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 알렉산드로스의 증거2021.10.21.
노먼은 자신의 눈을 믿을 수 없었다. 상자 안에 담겨 있는 것은 정말로 물증이었다. 그것은 한 다발의 서류였는데, 노먼이 로벨리아를 도망시키기 위해 준비했던 것들, 그 모든 계획들이 담겨 있었다.
‘말도 안 돼. 모든 물증은 전부 처리했을 터인데……. 어떻게 이런 것이 남아 있지? 협력자 중 누군가가 배신했나?’
하지만 일개 일꾼으로서는 알 수 없을 만한 계획의 전체적인 청사진이 서류 안에 전부 담겨 있었다. 노먼은 혼란스러웠다. 이대로라면 자신이 공작이라고 해도 체포를 피할 수가 없었다.
“저항은 무의미하다, 공작. 이 이상 시간 끌 생각 하지 말고 얌전히 체포당해주는 것이 좋을 거야.”
알렉산드로스의 말에 노먼은 정신을 차렸다. 기사들이 검을 빼 들고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노먼은 허리춤의 검집에 손을 가져다 댔다.
‘이렇게 된 이상 시간이라도 끄는 수밖에 없겠군.’
다행히 알렉산드로스가 데려온 기사들의 숫자는 많지 않았다. 이 정도면 시간을 끌기 위한 목적으로 끌고 가면, 승리는 하지 못해도 시간은 꽤나 끌 수 있으리라. 기사들과 노먼이 거의 동시에 검을 빼 들었다. 기사들이 노먼에게 달려들었다.
“오시오!”
노먼은 각오를 다진 얼굴로 검을 치켜들었다. 하지만 그의 판단은 오산이었다. 고작 몇 번의 합을 주고받은 끝에, 노먼은 쓰러지고 말았다. 알렉산드로스는 검에 묻은 노먼의 피를 땅 위에 흩뿌렸다.
“별것도 아니군.”
그는 냉기가 뚝뚝 떨어지는 얼굴로 노먼에게 흘끗 시선을 주었다.
“체포해라.”
‘황제가 이렇게나 강할 줄이야.’
노먼 역시 황실 기사단장과 맞먹을 정도로 강력한 검사였으나 알렉산드로스의 검술에는 상대가 되지 않았다. 그는 결국 시간을 얼마 끌지 못하고 기사들에게 체포되었다.
“애꿎은 시간만 버렸군. 가지.”
알렉산드로스와 기사들이 다시 한번 북쪽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 한편, 로벨리아 일행은 노먼이 어떻게 되었는지 상상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공작님은 괜찮겠죠? 괜찮아야 할 텐데.”
“당연히 무사하실 겁니다.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로벨리아를 뒤에 태운 슈워츠코프 기사단장이 말했다.
“그보다 이제 곧 포탈입니다. 포탈을 이용하면 공작령이 코앞이지요. 공작령에만 도착하신다면 당분간은 안전하실 겁니다.”
기사단장의 설명에 따르면, 공작령은 험악한 기후의 산중에 있다고 했다. 그래서 외부인이 공작령에 들어오려면 험한 눈보라와 산악지형을 견뎌야 한다는 것이다.
“설령 실제로 전쟁이 난다고 해도 황제 입장에선 상당히 힘들 겁니다. 슈워츠코프 공작령은 수성전에서 단 한 번도 패배한 적이 없거든요.”
“그렇게 험난한 길인데 우리는 어떻게 들어가죠?”
“공작가의 극소수만이 아는 비밀통로가 있습니다. 그곳을 이용하면 비교적 쉽게 공작성에 입성할 수 있지요.”
기사단장은 로벨리아를 안심시켜주기 위해 일부러 좋은 이야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정말로 괜찮을 거라고 믿는 듯했다.
“물증도 없고, 주군께서 직접 공식적인 항의를 하러 가셨지요. 더군다나 황후 폐하께서 공작성에 숨어계시기까지 하면 제아무리 황제라고 해도 할 수 있는 일이 없습니다. 처음에야 발끈해서 군대를 보냈다고 해도, 시간이 흐르면 결국 포기하게 될 겁니다.”
어찌 됐건 자신을 이렇게 안심시켜주려고 노력하는 마음은 고마운 일이라, 로벨리아는 애써 미소 지었다.
“그런 말을 들으니 저도 좀 안심이 되네요. 고마워요.”
