아무리 그래도 해적이니 드래곤이니 한 건 너무 간 것 같아.”
“너무 허무맹랑해. 이런 기사를 지금 믿으라고 쓴 거야?”
“그래서 진짜 사실이 대체 뭐야?”
바로 그때, 대형 기사가 터졌다. 「단독 : 로벨리아 황후와의 인터뷰 황후 사망 사건의 진정한 진실이 밝혀져……. 황후 암살의 비밀?! 그 범인은?」 가십지에서 꽤나 신뢰받는 주간지로 탈바꿈한 위클리 오피니언이었다. 위클리 오피니언은 로벨리아의 인터뷰와 함께, 기자회견의 내용을 분석하고 자세히 설명한 기사를 무려 24p의 분량으로 실었다.
온갖 허무맹랑한 추측성 기사에 지쳐 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대거 쏠릴 수밖에 없었다.
“이번 위클리 오피니언 봤어요?”
“역시 싸구려 가십지보다는 위클리 오피니언이 믿을만하죠.”
“지난 사건 이후로 황후 폐하의 첫 인터뷰라니! 이건 특종이야!”
“저도 한 부 줘요!”
위클리 오피니언은 ‘로벨리아의 정부’ 사건 이후로 최고의 발간 부수를 올렸다. 위클리 오피니언의 성공을 본받듯이, ‘제국 5대 일간지’로 불리는 주요 언론사들 역시 앞다투어 기자회견의 내용을 주된 골자로 한 기사를 실었다.
“역시 황실의 공식 발표만큼 믿음직한 건 없어.”
“자극적이기만 한 싸구려 가십지를 누가 믿겠어?”
“이제야 속이 시원하네. 이게 바로 진실이었구먼.”
자극적인 추측성 기사에 질린 사람들은 결국 황실의 공식 발표 내용을 받아들였다. 가십을 좋아하는 사람들의 특성을 이용해서, 추측성 기사를 과다공급하여 오히려 가십에 질리게 만들어 공식 발표를 쉽게 받아들이게 하는 것. 그것이 바로 알렉산드로스의 계략이었던 것이다.
“정말 대단하십니다, 폐하. 이렇게 큰 사건의 논란이 고작 2주 만에 가라앉을 줄이야…….”
비서관은 감탄했다. 하나 알렉산드로스는 비서관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하는 대신 그는 미소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디로 가십니까?”
“이 일을 축하해야지.”
알렉산드로스가 짧게 말했다. 그는 더 이상 설명하지 않고 집무실을 떠났으나, 그 짧은 말만으로도 비서관은 그가 어디로 가는지 깨달았다.
‘황후 폐하와 함께 축하하려고 하시는군.’
*** 마침 로벨리아의 쌓인 업무 역시 거의 다 끝나가고 있었다.
“이걸 언제 다 할 수 있을까 걱정했는데, 간신히 겨우 다 했네.”
로벨리아가 시녀들에게 말했다.
“다 너희가 도와준 덕이야. 정말 고맙구나.”
“뭘요, 저희는 아무것도 안 한 걸요.”
“거의 다 폐하께서 하셨잖아요. 일하시느라 잠도 줄이시고…….”
시녀들은 수줍어하면서도 그녀의 솔직한 감사 표현에 기뻐서 어쩔 줄 몰라 했다. 로벨리아가 그런 시녀들의 모습을 흐뭇하게 보던 그때였다.
“귀한 손님께서 오셨습니다.”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다른 시녀의 말에 로벨리아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것은 시녀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저희 방해 안 할게요.”
“폐하, 파이팅!”
뭐가 ‘파이팅’인지는 모르겠지만, 시녀들은 로벨리아에게 기대감이 가득한 얼굴로 응원을 해주곤 자리를 떴다.
“들어오시라고 하렴.”
곧 기다리던 손님의 모습이 나타났다. 바로 알렉산드로스였다.
“제국의 태양을 뵙습니다.”
솔직히 말해서, 로벨리아는 요즘 그를 마주하는 것이 조금 어색했다.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모르겠어.’
더 이상 그를 밀어내지 않기로 결심했다. 그의 진심을 마주하고, 진지하게 대해주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하지만 뭘 어떻게?
‘아무래도……. 그동안 해온 일이 있다 보니 갑자기 잘해주기도 뭔가 좀 이상하지 않나? 게다가 난 모쏠인데.’
멋쩍게 그런 생각을 하고 있던 그때였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잘 알겠군.”
나직한 웃음소리가 귓가를 간지럽혔다.
“너무 그렇게 고민하지 않아도 괜찮아. 그대에게 무언가를 강압하는 일은 결코 없을 터이니.”
‘이 인간한테는 대체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한 달 만에 처음 보았을 때의 모습을 생각하면, 그 역시 굉장히 많은 고민과 고뇌를 겪었으리라고 로벨리아는 어림짐작했다.
“신문에 난 기사는 봤어요. 제가 한 일들을 수습하기 위해 많은 노고가 있으셨을 것 같더군요. 감사드리고 싶어요.”
