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 로벨리아가 죽은 뒤2021.10.24.
눈을 떴는지 감았는지도 알 수 없었다. 숨을 쉬는지, 쉬지 않고 있는지도 몰랐다. 사실은 자신이 살아 있는지, 죽어 있는지조차도 확신할 수 없었다. 살아 있으나 살아 있지 않은 심정으로 알렉산드로스는 본궁으로 귀환했다.
“폐하, 제발 휴식을 취하셔야 합니다. 벌써 식사도 하지 않으신 지 오래되지 않으셨습니까.”
비서관이 애원했으나 어떠한 말도 와닿지 않았다. 비서관은 알렉산드로스가 어린 황자일 때부터 보좌해왔기에 그를 누구보다 걱정하는 사람이라는 사실도, 그래서 알렉산드로스 역시 비서관을 상당히 신뢰하고 오랜 시간 곁에 두어왔다는 사실도, 지금은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필요 없다. 듣고 싶지 않다.”
“하지만, 폐하! 이대로라면 옥체마저 무사하지 못하십니다. 부디 백성들을, 저를 생각하셔서라도 휴식을 취하셔야…….”
“듣고 싶지 않다고 했다!”
알렉산드로스는 비서관의 간청을 매정하게 뿌리치곤 자리에서 일어났다.
“폐하, 어디로 가시는 겁니까!”
“죄인을 심문하러 가겠다. 내 이 일의 잘잘못을 명백히 밝혀내리라.”
알렉산드로스의 얼굴에 길게 드리운 절망 아래에서 두 눈만이 형형히 빛났다. 그를 오랜 시간 모셔온 비서관은 알 수 있었다. 지금 그의 고집을 꺾을 수 있는 사람은 하늘 아래 아무도 없다는 것을. 비서관은 결국 그를 잡지 못했다.
*** 알렉산드로스는 황궁의 밑바닥, 지하 감옥으로 향했다. 삼엄한 경비가 지키고 서 있는 지하 감옥의 최심부. 그곳에 죄인이 있었다. 노먼 슈워츠코프. 그의 은발은 감옥을 비추는 작은 등 아래에서 푸르게 빛났다. 기운 없이 앉아 있는 모습 하며, 절망이 길게 드리운 얼굴까지. 그는 자신의 처지를 개선하려는 모든 의지를 잃은 것처럼 보였다. 알렉산드로스는 쇠창살 너머로 차가운 시선을 던졌다. 인기척으로 그의 존재를 눈치챈 듯, 노먼이 말했다.
“뭘 좀 여쭈어봐도 되겠습니까?”
“허락하지.”
“증거는 어디서 찾아내신 겁니까?”
로벨리아도 죽은 지금, 이제 와서 그런 것을 궁금해봤자 아무런 의미도 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그것은 노먼의 가슴 속에 아주 깊은 회한으로 남아 있었다. 자신이 그런 실수만 하지 않았더라면, 그녀를 성공적으로 도피시켰을지도 모르는 일이고, 그렇다면 로벨리아 역시 죽지 않았을 테니까. 노먼의 그런 심정을 알고 있기 때문일까, 알렉산드로스는 최후의 자비를 베풀듯 입을 열었다.
“노예의 숙소에서 찾았다.”
“예?”
“그 녀석이 네놈의 계획을 전부 기록하고 보관해두고 있더군. 네놈의 계획을 도청이라도 한 모양이지.”
케일럽은 노먼과 로벨리아의 계획에 대해 기록한 뒤, 도망치기 직전 꼬리가 잡히지 않도록 6서클 마법으로 증거를 제거하였다. 이 제거한 마법의 흔적을 찾고, 제거한 증거를 복구하려면 최소 그와 동등한 6서클 수준의 마법이 필요했다. 케일럽이 생각하기에 자신이 6서클이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로벨리아밖에 없었으니, 결국 아무도 증거를 찾아내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케일럽이 6서클의 마법사라는 사실은 알렉산드로스 역시 알고 있었다. 그는 케일럽이 로벨리아와 함께 사라졌다는 사실에 착안해서 6서클 탐지마법을 사용해 케일럽의 숙소를 조사했고, 결국 증거를 찾아낼 수 있었던 것이다. 알렉산드로스의 설명을 들은 노먼은 크게 놀랐다. 어린 노예가 6서클의 마법사라는 사실도, 그가 자신의 계획을 그르칠 줄도, 꿈에서도 상상하지 못한 일이었으니까.
