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 스캔들 메이커2021.11.07.
눈가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시녀의 말에 로벨리아는 잠시 멈칫했다.
‘그래, 난 내가 스스로 선택해서 황궁에 돌아온 거지.’
그녀는 생각했다.
‘그러니 이제는 받아들일 때가 됐어. 새로운 몸, 새로운 관계, 새로운 삶을.’
그동안 그녀가 황궁에서의 삶에 초연했던 것은 언제나 이곳이 자신이 있을 자리가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외국으로 도망가든, 원래의 세계로 돌아가든, 언젠가는 다른 곳에서 새로운 삶을 꾸릴 것이라고. 지금의 삶은 그때를 위해 잠시 거쳐 가는 관문에 불과하다고. 대한민국의 대학원생, 임정아로 살다가 하루아침에 카스티야 제국의 황후 로벨리아가 되었으니 그 삶이 진짜 삶이라고 실감이 되지 않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하지만 수많은 일을 겪은 끝에, 로벨리아는 그런 사고방식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는지 깨달았다. 그녀가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는 지금의 삶을 너무나 진지하게 들여다봐 주는 사람들이 있다. 그녀를 그녀 자신보다도 소중히 여기고 걱정해주는 사람들이 있다.
‘내가 그동안 했던 행동들은 그런 사람들의 소중한 마음을 회피하는 것에 불과했던 거야.’
하루아침에 주어진 새로운 삶이, 이제는 진짜 자신의 것임을 받아들이는 것. 이것은 어떤 의미로는 황제의 시선을 피해 제국을 도망치는 일보다도 더 큰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다.
‘이제는 이 소중한 마음을 받아들이자. 정면으로 마주하고, 하나하나에 진지하게 임하자.’
하지만 로벨리아는 용감해지기로 했다. 자신과, 자신 주변의 소중한 사람들을 위해서. 로벨리아는 시녀들에게 미소 지었다.
“그래, 난 이제 어디에도 안 갈 거야.”
이 말에, 이 미소에 그 어느 때보다도 진심을 담아서.
“난 언제까지나 너희와 함께 있을 거란다.”
이 진심이 와닿은 것일까? 시녀들은 눈을 휘둥그레 떴다. 개중에는 놀라 딸꾹질을 하는 아이도 있었다. 그러다가 결국에는…….
“으아앙, 폐하! 정말 기뻐요!”
“진심으로 사모해요!”
“이제 영원히 함께 있는 거예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큰 소리로 울면서 안겨들자, 시녀들의 눈물 콧물이 드레스를 마구 더럽혔으나 로벨리아는 그녀들을 조금도 탓하지 않았다. 오히려 소탈하게 웃으며 손수건을 빌려주었다.
“그래도 너희의 장래를 위해서는, 언젠가는 퇴직을 하고 결혼하는 편이 좋지 않겠니?”
“결혼 안 해요! 독신으로 살면서 계속 황후 폐하를 모실 거예요!”
“저도요! 남자보다 폐하가 좋아요!”
손수건에 코를 팽 풀면서도 시녀들이 손사레를 쳤다. 로벨리아는 결국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진심 어린 행복과 고마움이 가득한, 그런 웃음이었다.
*** 황후가 도망쳤고, 죽은 줄 알고 국장까지 준비하였으나 한 달 만에 다시 돌아왔다. 이것은 어마어마한 사건이었기에 신분의 고저를 가리지 않고 모든 사람들은 모이기만 하면 이 이야기를 했다.
“황후 폐하께서 황궁을 떠나셨다는 소식을 들었나요?”
“심지어 황제 폐하께서 황후 폐하를 되찾기 위해 군사를 몰고 공작령으로 떠나셨다고 하던데!”
“황후 폐하께서 돌아가셨다면서요!”
“황제 폐하께서 식음을 전폐하고 슬퍼하고 계신대요. 역사에 남을 정도로 호화로운 국장을 준비하고 계신다고 하더군요!”
“글쎄, 황후 폐하께서 살아 계신대요!”
더군다나 로벨리아가 그 어느 때보다도 이슈를 몰고 다니는 황후였기에 더했다.
“그 황후가 언제 한 번은 크게 사고 칠 줄 알았어. 나는 늘 마음에 들지 않았다니까. 황후가 그리 정숙지 못하고 품위가 없어서야…….”
“저는 좋던데요. 사치스러운 악녀라고 불리고는 있지만 엄격한 건 강자를 상대로 할 때만 그렇고, 약자에게는 자상하다고 들었어요.”
