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 케일럽의 계획2021.10.17.
‘운이 좋아 공작으로 태어난 주제에 잘난 척하기는. 나도 공작으로 태어났더라면 황후 폐하를 위해 이 정도는 얼마든지 해드렸을 거야.’
하지만 아무리 얄밉고 화가 나도 어쩔 수 없었다. 자신은 공작이 아니었으니까.
‘이대로 황후 폐하와 공작이 계속해서 함께했다가는 황후 폐하의 마음 역시 공작에게 빼앗겨버릴지도 몰라.’
케일럽은 자신의 안에 감돌고 있는 막대한 마력의 술식에 대해 생각했다. 그것은 그가 로벨리아와 노먼의 계획에 대해 처음 알게 되었을 때부터 준비했던 마법이었다.
‘이 「긴급 대피 텔레포트」만 있으면 나를 포함해 2명의 사람을 언제든 순식간에 내가 미리 지정해놓은 장소로 옮길 수 있어.’
6서클 마법사인 자신이 오랜 시간에 걸쳐 준비한 것이었다. 이 마법을 막으려면, 자신과 비슷하거나 더 높은 수준의 마법사가 오랜 시간 준비한 마법이 필요하리라. 노먼은 현재 이걸 막을 방법이 없으니, 케일럽은 언제든 로벨리아와 함께 원하는 장소로 갈 수 있었다. 지금 당장이라도.
‘공작은 모르겠지만 사실 내가 더 우위에 있는 것과 마찬가지야. 내가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황후 폐하를 나만의 것으로 만들 수 있을 테니까.’
로벨리아와 노먼이 다정하게 대화를 나누는 동안, 그들이 보지 않는 케일럽의 손안에서 녹색의 불꽃이 파직거리며 튀어 올랐다. 케일럽의 갈색 눈은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운 채 로벨리아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하지만…….
‘역시 지금은 아니야.’
케일럽의 손에서 녹색 불꽃이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로벨리아를 손에 넣을 계획을 처음 꾸미기 시작했을 때, 케일럽은 로벨리아의 의사 같은 건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녀를 독점할 수만 있다면 결국 그녀의 마음을 손에 넣는 건 시간문제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동안 케일럽은 로벨리아의 곁에서 많은 것을 배웠다. 비참한 노예로서의 삶을 전전하면서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일지라도 타인을 진심으로 믿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라고 생각했던 케일럽은, 로벨리아를 진심으로 믿게 되고, 또 로벨리아가 자신을 진심으로 믿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그러한 신뢰가 얼마나 얻기 어렵고, 또 소중한지 알게 된 것이다.
‘내가 황후 폐하를 납치하면, 황후 폐하의 나에 대한 신뢰는 깨어질 것이고, 두 번 다시 되찾을 수 없게 되겠지.’
사람과 사람 사이의 신뢰라는 것은 현실을 모르는 자들의 소꿉장난에 불과하다고 여겼던 케일럽은, 어느덧 그런 생각을 하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뭉근하게 아파지게 되었다.
‘넌 이 피곤하고 복잡한 황궁 생활의 몇 안 되는 즐거움이야, 케일럽. 널 만난 걸 진심으로 기쁘게 생각하고 있단다.’
그런 다정한 말. 다정하게 머리를 쓰다듬어주는 손길. 경계심이라곤 없이 완전히 풀어진 미소……. 그 모든 것들이 로벨리아의 신뢰가 깨어지면 잃어버릴 것들이었다. 놀랍게도 지금의 케일럽에게는 그러한 작은 행복들이 로벨리아를 독점하는 것보다 소중하게 여겨졌다. 고작 몇 달 전까지만 해도 상상도 할 수 없었던 변화였다.
‘그래, 황후 폐하를 독점하기 위한 계획은 일단 보류하도록 하자.’
케일럽은 로벨리아의 옆얼굴에서 질투심이 어린 눈길을 거두고 애써 고개를 돌렸다.
‘이 마법은 일단 가지고 있기로 하자. 만에 하나, 나중에 쓸 일이 생길지도 모르니…….’
*** 노먼의 준비성은 철저했다. 그는 공작령과 마도구인 연락석을 이용한 ‘연락 프로토콜’을 구축하여 비상사태를 대비하도록 했다. 그런데 공작령으로 출발한 지 나흘째 되는 날, 그들은 연락석을 통해 놀라운 소식을 전해받았다.