“어린 노예에게는 저도 미처 신경을 쓰지 못했습니다. 유감이군요.”
“이번에는 내가 묻지.”
알렉산드로스는 쇠창살을 움켜쥐었다. 그의 살기 어린 기운이 지하 감옥의 모두가 느낄 수 있을 정도로 숨 막히게 내려앉았다.
“왜 이런 짓을 벌였지? 네놈은 로벨리아와 정을 내통한 것인가?”
노먼은 씁쓸하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렇지 않습니다. 제가 황후 폐하를 사모했던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분께서는 저에게 연애적 관심을 보이지 않으셨습니다. 조금도요.”
“내가 네놈의 말을 어떻게 믿지?”
“저를 믿지 못하시겠다면, 황제 폐하께서 보셨던 황후 폐하를 믿으십시오. 폐하께서는 황후 폐하가 혼외연애로 지아비를 버릴 무책임한 분으로 보이십니까?”
알렉산드로스는 말문이 막혔다. 로벨리아가 그럴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은, 다른 누구보다 알렉산드로스가 제일 잘 알고 있었다.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노먼은 말을 이었다.
“더 놀라운 사실이 뭔지 아십니까? 제게 도주를 부탁하셨을 때, 황후 폐하께서는 아직 저를 두 번밖에 만난 적 없는 시기였습니다.”
“그렇다는 것은…….”
“그렇습니다. 황후 폐하께서는 외간 남자와 사랑에 빠져서 도주를 선택한 것이 아닙니다. 황후 폐하께서 도망친 건 오로지 마음의 상처 때문이었습니다. 혼인 뒤 너무나 오랜 시간 동안 방치되었던 것! 그리고 자유의지를 억압하는 황제 폐하의 태도 때문이었단 말입니다.”
몇 날 며칠을 지하 감옥에서 햇빛조차 보지 못했음에도, 노먼의 기세는 조금도 꺾이거나 무뎌지지 않았다. 그는 두 개의 붉은 눈동자로 알렉산드로스를 똑바로 보며 말했다. 하지만 그것은 받아들이기에 너무나 괴로운 진실이었다. 로벨리아가 도망친 것도, 그래서 죽은 것도, 전부 자신의 탓이라는 사실을 알렉산드로스는 아직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거짓말 마라! 네가 로벨리아를 유혹한 것이 아니더냐? 그래서 로벨리아가 너와 도망친 게 아니란 말이냐!”
“황제 폐하, 진실을 회피하기 위해 비겁자가 되지 마십시오. 황후 폐하께서는 저를 사랑한 적이 없으십니다.”
알렉산드로스가 부정하려 해보아도, 노먼은 꿋꿋이 버티고 물러서지 않았다. 하지만 알렉산드로스도 결국에는 받아들일 수밖에는 없었다. 고통스럽다는 이유로 부정하고, 자기 자신을 속이기에 그는 지나치게 명석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로벨리아를 너무나 소중히 여기고 있었다. 로벨리아가 죽은 뒤로, 그는 계속 원망할 무언가를 찾고 있었다. 이 일에 연루된 것이라면 무엇이든 증오하고 분개했다. 그러지 않으면 도무지 견딜 수 없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하고, 되새기고, 그런 것을 뼈에 사무칠 때까지 반복해보아도……. 그 모든 것의 끝에는 자신이 있었다.
‘내가 이렇게까지 로벨리아에게 원망을 사지만 않았어도.’
알렉산드로스는 생각했다.
‘내가 로벨리아에게 그런 큰 잘못을 하지만 않았어도, 그녀는 이런 일을 겪지 않았을 것이다.’
그것만이 잔혹한 진실이었다. 로벨리아를 죽인 것은 바로 자신이나 다름없었다. 알렉산드로스는 창살에서 손을 떼고 얼굴을 감쌌다. 회한 어린 신음을 흘리며 비틀거리는 그를 노먼은 그저 지켜보았다. 긴 시간이 흐른 뒤, 알렉산드로스가 진정하는 기색이 보이자 노먼이 물었다.
“저는 이제 어떻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알렉산드로스는 얼굴을 감싸 쥔 손을 떼었다.
“법대로 처리할 것이다. 공작위를 박탈한 뒤, 일평생을 자택에 갇혀 지내리라.”
“감히 말씀드리건대, 저는 그런 삶을 원치 않습니다.”