“하하, 아닙니다. 숙녀분을 위해서라면 당연한 일이지요.”
하지만……. 그녀는 도저히 기사단장만큼이나 마음을 놓을 수가 없었다. 아주 오래전 알렉산드로스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나 알렉산드로스 2세, 이 자리에서 메스타포에 맹세하지. 나는 무슨 일이 있더라도 그대를 놓아주지 않을 것이다.’
‘지금 이 순간부터 그대가 내게서 벗어나는 방법은 단 두 가지뿐이다. 그대가 죽거나. 아니면 내가 죽거나. 내 목숨이 붙어 있는 동안 그대를 포기하게 된다면 사후 불멸의 세계에서 불바다에 영원토록 타올라도 좋다.’
‘알렉산드로스는 그때 나를 포기할 바에는 지옥 불의 업화에서 타오르겠다고 했지.’
로벨리아는 생각했다.
‘그가 과연 지옥 불의 업화에 불타는 걸 선택할까, 공작령의 얼어붙는 추위를 견디는 걸 선택할까? 확신이 서지 않는걸.’
“저길 보세요! 포탈이 보입니다!”
앞장서 달리던 기사의 목소리에 로벨리아는 고개를 들었다. 그의 말은 정말이었다. 300m도 채 남지 않은 전방에 포탈의 형태가 보였다. 이젠 정말 금방이었다. 이 힘겹고 위험한 여행도 드디어 끝이 보이는 것이다.
“드디어……!”
“저기에만 도착하면 안심입니다. 황후 폐하, 정말 고생이 많으셨습니다.”
로벨리아와 케일럽, 기사들 모두가 기뻐했다.
“아직 안심하긴 이릅니다. 속력을 더 높이도록 하죠. 황후 폐하, 공작성에 입성할 때까지는 절대 저에게서 떨어지지 마십…….”
기사단장은 말을 끝맺지 못했다. 시퍼런 빛의 화살이 그의 목을 관통했다. 검붉은 피가 흩뿌려지고, 그의 몸은 말의 옆으로 떨어졌다.
“히히힝!”
“꺄아악!”
조종자를 잃자 놀란 말이 몸부림을 쳤고, 로벨리아의 몸은 멀리 튕겨져 나갔다.
“폐하!”
옆에서 다른 말을 타고 따라오고 있던 케일럽이 몸을 던졌다. 그는 순식간에 자신과 로벨리아를 감싼 구체 방어막을 만들어냈다.
“폐하, 무사하신가요?!”
“난 괜찮아, 케일럽. 하지만 이게 대체?”
떨어질 때 무사했다고 안심할 일이 아니었다. 로벨리아와 케일럽, 그리고 말을 멈춘 기사들의 눈앞에……. 검은 로브를 입은 마법사들이 나타났다.
“황후 폐하, 위험합니다!”
“뒤에 숨으십시오!”
기사들이 서둘러 로벨리아를 지키기 위해 나섰다. 그 강인한 슈워츠코프 기사단의 기사들이 항전했음에도 적은 무너지지 않았다. 오히려 마법사들의 맹렬한 공격에 기사들이 하나둘 쓰러져갔다. 마법사들이 기사들이 전부 쓰러뜨리는 데는 고작 3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 어느덧 로벨리아의 곁에는 케일럽밖에 남지 않았다. 검은 로브의 마법사들이 그들을 둘러쌌다.
‘어떡하지? 저 정도로 강한 놈들이라면 나 혼자만의 힘으로는 어려워!’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케일럽은 로벨리아에게 말했다.
“폐하, 제 손 꼭 잡으세요. 그리고 절대 놓치면 안 돼요. 아시죠? 제 마법 능력은 꽤 쓸만하니까요.”
로벨리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
그때였다. 콰직! 두 사람의 눈앞에서 마법사의 가슴을 꿰뚫고 검붉은 날붙이가 튀어나왔다. 검에 꿰뚫린 마법사가 쓰러지자, 주변의 다른 마법사들이 확연히 동요하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 쓰러진 마법사의 몸뚱이의 뒤에서 드러난 검은 인영. 피비린내. 말의 울음소리와 발굽 소리. 로벨리아는 누가 이곳에 도착했는지 깨달았다.
“알렉산드로스…….”
