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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 로벨리아의 귀환 (88/151)

88. 로벨리아의 귀환2021.1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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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로벨리아와 케일럽은 노먼의 처형식이 예정된 광장으로 향했다. 마침 식이 치러지기 직전인지,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고 광장 중앙에는 처형대가 설치된 상태였다.

16549690428059.jpg“죄송합니다, 잠깐만 비켜주세요! 잠시만요!”

두 사람은 필사적으로 인파를 뚫고 처형대로 향했다. 그리고 마침내 인파의 맨 앞에 선 로벨리아의 눈에 들어온 것은…….

16549690428059.jpg“……!”

그곳에 그가 있었다. 장식과 무늬 없는 검은 상복을 입은 알렉산드로스의 모습이. 로벨리아의 기억 속에서 그는 언제나 옷깃 하나 흐트러지지 않을 정도로 빈틈이 없었으며, 대륙제일미라고 칭해질 정도로 아름다웠다. 사람을 대하는 태도에 여유와 자신감이 있었으며, 미모에 그런 태도가 더해져 그를 빛나는 듯 보이게 했다. 하지만 지금 그의 모습은……. 언제나 옷처럼 두르고 있던 여유와 자신감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의 얼굴은 여전히 아름다웠으나, 깊어진 눈과 안색에 드리워진 그림자는 그를 몹시 지쳐 보이게 했다. 웃음기라곤 없는 두 눈에 담긴 감정은 오로지 슬픔과 회한뿐이었다. 분명 같은 사람인데도 그를 감싼 분위기는 이전과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만약 인간의 정체성을 육체가 아니라 영혼에 놓는다면, 지금의 그는 로벨리아가 알던 이전의 그와는 거의 다른 사람일 것이었다. 그 모습을 보자 로벨리아는 숨이 턱하고 막히는 것 같았다.

16549690428059.jpg‘그가 그동안 겪은 마음고생이 어느 정도였는지 알 것 같아.’

로벨리아는 괴로운 마음으로 생각했다. 그리고 그의 괴로움은 모두 그녀로 인해 생겨난 것이었다. 그녀가 그에게서 이런 방법으로 도망치려 하지만 않았어도 일어나지 않았을 일이리라. 알렉산드로스가 자신에게 보여주었던 크고 작은 감정의 파편이 그녀의 눈앞을 스치고 지나갔다. 호인으로 보이는 겉모습은 그저 겉껍데기일 뿐, 아이샤 외의 타인은 진심으로 위할 줄도, 사랑할 줄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그가 자신에게 드러냈던 진심들. 그녀를 위해 하나씩 꺼내 보였던, 그의 인생 최초의 애틋함. 다정함. 수줍음. 그 모든 것들이 지금의 음울한 모습과 너무나 다르게 보여서, 그녀의 가슴을 아프게 만들었다. 한편으로는 알렉산드로스의 앞에 꿇어앉은 남자가 있었다. 바로 노먼이었다. 지금의 그는 공작이라는 직위가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초라한 모습으로 밧줄에 묶여 앉아 있었다. 비록 괴물 공작이라는 오명을 쓴 채 모두의 괄시를 받을지라도, 그 어느 때도 함부로 고개 숙이지 않을 만큼 자존심이 강하고 올곧은 그는……. 지금은 절망과 후회가 목 뒤를 누르고 있는 듯,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로벨리아는 그제서야 자신으로 인해 두 사람이 얼마나 큰 상처를 받았는지 실감했다. 하지만 충격에 빠진 채 구경만 하고 있을 수는 없었다. 사형집행인이 금방이라도 노먼의 목을 찍어낼 듯 도끼를 들어 올렸던 것이다. 그 모습을 본 순간, 로벨리아는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16549690428059.jpg“멈춰요!”

그녀는 더 볼 것도 없이 한달음에 처형대 위로 올라갔다.

16549690428059.jpg“그만 해요. 그 사람에겐 죄가 없어요!”

하지만 그녀의 앞은 금방 가로막히고 말았다.

16549690428085.jpg“웬 놈이냐?”

16549690428085.jpg“여긴 아무나 올라올 수 있는 곳이 아니다!”

황후 시해 사건으로 인해 극도로 긴장하고 있던 호위병들이 그녀의 앞을 막고 눈을 부라렸다.

16549690428097.jpg“방해꾼은 무시하고 처형을 집행해라!”

황제의 비서관이 사형집행인에게 명령했다. 그때였다. 알렉산드로스가 손을 들어 올려 비서관과 사형집행인의 행동을 막았다.

16549690428101.jpg“잠깐 기다려라.”