“하지만 이번 일이 그 어느 때보다 대단한 사건이긴 하네요. 안 그래도 스캔들 메이커인데, 이렇게까지 큰일이 벌어질 줄이야…….”
수많은 사람들이 이 사건에 관심을 가지며 눈과 귀를 기울였다. 많은 관심이 몰리다 보니, 당연히 언론사들도 몰려들었다.
“궁인을 돈으로 매수하든, 무슨 짓을 하든 상관없으니 황궁에서 정보를 물어와!”
“하나라도 더 많은 기사를 써내! 추측성이든, 소문이든 상관없으니까 어서!”
“물 들어올 때 노 저어야지! 이런 대사건이 자주 터지는 줄 알아? 사람들의 관심이 꺼지기 전에 한 부라도 더 팔아야 해!”
매일 수백 명의 기자들이 황궁 앞에서 진을 치고 있는 진풍경이 펼쳐졌다. 한 조각의 정보라도 더 가져가기 위해, 꼭두새벽부터 밤이 늦어 다음날 새벽이 될 때까지도 그들은 촉각을 곤두세웠다. 심지어는 문지기의 눈을 피해 몰래 들어가려다가 쫓겨나는 기자들도 보였다. 취재 경쟁이 어찌나 심했는지, 궁인으로 변장을 해 들어가려 시도했다가 들켜서 몰매를 맞은 기자의 사례마저도 들려왔다. 이런 상황이 로벨리아는 무척 걱정스러웠다. 이 모든 일이 자신 때문에 벌어진 것이니 말이다.
‘어쩔 수 없지. 내가 벌인 일의 결과이니, 내가 책임을 지는 수밖에.’
그렇게 생각한 로벨리아는 되도록 의연하게 대처하기로 했다. 그간 대부분의 궁내부 업무를 전문가들의 손을 빌려 처리했던 로벨리아였으나, 그녀는 간만에 서류를 잡았다.
‘사안의 중대성이 크니 이번에는 내가 직접 처리하는 게 제일 좋겠지.’
그렇게 생각한 그녀는 자신이 부재한 동안 쌓였던 업무를 하나하나 처리해나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가끔 외출할 때마다 어마어마한 수의 기자무리와 맞닥뜨리고는 했다.
“황후 폐하!”
“황후 폐하, 한 말씀만 해주십시오!”
“어째서 황궁을 도망치신 겁니까?”
“어떻게 살아 돌아오실 수 있으셨습니까?”
“이번 사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무엄하다! 황후 폐하의 안전이다!”
“물러나지 않으면 처벌할 줄 알아라!”
호위기사들과 시녀들이 최선을 다해 로벨리아를 지키기는 했지만 그래도 그렇게 많은 기자들의 시선과 질문 포화 속에서 평정을 유지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다행히도, 로벨리아는 오랜 사회생활 경험이 있었다.
‘전생에 상관이 심각한 비리를 저질렀던 일이 생각나네.’
행정공무원이었던 그 시절, 그녀가 모시던 직속상관이 거액의 세금을 횡령했던 사건이 있었다. 그 사실이 밝혀지자 당연히 수많은 기자들이 몰려들었고 플래시 세례가 터져 나왔다. 자신이 취재의 대상은 아니었으나 그 옆에 있으면서 표정 관리하기가 어찌나 어렵던지. ‘상사에 대한 배신감도 컸고, 기자들의 관심도 당황스러웠지. 그래도 다행이야. 그 경험 덕에 지금 더 의연하게 대처할 수 있어서.’ 게다가 더 좋은 점이 있었다. 그때의 상관이 로벨리아에게 훌륭한 반면교사가 되었던 것이다.
‘저리 안 가?! 내가 누군지는 알아?!’
‘내가 말이야, 장관급 사람과도 연이 있는 사람이야!’
‘어디서 기자 나부랭이 주제에 건방지게 사람 앞길을 가로막아!’
분노를 못 이기고 시뻘게진 얼굴로 화를 내며 손가락질하던 상사의 모습은 근사한 컬러 사진으로 촬영되어 일간지 1면에 커다랗게 박혔다. 그 일 덕분에 더욱 많은 화제가 되고 비판을 받았음은 물론이다. 로벨리아는 그 일을 떠올리며, 최대한 담담히 행동하기로 했다.
‘화내거나 우는 건 내가 할 수 있는 일 중 최악의 대처야. 그러니 최대한 당당하게, 걸리는 일이 없다는 양 행동하자. 약한 모습을 보이지 말아야 해.’
그녀가 그렇게 생각하며 마음을 다잡던 그때였다.
