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 제가 폐하를 위로해 드릴게요2021.10.28.
물론 케일럽의 말도 일리가 있었다. 로벨리아의 원래 목표였던 해외에서의 소박한 삶을 이루기에 지금만큼 좋은 기회는 없으리라.
‘하지만 나를 위해 이렇게 많은 일을 해준 노먼을 나 몰라라 하고 도망칠 수는 없어. 알렉산드로스 역시 걱정이 되고……. 그 사람들이 어떻게 되었는지 알 수 있다면 좋을 텐데.’
로벨리아가 그렇게 생각하던 그때였다.
“그 소식 들었어요? 제국의 황후가 죽었대요.”
“그거 정말이에요?”
“그럼요. 제국 황실에서 공식 발표한 내용인걸요. 게다가 공작이 공개 처형될 거라고 하더군요.”
“제국의 공작이면 굉장히 높은 사람 아닌가? 그런 사람이 어쩌다가…….”
사람들이 수군거리는 이야기에 로벨리아의 귀가 번쩍 뜨였다. 그녀는 앞뒤 더 볼 것도 없이 사람들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잠깐만요, 그 소식 어디서 더 자세히 들을 수 있나요?”
“주민회관 앞에 공고가 붙었어요.”
사람들의 말에 로벨리아는 벽보가 붙은 곳으로 달려갔다. 놀라운 소식이라 그런지, 벽보 앞에는 이미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잠깐만요, 좀 지나갈게요. 잠깐만요!”
인파에 끼어든 로벨리아는 가까스로 벽보 앞에 섰다. 그리고…… 그녀가 마주한 소식은 정말로 놀라운 것이었다. 황후 로벨리아가 암살자의 공격에 사망하였으며, 이 일에 연루된 것으로 알려진 노먼 슈워츠코프 공작은 공개 처형될 예정이라는 것이었다. 벽보에는 황후의 국장과 공작의 처형식에 대한 안내가 자세히 나와 있었다.
“소문에 의하면, 황후를 잃은 슬픔으로 황제가 식음을 전폐하고 있대요.”
“역사에 남을 정도의 규모로 국장을 진행할 예정이라고 하더군요.”
벽보를 둘러싼 사람들이 수군거렸다. 로벨리아는 큰 충격을 받을 수밖에는 없었다.
‘이혼이 어려우니 도망쳐서 내 삶을 살겠다는 생각이 이런 큰 파장을 불러일으켰구나.’
그녀는 깊이 탄식했다.
‘결국 날 위해 헌신했던 노먼이 나 때문에 이런 큰 곤경에 처하고 말다니…….’
무거운 죄책감이 그녀의 어깨를 짓눌렀다. 하지만, 그녀의 죄책감은 노먼에게만 향한 것이 아니었다.
‘알렉산드로스가 오직 나 하나 때문에 이렇게까지 할 줄이야.’
정말로 예상하지 못한 것이었다. 자신을 되찾기 위해 공작령으로 군사를 이끌고 오고, 전쟁을 불사하며, 자신이 죽었다고 생각하자 공작을 처형하기까지 하리라곤.
‘슈워츠코프 공작가는 황실의 오랜 우군이니 그들과 척을 지는 일은 당연히 알렉산드로스에게 엄청난 손해야.’
로벨리아는 생각했다.
‘정치적 실익 계산에 철저한 알렉산드로스가 그 사실을 모를 리 없을 텐데. 그것도…… 겨우 나 때문에 이런 일을 벌이다니.’
이곳에 온 뒤로, 자꾸만 그의 마지막 얼굴이 생각났다. 늘 능글맞고 가식적이던 그가 지을 수 있을 거라고는 한 번도 생각하지 못한 얼굴. 진심으로 상처받은 듯한, 배신감과 고통으로 얼룩진 그 얼굴. 그 모습은 로벨리아에게 말 백 마디보다 훨씬 더 강렬한 진심으로 다가왔다.
‘생각해보면, 처음에는 진심이 아니었을지 몰라도…… 그는 내게 점점 더 솔직해졌었지.’
그의 분노, 사죄, 애원……. 많은 것들을 보아왔는데도 로벨리아는 그것들을 도무지 진심으로 바라볼 수가 없었다. 그녀는 원작을 읽었기 때문이었다. 이 세계의 예정된 운명 속에서 알렉산드로스가 얼마나 아이샤에게 맹목적이었는지, 그리고 로벨리아에게 냉혹했는지 알아서. 그래서 그가 자신에게 점점 더 진심이 되어가는 것을 알면서도 외면했다. 믿지 못했다.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그가 지금은 자신에게 호의적이어도 언젠가는 아이샤에게 돌아갈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만일 자신이 그의 호의를 믿고 마음을 한 자락이라도 허락했을 때, 그의 마음이 돌아선다면……. 자신만 진심이었고 상대의 외면을 받는 일을 두 번이나 겪고 나서 다시 일어설 자신이 없어서. 더 이상은 아무런 상처도 받고 싶지 않아서.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랐다. 알렉산드로스는 자신이 죽은 줄 알고 있었고, 그렇게 된 뒤로 벌써 2주에 가까운 시간이 지났다. 만일 알렉산드로스가 아이샤에게로 마음을 돌릴 것이었다면 진작 돌아갔으리라. 그러나 그는 그러지 않았다. 아직도 그녀에게 진심이었고, 그녀를 그리워하고 있었다.