흑마 위에 올라탄 검은 옷의 사내. 알렉산드로스가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평소와는 다르게 흐트러진 검은 앞머리 사이에서, 그의 형형한 노란 눈동자가 원망과 분노를 담은 채로 그녀를 보고 있었다.
“로벨리아……!”
그가 끓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그런 시간은 오래 이어질 수 없었다. 다시 한 명의 마법사가 로벨리아를 향해 달려들었던 것이다.
“꺄악!”
“어딜!”
위험한 순간, 케일럽이 방어막을 펼쳤다. 그의 방어막은 단 한 번의 일격으로 깨어졌으나 로벨리아는 무사했다. 그 모습을 본 알렉산드로스 역시 말에서 뛰어내렸다. 그는 더 말할 것도 없이 검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그와 황실 기사단은 마치 검은 폭풍과 같이 마법사들을 처단하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전세는 역전되어, 어느덧 마법사는 한 명밖에 남지 않았다. 하지만 위험은 방심의 순간 찾아온다.
“……!”
마법사는 기사들의 손을 피해 믿을 수 없는 속도로 로벨리아를 향해 돌진했다. 마법사의 손은 그녀로부터 반 뼘도 채 되지 않는 곳에 있었다.
‘아차, 큰일 났다……!’
그 0.001초도 안 되는 찰나의 순간, 케일럽은 본능적으로 생각했다.
‘이대로라면 방어막을 펼쳐도 늦어!’
지금 이 순간, 그가 로벨리아를 지킬 수 있는 방법은 단 한 가지밖에 없었다. 케일럽은 오랜 시간 준비해 두었던 마법을 사용했다. 바로 비상 대피 텔레포트였다. 콰앙! 죽음을 각오한 검은 로브의 마법사는 손끝에서 자신이 가진 모든 마력을 폭발시켰다. 알렉산드로스는 순식간에 마법사의 목을 베어버렸으나, 그 어마어마한 불길과 검은 연기 속에서 인간이 살아남을 수 있으리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 그럴 리가 없어. 로벨리아! 로벨리아, 어디 있나! 대답해, 로벨리아!”
“폐하! 위험합니다!”
그는 기사들의 만류도 뿌리치고 연기 속으로 뛰어들었지만, 북서풍이 연기를 쓸어간 뒤 그곳에 남은 것은 시커먼 그을음뿐이었다. 알렉산드로스는 멍한 얼굴로 그을음 위에 서 있었다. 그곳에는 로벨리아는커녕, 그녀의 옷자락이나 머리카락 한 가닥 남아 있지 않았다.
“로, 로벨리아…… 로벨리아…….”
그는 애써 몇 걸음을 더 걷다가, 그만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 한편 로벨리아와 케일럽은 제국의 옆, 한 작은 나라에 도착했다. 그곳은 전쟁의 여운이 아직 가시지 않은 듯 황폐했으며 길을 가는 사람들 모두가 가난해 보였다.
“여, 여기는 어디니?”
로벨리아가 얼떨떨한 얼굴로 묻자, 케일럽은 멋쩍은 듯 뒤통수를 문질렀다.
“여긴 제 고향이에요, 폐하. 텔레포트 마법은 술자가 가본 곳에만 갈 수 있거든요.”
로벨리아는 거의 얼이 빠진 상태였다. 마법사에게 살해당하기 거의 직전이었는데, 갑자기 이런 곳으로 옮겨지게 되다니.
‘아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야.’
로벨리아는 생각했다.
‘나 하나 때문에 목숨을 잃은 공작가의 기사들……. 그리고 노먼.’
알렉산드로스가 그곳에 나타났다는 것은 노먼의 계획이 실패했다는 뜻이었다. 노먼이 지금 어떻게 되었을지 로벨리아는 너무나 걱정이 되어 견딜 수가 없었다.
‘게다가 케일럽이 이런 마법을 준비해 두었던 이유는 대체 뭐지? 그리고…….’
로벨리아는 도저히 잊을 수가 없었다. 알렉산드로스와 눈이 마주쳤을 때, 그의 그 얼굴. 그 괴로움과 실망감과 분노가 뒤얽혀 진득한 그림자를 만들어 발밑까지 질질 끌고 다니는 것만 같던 그의 모습. 알렉산드로스라는 인간에게서 발견할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던 그 모습이……. 로벨리아는 자꾸만 눈앞에 선연히 보이는 것만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