“황후 폐하! 노먼 슈워츠코프 공작과의 염문이 사실입니까?”
“슈워츠코프 공작과 사랑에 빠져 공작령으로 도피하셨다는 소문이 사실인가요?”
뜻밖의 질문이 로벨리아를 멈칫하게 만들었다.
‘이번 일로 나의 평판이 떨어지는 건 어쩔 수 없지만, 노먼의 평판까지 더럽히는 건 곤란한데…….’
이곳이 혼외연애가 문제가 되는 곳은 아니지만, 결혼해 배우자가 있는 사람과 도망친 건 다른 문제이니까 말이다.
‘노먼의 명예를 위해 내가 한마디 해주어야 하나? 아니면…….’
발을 멈춘 로벨리아가 고민하던 그때였다.
“그 질문에 대해서는 내가 대신 대답하지.”
시장통처럼 소란스러운 가운데, 위엄있는 목소리가 선명히 울려 퍼졌다. 그 목소리에 기자들은 물론, 로벨리아까지도 가슴이 철렁하는 듯했다. 목소리 주인의 정체는 명백했다.
“황제 폐하……!”
기자들이 허리를 숙이고 예를 갖추는 가운데에서, 마치 바다가 갈라지는 기적과도 같은 모습으로 알렉산드로스가 나타났다. 그는 기자들의 모습을 길게 훑어보곤 피식 웃었다.
“나는 황후의 배우자이며 부부는 일심동체이니, 그 질문에 대해서는 내가 대신 대답해도 되겠지?”
“…….”
감히 그의 말에 이견이 있는 자가 있을 리 없었다. 알렉산드로스는 옆에 있던 기자의 음성 확대 마도구를 뺏어들었다. 그가 마도구에 대고 말했다.
“기자 제군들에게 알린다. 노먼 슈워츠코프 공작이 이번 사건에 깊게 연루되어 있던 것은 맞다. 하지만 황후가 황궁을 떠난 이유가 슈워츠코프 공작과의 연애 문제는 아니다.”
“그…… 그럼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기자의 질문에, 알렉산드로스는 자신감이 가득한 얼굴로 씩 웃고는 대답했다.
“안 그래도 이번 사건에 대해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는 기자 제군들을 위해 기자회견을 준비하였으니 이곳에 있는 그대들을 전부 초대하도록 하지.”
*** 기자회견은 바로 그날 오후에 진행되었다. 알렉산드로스의 준비는 완벽했다. 그는 로벨리아가 황궁을 떠난 이유, 노먼이 그에 협력한 이유, 로벨리아가 사망한 줄 알았으나 사실은 살아 있었고 돌아온 이유에 대해서 해답을 제시했다.
“그러니 결론은 황후 폐하께서 국정 조사를 하러 떠나셨고, 예상치 못한 문제로 황제 폐하와 공작이 함께 황후 폐하를 도우러 갔는데, 그 과정 중 황후 폐하가 노리던 암살자에게 살해당할 뻔하셨으나 호위기사의 마법으로 탈출할 수 있었다. 하지만 연락에 혼선이 생겨 황실 측에서는 살해당한 것으로 추측했고 황후 폐하는 직분에 책임을 다하기 위해 돌아왔다, 라는 거지요?”
기자회견에 참가한 로벨리아는 생각했다.
‘원래 완전한 거짓보다 무서운 건 진실이 약간 섞인 거짓이지. 역시 머리가 좋아.’
한편 기자들은 실망했다. 결국 혼외 염문도, 삼각관계도, 배신과 음모도 없었다. 자극적인 기삿거리는 안 되는 것이다. 다시 황후 암살 사건이 수면 위로 올라오긴 했지만 그것은 이미 식은 떡밥으로 그렇게 많은 관심을 끌 수 없었다.
‘굳이 꼽자면 연락 프로토콜에 문제가 있었던 황실에 대한 비판 거리 정도일까.’
자존심이 강한 알렉산드로스로서 그런 거짓 사실로 비판받는 것이 즐거울 리 없었을 것이나 그래도 그는 그렇게 했다. 그리고 그 이유는 분명…….
‘……당연히, 날 감싸기 위해서겠지.’
알렉산드로스는 로벨리아가 자신의 삶을 찾기 위해 도망쳤다고 발표하는 대신, 자신의 준비성이 부족했다고 발표하여 자신이 대신 비난받는 것을 선택한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뱃속에 무언가가 울렁이는 것이 느껴졌다. 게다가 그가 여론을 위해 준비한 시나리오는 이것뿐만이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