‘나는 어쩌면…… 그동안 원작의 내용에 갇혀서, 그의 진심을 제대로 직시하지 못하고 있었던 게 아니었을까?’
문득 그런 씨앗처럼 조그마한 깨달음이 로벨리아의 가슴 속에 싹을 틔웠다. 어쨌든 이대로라면 노먼은 처형당할 것이고, 알렉산드로스는 자신이 죽은 줄 알고 계속 괴로워할 것이었다. 로벨리아는 그런 것은 도저히 두고 볼 수가 없었다. 결국 그녀는 결심한 듯 말했다.
“돌아가자, 케일럽. 가서 내가 죽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리자. 그렇게 해서 그 두 사람을 구하는 거야.”
케일럽은 아쉬움을 도저히 감출 수가 없었다. 어쨌든 그가 바라던 것은 이대로 로벨리아와 도망쳐서 그녀와 단둘이 사는 것이었으니까. 하지만, 자신은 그녀의 결정을 꺾을 수가 없었다. 그러고 싶지도 않았고. 그녀의 그런 모습조차 그가 사랑하는 것이었으므로. 그래서 케일럽은 씁쓸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원하시는 대로.”
*** 로벨리아의 국장을 준비하며 황궁 내의 모두가 비탄에 빠졌다. 하지만 단 한 사람, 기뻐해 마지않는 이가 있었다. 바로 아이샤였다.
“드디어 성공하다니! 솔직히 계획을 세우고 암살자를 보내면서도 정말 성공할 줄은 몰랐어요.”
로벨리아 일행이 만났던 검은 로브의 마법사 무리는 바로 아이샤와 대신관이 보낸 암살자였던 것이다. 아이샤는 로벨리아가 죽었다는 사실이 너무 기뻐 어쩔 줄을 몰랐다. 그동안 그렇게나 속을 썩이던 경쟁자가 사라졌으니, 그야말로 앓던 이가 쑥 빠진 듯 시원한 기분이었다.
“정말, 정말 잘 됐어요. 그렇지 않나요, 대신관님?”
하지만 대신관은 조금도 기뻐하는 것 같지 않았다. 그는 심각한 얼굴로 깊은 생각에 빠진 듯 보였다.
“하필 죽어도 황제의 눈앞에서 죽다니, 그야말로 최악이로군요. 이건 황제가 황후를 영영 잊지 못하게 만들어준 것과 다름이 없지 않습니까.”
하지만 한껏 들뜬 아이샤에게는 대신관의 말이 들리지 않았다.
‘대신관님은 너무 비관적이시라니까. 로벨리아가 아무리 난다 긴다 해도 어차피 죽었는데 대체 무슨 소용이야?’
다만 그걸 입 밖으로 내뱉었다가는 핀잔이나 들을 게 뻔했기에 아이샤는 마음속으로만 생각했다.
‘그 징그러운 여자가 죽었으니, 이젠 내 세상이 돌아온 것과 다름없다고. 그 여자가 빼앗아갔던 것들을 전부 다 돌려받겠어.’
그렇게 생각한 아이샤는 황비궁을 빠져나와 중앙궁으로 향했다.
‘알렉산드로스가 힘들어할 때 내가 위로해주면, 결국 그의 마음 역시 돌아올 거야. 그런 게 바로 내 전문이니까 말이지.’
알렉산드로스는 자신의 집무실에 있었다. 그는 먹고 마시는 것은 최소한으로 하면서, 괴로움을 잊기 위해 일에 전념하고 있는 상태였다.
“폐하, 어쩜. 얼굴이 반쪽이 되셨어요.”
아이샤는 울먹이며 그에게 다가갔다. 그녀는 알렉산드로스의 책상 위에 걸터앉고, 그의 손에 쥐어진 펜을 빼냈다.
“많이 힘드시죠? 얼마나 슬프고 괴로우실까……. 저랑 조금만 쉬어요. 아무리 그래도 산 사람은 살아야지, 죽은 사람을 따라갈 수는 없잖아요?”
“황비.”
알렉산드로스가 얼굴을 찡그렸다.