그는 굳어진 얼굴로 이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노먼 역시 의아한 얼굴로 그녀를 보았다. 기사들에게 끌려 내려가기 직전, 로벨리아는 뒤집어쓰고 있던 후드를 벗었다. 검은 후드 아래에서 곱슬거리며 물결치는 붉은 머리카락이 드러났다. 그 얼굴에는 오랜 시간 고생을 한 기색이 역력했으며, 제대로 씻지 못해 지저분했으나 두 녹색 눈동자에는 강한 의지가 반짝이고 있었다.

16549690428059.jpg“저예요! 로벨리아. 바로 저라고요!”

로벨리아가 있는 힘껏 외쳤다.

16549690428059.jpg“전 죽지 않았고, 노먼에게는 죄가 없어요!”

16549690428085.jpg“화…… 황후 폐하?”

그녀의 얼굴을 본 기사들이 당황해 얼어붙었다. 하지만 그들 중 누구도 알렉산드로스만큼이나 큰 충격을 받지는 않았다.

16549690428101.jpg“비켜라!”

기사들을 밀쳐내고 한달음에 달려온 그가 로벨리아의 팔을 붙잡았다. 그는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듯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 처음에는 헛것이라고 생각했다. 너무 오래, 깊이 그녀를 그리워한 탓에 본 환각이라고. 놀랄 일도 아니었다. 실제로 지난 한 달 동안 어딜 가도 그녀의 모습이 눈에 보이는 듯했으니까. 하지만 이번에는 그 어느 때와도 달랐다. 수없이 반복해온 자신의 상상과는 달리, 이번에 나타난 그녀의 모습은 마치 금방이라도 손에 잡힐 듯 생생했다. 상상에서와 달리, 몇 날 며칠 고생을 한 듯 너저분하고 머리카락도 온통 헝클어져 있었다. 게다가, 자신 말고 다른 사람들도 그녀가 보이는 듯했다. 기사들은 물론이고, 처형을 구경하러 온 군중 역시 놀란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렇게 무수한 시선 끝에서도 당당한 모습으로, 고난과 역경도 더럽힐 수 없는 강한 의지를 담은 듯한 눈으로 그녀는 자신의 눈앞에 서 있었다.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을 리 없었다. 로벨리아는 틀림없이 죽었다. 자신의 눈앞에서. 그리고 그 어떠한 대마법사도, 전설 속의 명의도 죽은 사람을 되살릴 수 없었다. 묻고 싶은 것이 너무나 많았다. 그녀가 어떻게 여기에 있을 수 있는 것인지. 죽었다가 살아난 것인지. 혹은 죽지 않은 것인지. 죽지 않았던 것이라면 여태까지 어디에서 뭘 하고 있었던 것인지. 그동안 고생하거나 힘들지는 않았는지. 어째서 자신을 찾아온 것인지. 하지만, 그 무수한 백 마디의 질문과 전하고 싶었으나 전할 수 없어 꾹꾹 억눌러 삼켜두었던 천 마디의 진심과 상념보다도……. 훨씬 빠르게 움직인 것은, 바로 그의 몸이었다. 그는 저도 모르게 그녀에게 다가가, 덮치듯 그 여린 몸을 끌어안았다.

16549690428101.jpg“내가…… 내가 지금, 헛것을 보고 있는 것인가?”

그의 목소리가 애처로울 정도로 부들부들 떨렸다.

16549690428101.jpg“아니, 대답하지 마라. 만일 그대가 헛것이라면…… 그래도 좋다.”

16549690428059.jpg“…….”

16549690428101.jpg“만일 그런 것이라면, 나는 영영 미친 채로 남아서 영원히 제정신으로 돌아가지 않겠다.”

떨리는 목소리로 속삭인 그는 그리웠던 붉은 머리카락에 얼굴을 묻었다. 영원히 이 순간에서 벗어나고 싶지 않았다. 그저 언제까지나, 이렇게 끌어안고 있을 수 있었으면 했다. *** 그의 쉰 듯한 목소리에 로벨리아는 가슴이 부서질 듯 아팠다. 알렉산드로스가 자신을 그리워하며, 실의에 잠겨 있다는 사실은 소문으로 들어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 정도일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16549690428059.jpg‘내가 죽은 줄 알고 있었는데도 한 달 동안이나 나를 그리워하고 있었어. 이 정도로 애달프게 오로지 나만을…….’

알렉산드로스가 결국 원작의 내용대로 아이샤에게 갈 것이라는 그녀의 예상은 틀렸다. 그는 결국 정해진 운명을 거스르고 자신의 진심을 증명했다.

16549690428059.jpg‘나는 어쩌면…… 그동안 원작의 내용에 갇혀서, 그의 진심을 제대로 직시하지 못하고 있었던 게 아니었을까?’

옆 나라에서 뿌려졌던 씨앗처럼 작은 깨달음은 싹을 틔우고 잎을 키웠다. 그리고 오늘, 자신을 잃어버릴 정도로 그녀를 그리워하는 그의 모습을 본 지금……. 마침내 완연한 꽃을 피워냈다. 로벨리아는 두 손을 뻗어 알렉산드로스의 얼굴을 잡아 눈을 맞추었다.