노먼이 담담하게 말했다.
“저의 실수로 인해 황후 폐하께서도 돌아가신 이 상황에서, 아들에게 비참하게 목숨만을 연명하는 불명예스러운 아버지가 되고 싶진 않습니다. 차라리 아들의 앞길이라도 막지 않도록, 저는 명예로운 죽음을 택하고자 합니다. 제가 감히 이러한 것을 바랄 자격이 된다면, 황제 폐하께 최후의 자비를 간청하고자 합니다.”
알렉산드로스는 한숨을 내쉬고는 대답했다.
“네가 그리 원한다면, 그리하리라.”
“정말 감사합니다.”
알렉산드로스는 지하 감옥을 빠져나오며 생각했다.
‘만일 내가 목숨을 바쳐서 로벨리아를 되살릴 수 있다면, 주저 없이 그리하련만.’
죄를 지은 것은 자신이니 마땅히 자신이 죽고 죄 없는 로벨리아는 살아나는 것이 이치에 맞았다. 하지만 세상이 언제나 이치에 맞게 돌아가는 것은 아니었다. 아무리 간절히 바라도 할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이 세상에는 있었다.
‘나는 이제껏 대업을 위해서라면 자신은 물론 타인까지도 장기 말로 사용해왔다.’
한데 이제 와서 대업과는 관련 없는 이유로 자신의 목숨을 내버릴 마음이 들다니! 우습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1층의 현관 앞에 도달한 알렉산드로스는 문득 발을 멈추어 섰다. 어디선가 부산한 소리가 들려왔기 때문이었다.
“빨리 빨리, 이러다 늦겠어.”
“시종장님께 혼나겠다.”
종종걸음으로 달려가는 궁인들. 대열을 맞추어 움직이는 기사들. 광장에서 줄넘기 놀이를 하는 아이들. 다채로운 소리로 지저귀는 새와 정원을 뛰어다니는 작은 동물들. 로벨리아는 죽었는데도 변함없이 돌아가는 세계. 자신이 대의를 위해 바치려고 했던 모든 것들. 대의, 그 대단한 명분을 위하여 자신은 얼마나 많은 것을 놓쳤으며 얼마나 많은 과오를 저질렀는가. 그리고 그가 이 모든 것들을 깨달은 것은 로벨리아가 죽은 이후이니, 그동안 그렇게나 자부심을 가졌던 자신의 지혜는 얼마나 보잘것없는 것이었는가. 이제껏 자신이 이성적이고 현실적인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던 타인을 도구로 삼는 사고방식은 얼마나 어리석은 것이었는가.
‘깨달은 것을 그녀에게 말해줄 수 있다면 좋으련만. 그녀라면 틀림없이 기뻐할 터인데.’
알렉산드로스는 생각했다. 하지만 이제는 이 소원을 이룰 방법이 없었다. 지금, 그녀는, 어디에도 없었으니까. ***
“황후 폐하께서 제국이 아니라 제 고향에 계시다니 정말 별일이네요.”
케일럽이 어색하게 말했다.
“나, 나름 잘되었어요. 사실은, 꼭 한 번 모시고 오고 싶었거든요. 기왕 오시게 된 김에, 여기서 휴식을 취하시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아요. 제가 안내해드릴 테니까요.”
상황과 잘 어울리는 말이라고는 할 수 없었으나, 로벨리아는 케일럽을 탓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케일럽이 자신의 기분을 조금이라도 밝게 해주기 위해 일부러 저러는 것임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로벨리아의 걱정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노먼은 어떻게 되었을까. 그리고 알렉산드로스는……. 갑자기 사라졌으니 내가 살았는지 죽었는지도 모를 텐데.”
“음, 이런 말씀을 드리기에는 황송하지만, 황후 폐하의 상황도 그리 좋은 편은 아니니, 제일 먼저 황후 폐하 자신을 걱정하시는 편이 좋지 않을까요?”
“네 말도 맞아, 케일럽. 하지만…….”
로벨리아가 한숨을 푹푹 내쉬자, 우물쭈물하던 케일럽이 말했다.
“저어……. 기왕 이렇게 된 김에, 저는 황후 폐하께서 멀리 도망치시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해요. 어차피 황제를 피해 도망쳐서 외국에서 사시는 게 황후 폐하의 목표였잖아요? 이건 굉장히 좋은 기회 같은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