“도망친 당일, 황제가 우리를 뒤쫓기 위해 군사를 보냈다고 합니다. 게다가 공작령에 ‘노먼 슈워츠코프가 황후를 데리고 도망쳤으며, 그녀를 돌려주지 않으면 전쟁도 불사하겠다’라는 내용의 의견서를 보냈다고 하는군요.”
“뭐라고요?”
노먼의 말에 로벨리아는 크게 놀랐다.
‘나를 찾기 위해 수색대를 풀 것이라는 정도는 당연히 알고 있었어. 언젠가는 꼬리가 잡힐 거라는 것 역시 알고 있었고. 하지만, 노먼이 관련자라는 물증은 남아 있지 않을 텐데 이렇게까지?’
케일럽 역시 로벨리아와 같은 생각을 한 것 같았다. 그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심증만으로 공작령과 전쟁을 하겠다고 선포한 건가요? 믿을 수가 없네요. 공작가는 황실의 오랜 우군이었으니만큼 경제적, 외교적으로 어마어마한 타격일 터인데…….”
“게다가 나쁜 소식은 이게 다가 아닙니다.”
“여기서 더 있다고요?”
“예. 군대와 함께 황제와 정예 기사가 우리를 뒤쫓고 있는데, 말을 탔기 때문에 마차를 탄 우리들보다 훨씬 빠르다고 하더군요. 이제 따라잡힐 때까지 얼마 남지 않았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넉넉히 잡아봤자 반나절 정도…….”
로벨리아와 케일럽의 얼굴이 한층 어두워졌다.
“그럼 이대로라면 붙잡히는 방법밖에는 없는 건가요?”
로벨리아의 걱정스러운 표정을 본 노먼은, 무언가 결심한 듯이 이를 꾹 악물었다.
“제가 황제를 만나서 시간을 끌어보겠습니다.”
“그럴 수는 없어요. 알렉산드로스가 당신을 죽이거나 감옥에 가두면 어떻게 해요?”
“아무리 그래도 슈워츠코프가의 공작을 아무런 물증도 없이 체포할 수는 없을 겁니다. 공작가에서 반드시 반발할 테니까요.”
“하지만…….”
로벨리아가 무어라 반박하려 하자, 노먼은 손을 들어 그녀의 말을 막았다.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제가 물증이 없다는 사실을 지적해서 그의 시선을 돌려놓겠습니다.”
그는 그렇게 말하며 미소 지었다. 그 미소는 괴물 공작이라는 오명과는 도저히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따스하고, 믿음직했다.
“제가 하려는 일은 그게 다입니다. 위험한 일은 결코 하지 않을 테니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황후 폐하, 결정을 내리셔야 해요. 이대로라면 정말 붙잡히고 말 거예요.”
노먼과 케일럽의 말에 로벨리아도 결국 결심을 굳혔다.
“알았어요. 시간을 끈다고 그를 자극하거나 그러면 안 된다는 거 아시죠? 무사하셔야 해요. 공작에게는 어린 아들도 있잖아요.”
“물론입니다. 믿어주셔서 고맙습니다.”
마차가 멈췄다. 노먼은 로벨리아의 손등 위에 가볍게 입을 맞춘 뒤, 기사의 말에 올라탔다. 그는 이제껏 달려온 방향의 반대로, 그러니까 알렉산드로스가 따라오고 있을 방향으로 출발했다. 그들은 마차를 버리기로 했다. 말에 비해 너무 느리기 때문이었다. 로벨리아와 케일럽은 기사의 말 뒤에 탔다. 마차보다 불편하기 그지없었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다소 불편하실지라도 조금만 참아주십시오. 이제 하루만 더 달리면 포탈입니다.”
“안 불편하니까 걱정 마세요.”
주변인들, 특히 어린 케일럽을 안심시키기 위해서는 자신이 힘을 내야 했다.
“이랴!”
기사가 말의 옆구리를 찼다. 말들은 막대한 양의 흙먼지를 만들어내며 땅을 박차고 달리기 시작했다. *** 노먼은 오래지 않아 알렉산드로스와 그의 기사들과 조우했다. 그들을 마주쳤을 때 노먼은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황제가 자신의 아내를 빼앗겼다는 사실에 분노하고 있으리라는 사실 정도는 예상하고 있었지만, 그의 모습은 그저 분노하는 것 그 이상이었다. 알렉산드로스, 그는 몇 날 며칠을 그저 쫓아 달리기만 한 듯이 머리카락과 옷매무새가 흐트러져 있었다. 빈틈없는 그가 이제껏 단 한 번도 보인 적 없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흐트러진 모습 이상으로 노먼을 놀라게 한 것은 그가 뿜어내고 있는 흉흉한 살기였다.