16549690428059.jpg“저는 헛것이 아니에요, 알렉산드로스. 당신은 미친 것이 아니고요.”

그녀의 말을 들은 알렉산드로스의 눈이 커졌다. 그의 생기 없던 눈동자에 금빛 격정이 일렁였다.

16549690428059.jpg“저는 오늘 처음으로, 제가 선택해서 이 자리에 왔어요.”

로벨리아가 활짝 웃으며 말했다.

16549690428059.jpg“제 의지로, 당신의 곁에 있기 위해서.”

알렉산드로스는 그녀의 말을 믿을 수 없다는 듯, 바로 반응하지 못했다. 몇 초의 침묵 끝에, 그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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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단한 팔뚝이 덮치듯 그녀의 등을 휘감고, 입술이 입술 위로 겹쳐왔다. 마치 오랜 세월 물을 마시지 못한 사람이 샘을 찾듯이 갈급한 태도로 그가 그녀를 얽어왔다.

16549690428059.jpg“으읍, 웃……!”

그의 얼굴을 감싸 쥔 두 손에서 힘이 빠졌다. 그녀는 그를 밀어내지 않았다. 그러는 대신, 조심스럽게 그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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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549690483004.jpg“…….”

두 사람의 모습을 지켜보던 케일럽은 괴로운 듯 시선을 돌렸다. 뱃속에 불을 지르는 듯이 질투심이 솟구쳐 올랐다. 양 주먹에 힘이 들어가고,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하지만…….

16549690483004.jpg‘난 다시 돌아가도 똑같이 했을 거야.’

만일 과거로 돌아갈 기회를 얻는다 해도, 그는 결국 로벨리아를 납치하지 못하리라. 오래 준비했던 마법은 그녀를 구하기 위해 사용할 것이고, 또 그녀가 원한다면 몇 번이고 이곳으로 돌아왔으리라.

16549690483004.jpg‘그러니까…… 내가 한 일을 후회하지 않아.’

그렇게 생각한 케일럽은 한숨을 내쉬곤 미소 지었다. 결국, 모든 것이 되어야 할 대로 된 것이다. *** 로벨리아가 돌아온 뒤 많은 것이 변했다. 우선, 노먼은 처형당하지 않았다. 비록 황후의 죽음에 대한 책임은 풀렸으나, 황후를 밖으로 빼돌리려는 시도에 대한 책임까지 사라진 것은 아니기에 노먼과 케일럽 모두 벌을 받았다. 하지만 로벨리아의 변호로 인해 삼 개월 동안의 자택연금이라는, 사건의 경중에 비해 지극히 작은 벌을 받았다. 그녀가 사실 죽지 않았다는 것, 게다가 제 발로 돌아왔다는 것을 많은 사람들이 기뻐했다. 초상집 분위기였던 황궁에 활기가 되살아났다. 그리고 가장 기뻐한 사람들 중 하나는 바로 로벨리아의 시녀들이었다.

16549690428085.jpg“황후 폐하! 다시는 못 뵙는 줄 알았어요!”

16549690428085.jpg“폐하! 흑흑……. 엉엉, 엉엉엉!”

시녀들이 한꺼번에 몰려들어 안겨들자 로벨리아는 휘청거리는 몸을 가눌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시녀들을 나무라지 않았다. 시녀들의 반응에 대해 큰 책임감을 느끼고 있기 때문이었다.

16549690428059.jpg“나 때문에 그동안 마음고생이 심했지? 정말 미안해, 애들아. 내가 잘못된 생각을 했어. 정말 후회하고 있단다.”

16549690428085.jpg“흑흑…… 정말요?”

16549690428085.jpg“저흰, 황후 폐하께서 저희를 버리신 줄 알고……. 게다가 그 먼 곳에서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고 얼마나, 엉엉!”

16549690428085.jpg“하늘이 무너지는 줄 알았어요! 흑흑흑…….”

16549690428059.jpg“그래, 내가 정말 큰 잘못을 했어. 진심으로 미안하구나, 애들아. 내 생각이 짧았어.”

로벨리아는 울음을 그치지 못하는 시녀들을 한 번씩 꼭 끌어안고, 진지한 사과의 뜻을 전했다. 시녀들이 울음을 그치고 진정하기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16549690428085.jpg“그래도 이렇게 돌아오셔서 정말정말 기뻐요.”

16549690428085.jpg“맞아요. 전 이제 더 바랄 게 없어요. 세상을 다 가진 것 같거든요.”

시녀들의 솔직한 말에 로벨리아의 가슴 속에 묵직한 무게감이 내려앉았다.

16549690428085.jpg“폐하, 이제 다시는 어디에도 안 가실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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