“그런 말을 들으려고 한 일은 아니야.”
손사래를 치던 알렉산드로스의 눈이 깊어졌다.
“난 그대가 내게 돌아온 걸 후회하게 되길 바라지 않아. 단지 그것뿐이야.”
최근, 로벨리아는 느끼고 있었다. 요즘 알렉산드로스는 그녀에게 억지로 무언가를 해오지는 않지만, 그녀를 보는 그의 눈빛은 이전보다 한층 더 무겁고 진득해졌다는 것을. 그 깊고 무거운 감정에 이름을 붙이자면 역시……. ‘집착’이라고 해야 할까.
“그대가 돌아온 걸 후회하게 될 만한 일은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최대한 제거할 생각이야. 그러니 그대도 불편한 점이 있다면 내게 최대한 말해주었으면 좋겠군.”
신체의 접촉 하나 없이 그저 눈을 맞추고 대화를 나누고 있을 뿐인데, 그 눈이 이렇게 뜨거워 보일 수도 있다는 걸 로벨리아는 처음 알았다. 이렇게까지 맹목적이고 뜨거운 눈빛 앞에 서 있으니 꼭 발가벗겨져 있는 것만 같은 기묘한 기분이 들었다.
“고마워요. 필요한 게 생기면 말하도록 할게요.”
어쩐지 뜨거워지는 얼굴을 식히기 위해 그녀는 부채를 부치며 고개를 돌렸다. 부챗살 사이로 목은 채 감춰지지 않아 그녀가 침을 삼키는 모습이 고스란히 보였다. 그런 그녀의 표정을 한순간도 놓칠 수 없다는 듯이 지켜보던 알렉산드로스가 말했다.
“참, 강요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대의 평판과 안위를 위해 내가 부탁하고 싶은 것이 하나 있어.”
“뭔가요?”
“그대도 알다시피 이번 사건에서 가장 논란이 되었던 부분은 그대와 슈워츠코프 공작 사이의 관계야. 언론의 도움 덕에 대부분의 논란이 가라앉긴 했지만, 그래도 여전히 그대와 공작의 관계를 의심하는 시선이 많아.”
그것은 그럴 만도 했다. 사실 젊고 아름다운 남녀가 함께 도망쳤다고 하면 대부분 둘이 사랑에 빠져서 도피를 했다고 여길 것이다. 실제로 알렉산드로스의 언론 플레이 이전에 가장 압도적인 여론 역시 그것을 의심하는 내용이었다.
“그런 시선을 완전히 잠재우려면, 아무래도 당분간은 우리가 함께 행사에 참석해서 사이좋은 모습을 보여주어야 할 것 같아.”
“그건…….”
“그래, 이전에 하던 일과 같지. 그래서 그대가 거부감을 느낄 수 있을 거라는 것도 알고. 그래서 나는 그대에게 선택권을 주고 싶은 거야.”
알렉산드로스가 다정한 얼굴로 말했다.
“하겠나? 아니면, 하지 않겠나? 설령 하지 않겠다고 해도 그대에게 불이익은 없어. 설령 하지 않는대도 그대의 평판을 위해 내가 최선을 다할 것을 맹세하지.”
로벨리아는 생각했다.
‘이 일은 내 평판만 걸린 게 아니야. 노먼의 평판 역시 걸린 문제지.’
비록 노먼이 큰 벌을 받지 않고 넘어갔다고 해도, ‘공작이 황후와 눈이 맞아 그녀를 데리고 공작령으로 도망쳤다’라는 소문이 널리 퍼진다면 그의 평판에 큰 흠이 될 것이 뻔했다.
‘더군다나 그는 사생아 아들도 있으니 언젠가는 결혼을 해야 할 텐데, 황후와 눈이 맞아 도망쳤다는 과거가 있는 남자와 혼인하고 싶은 사람은 별로 없겠지.’
이번 일로 자신이 고생을 시킨 사람은 알렉산드로스뿐만이 아니었다. 노먼 역시 그녀로 인해 큰 피해를 본 사람 중에 하나였다.
‘그러니 내가 책임을 져야지. 적어도, 할 수 있는 만큼이라도.’
그렇게 생각한 로벨리아는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요. 계속해오던 일인데, 그 정도쯤이야.”
그렇게 대답한 로벨리아는 순간 깜짝 놀랐다. 알렉산드로스의 얼굴에 진심 어린 기쁨이 번졌던 것이다.
“잘 생각했어, 로벨리아. 결코 후회하지 않도록 내 노력하지.”
눈을 반달 모양으로 뜨고, 보조개가 패도록 웃는 그의 모습은 의외로 순수한 소년 같은 매력이 있기도 했다. 그가 그렇게 웃는 것은 정말 드문 일이었기에 로벨리아는 순간적으로 넋을 놓았다.
“그럼, 그렇게 결정한 김에 연습을 한 번 해볼까.”
“……연습이라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