그 살기가 얼마나 짙고 강렬한지, 몇 미터 밖에서도 이미 숨이 억눌리고 살갗을 날카로운 바늘로 찔리는 것만 같았다.
‘나에게도 이 정도로 강하게 느껴질 정도라면, 보통 사람들은 그의 곁에서 도저히 버티지 못하겠군.’
노먼은 문득 그런 생각을 했다. 그의 얼굴을 보자마자 알렉산드로스는 입꼬리를 끌어올려 코웃음을 쳤다.
“내가 찾던 도적께서 친히 나타나셨군. 아니, 황제의 아내를 훔치셨으니 그냥 도적 정도가 아니라…… 대도(大盜) 정도로 칭해드려야 그 급수가 맞을까? 어떻게 생각하나, 공작?”
“저는 도적도 대도도 아닙니다, 황제 폐하. 저는 공작령에서 평온한 여름휴가를 보내고 있었습니다. 저는 황후 폐하를 훔치지 않았습니다.”
“그런 식으로 나오시겠다 이거로군. 그 올곧은 노먼 슈워츠코프가 쓰기에는 다소 비열한 수가 아닌가. 슈워츠코프 공작은 구부러질 바에는 부러질 남자라는 평이 자자하던데.”
“거짓말이 아닙니다. 공작령에 직접 문의해보십시오. 제가 휴가를 보낸 것에 대한 증거라면 얼마든지 있으니까요.”
알렉산드로스는 얼굴에서 웃음기를 지웠다. 그의 날카로운 눈이 노먼의 얼굴을 샅샅이 훑었다. 미약한 거짓의 기색이라도 찾아내려는 듯한 눈길이었다.
“나는 자는 시간도, 먹는 시간도 아껴서 여기까지 왔다. 네놈에게 낭비할 시간 따윈 없어. 시간 끌기를 하려고 해봤자 소용없다. 나는 내 것을 돌려받을 것이다.”
“시간 끌기를 하려는 게 아닙니다. 황제 폐하께서 공작령에 선전포고를 하지 않으셨습니까? 전 그것 때문에 여기 온 겁니다.”
노먼은 말에서 내린 뒤 맨몸으로 알렉산드로스와 기사들의 앞에 섰다.
“물증은 있습니까?”
“뭐?”
“제가 황후 폐하를 훔쳐 간 범인이라는 사실에 대한 물증 말입니다. 설마 물증도 없이 이런 불한당 같은 짓을 하고 계신 건 아니겠지요.”
노먼이 단호한 태도로 말했다.
“황제 폐하께서 평소 저를 좋지 않게 보고 계시다는 건 저도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겨우 심증만으로 공작령에 선전포고를 하고, 휴가를 보내고 있던 제게 이런 무례를 범하시다니요. 사적인 감정 때문에 저에게 이러시는 건 황후 폐하를 되찾는 데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습니다. 내려오십시오, 폐하. 계속 그 위에 앉아서 내려다보고만 계실 겁니까? 내려와서 저와 진지하게 이야기를 나누어봅시다.”
알렉산드로스는 잠시 노먼을 내려다보다가, 결국 말에서 내렸다. 기사들 역시 주군을 따라 말에서 내렸다.
“후회하게 될 거다, 공작.”
“뭘 말입니까?”
“전부. 내 아내를 유혹하고 훔쳐낸 것, 뻔뻔하게도 시간을 끌겠답시고 내 앞에 나선 것, 거짓말을 한 것, 말에서 내린 것. 전부가 네놈의 회한 어린 기억이 될 것이다.”
“정말 기가 막히는군요. 그래서 물증이 있냐고 물었습니다. 아무리 황제 폐하라곤 해도, 황실의 오랜 우방인 슈워츠코프 공작가에 이런 무례를……!”
“물론 있다. 있으니까 여기까지 온 것이다.”
“뭐라고요?”
“네놈이 그렇게나 좋아하는 물증 말이다.”
알렉산드로스는 기사들을 향해 손짓했다. 기사들은 말 뒤에 실려 있던 납작한 목재 상자를 꺼냈다.
“그럴 리가……!”
“보여주지. 이것이 네놈이 내 아내를 훔쳐 간 범인이라는 증거다.”