“혼자 있고 싶군. 나가줬으면 좋겠는데.”
“아이, 슬픔은 나눌수록 줄어드는 법이에요. 사람 때문에 생긴 상처는 사람만이 치유할 수 있어요. 폐하, 정말이에요.”
아이샤는 알렉산드로스의 뺨을 손바닥으로 쓸어냈다. 그의 매끄러웠던 피부는 상당히 거칠어져 있었다. 그녀는 알렉산드로스의 목을 끌어안곤 속삭였다.
“우리 폐하, 이렇게 안쓰러워서 어쩌면 좋아……. 그래도 저라도 있어서 다행이에요. 이렇게 폐하를 꼭 안아드릴 수 있으니까…….”
그때였다. 우당탕! 세상이 뒤집히고 아이샤의 눈앞에 별이 보였다. 그녀는 자신이 책상에서 굴러떨어졌음을 깨달았다. 알렉산드로스가 그녀를 밀쳐낸 것이다.
“쓸데없는 짓 하지 마라.”
낮고 음산한 목소리가 그녀의 몸을 짓눌렀다.
“그런 하찮은 잔재주로 내 마음을 돌릴 수 있을 것 같으냐. 착각하지 말아라.”
바닥과 부딪친 몸이 얼얼해 눈물이 핑 돌았다. 아이샤는 울컥해 소리 질렀다.
“이렇게 절 밀어내셔 봤자 소용없어요! 그래봤자 절 쫓아내실 거예요, 어쩔 거예요? 황족 간의 이혼은 성국이 허락하지 않잖아요!”
알렉산드로스는 허탈한 듯 나직하게 웃었다. 그는 벽에 붙어 있던 장식용 검을 꺼내 들었다.
“이혼이 불가능하다면, 죽여 버리면 되지 않겠느냐?”
그의 행동에 아이샤의 얼굴에서 핏기가 사라졌다. 그녀는 놀라 벌벌 떨면서도 애써 말했다.
“그…… 그것도 금지되어 있잖아요! 성국이, 성국이 그런 걸 허락할 것 같으세요?”
“상관없다. 지금의 내가 그런 걸 신경 쓸 것 같으냐?”
“하, 하, 하지만……!”
아이샤는 벌벌 떨며 책상 뒤에 숨으려 했으나, 알렉산드로스가 더 빨랐다. 그는 재빠르게 다가와 몸을 숙여 아이샤의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로벨리아가 저렇게 된 것이 너의 계략인 줄 내가 이제까지 모르고 있을 줄 알았느냐?”
“……!”
알렉산드로스는 그동안 독자적인 수사를 계속하고 있었다. 로벨리아 일행을 습격한 마법사는 바로 제레미 홀튼이었다. 다수로 보였던 것은 그의 특기인 분신 마법 때문이었으며, 실제로는 한 명이었던 것이다. 알렉산드로스는 암살자 길드를 조사한 끝에 제레미 홀튼에게 암살을 사주한 게 황실 내의 인물임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황실 내에서 로벨리아를 암살할만한 동기를 가진 인물은 아이샤밖에는 없다고 알렉산드로스는 생각했던 것이다. 물증은 없고 심증뿐이었으나 지금의 알렉산드로스에게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았다. 어차피 로벨리아는 죽었으므로. 핏기가 사라진 얼굴로 벌벌 떨던 아이샤는…….
“로벨리아가 도망친 건 저 때문이 아니라 폐하 때문이잖아요!”
아이샤는 젖 먹던 힘까지 쥐어 짜내어 소리쳤다.
“그러니 죄가 있다면 저보다 폐하의 죄가 더 커요. 그런데 왜 제가 죽어야 하냐고요!”
알렉산드로스는 기가 찬 얼굴로 아이샤를 내려다보았다. 그러더니 곧, 그는 집무실에서 빠져나갔다. 여전히 손에는 장식용 검을 쥔 채였다.
‘황비의 말이 맞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로벨리아가 죽은 데에 대한 가장 큰 책임은 나에게 있다.’
날이 서린 진검을 든 채 홀린 듯 어디론가 향하는 그를 본 궁인들이 기겁했다. 들고 있는 것을 떨어뜨리기도 하고, 등을 돌려 도망치기도 했다. 하지만 알렉산드로스는 개의치 않았다.
‘남을 탓할 일이 대체 뭐가 있단 말이냐. 내가 바로 죄인인 것을.’
아이샤의 말이 자신의 책임을 회피하기 위한 궤변이라는 것쯤은 알렉산드로스 역시 알고 있었다. 하지만 절망이 너무 크고 오래되었던 탓일까, 우습게도 알렉산드로스는 그녀의 궤변이 제법 설득력 있게 느껴지는 자신을 깨달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